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2018년 한글날 즈음 방영된 정재환 교수의 강연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
어쩌다 어른 2018년 '한글날 특집 방송'의 한 장면 |
576돌 한글날을 맞아 '홍길동전'이 다시 호명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논란이 국문학계에서 꽤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별로 확산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다. 아니면 관련 연구가 인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의적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국문학계의 관련 논의를 접하고 과거 블로그에서 글을 썼던 게 있다. 그것을 조금 수정하여 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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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홍길동전》 허균 작자설, 아니 설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이 이야기는 의외로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최초의 기록
1674년 간행된 이식의 『택당집』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거의 유일한 근거라고 한다.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15, 「산록(散錄)」 |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다.]
번역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이 언급을 하는 맥락을 보면 '위조된 책'이나 '이설의 횡행'을 비판하면서 그 일례로 '수호지'를 언급하고, 그와 유사하게 지어진 '홍길동전'을 이야기한 것이다. 허균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홍길동전' 같은 '이설'을 떠드니 반란 혐의로 사형 당한 것이 어찌 그 응보가 아닐까 하고 말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이 언급된 그 단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許筠)과 박엽(朴燁) 등은 그 책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적장(賊將)의 별명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서로 그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번역 출처: 한국고전종합DB>택당집>15권>잡저>산록 中
허균에 대한 이식의 평가는 차치하고 이 내용을 근거로 '허균이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허균이 지었다고 알려진 그 이야기가 한문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능성을 낮게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당시 사대부가 언문(조선시대 '한글'은 언문으로 불렸다) 소설을 썼다면 일종의 스캔들이 될 수 있었다. 허균이 반란에 연루되어 죽은 것을 '응보'라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홍길동전》이 언문 소설이었다면 충분히 비판적으로 언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관련 언급이 없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허균의 《홍길동전》은 언문본이었을 가능성보다는 한문본이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인다.
허균의 한글 《홍길동전》 작자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허균의 다른 작품의 주제의식에 비춰볼 때 《홍길동전》을 그가 지었다고 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이는 아주 주관적이고도 간접적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확증'의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니 여기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홍길동전》, 허균이 지었다, 타카하시 토오루가 처음 지적
이식의 『택당집』을 근거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고 말한 최초의 학자는 경성제대 교수였던 타카하시 토오루(高橋 亨)였다(1927년)고 한다. 1930년에 김태준이 동아일보에 '조선소설사'를 연재하는 와중에 이를 언급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타카하시 밑에서 공부한 바 있음. 사제지간)
동아일보에 실린 연재물에 최초로 《홍길동전》이 언급된 것은 '조선소설사'의 목차가 나온 30년 10월 31일자 기사이다. 15장 제목이 '홍길동전과 허균의 예술'로 제시되었다. '홍길동전'이 허균이 지은 것이라는 명시적 표현이 등장한 것은 30년 12월 3일자 '조선소설사(17)-임란후에 배태한 신사조와 신문예(속)'이란 제하의 기사에서였다.
허균의 「홍길동전」(1569-1618, 광해조) 등은 작자의 생세(生世)로써 그 저작연대를 어느 정도까지 규정할 수 있으며...
그리고 본격적으로 '홍길동전과 허균의 예술'을 다루는 기사는 12월 4일부터 6일까지 이어졌다. 동아일보 원문을 사진으로 보고자 했는데, 유료서비스라 포기하고 관련 내용을 일본어 버전으로 실은 '조선통신'의 소화 5년(1930) 12월 12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통신'에 연재된 '조선소설사' 중 《홍길동전》 허균作이라는 근거를 밝히는 내용 |
신문에 연재한 원고를 묶어 1933년에 간행한 《조선소설사》에서 해당 항목은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傳하는말에 許均이가 水滸傳을百讀하고서 洪吉童傳을지엿다고한다. 「許均作洪吉童傳, 以擬水滸」(澤堂雜著)(松泉筆譚)라는文句로써 洪吉童傳의 著者가 許均임을알엇다.
여기에서 '홍길동'의 '동' 글자를 다르게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택당집에는 '同'으로 쓰여 있는데, 김태준은 '童'으로 쓰고 있다. 그가 택당집을 읽지 않았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현대에 익숙한 표현으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할까?
어쨌든 그 이전(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 대해서 기록한 외국인들은 그 소설의 작자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타카하시 토오루 이후에야 비로소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이식의 『택당집』 기록이 거짓이 아니라면, 하나의 타협점이 제시 될 수 있다. 그것이 앞서 말한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한문본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한문본 《홍길동전》?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록의 빈약성과 그것이 긴 시간 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허균이 홍길동에 대한 傳(한문본)을 지었지만,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설을 제시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자들은 비범한 인물들에 대해서 傳을 짓곤 했다. 그것은 '소설'은 아니고, 역사적 기록에 근거해서 서술자의 주제의식에 맞춰서 적당한 허구적 서술을 포함한 과거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일종의 과장된 '전기').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도적떼의 우두머리였다(15세기 후반에 활동). 허균은 생몰 연대가 1569년 ~ 1618년이다. 홍길동에 대한 기억이 아직 말로 전해질 때, 사서의 기록에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을 때' 허균이 활동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홍길동전》 한글본(언문본)과 한문본
학계에서는 허균이 언문으로 소설을 지었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홍길동전》에 부여된 타이틀은 반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한문본은 한글본의 한역본이라는 설명이 제기된 바 있다. 허균이 썼다면 한문으로 썼을 것인데, 그것은 지금 우리 손에 없는 상황이고, 저 한역본인 한문본과는 다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원본이 무엇인지는 우리도 모르고 당시 사람들도 몰랐을 것이다. 지금 연구자들은 언문 목판본이나 필사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표현 방식, 조어의 시대적 맥락, 줄거리의 수준 등을 고려해서 검토하였는데, 무엇이 더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인지는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 같다.
정규복은 다음과 같이 도식을 그린 바 있다(1991).
정규복, 「洪吉童傳 텍스트의 문제」, 『정신문화연구』 14권 3호, 1991, 161쪽. |
반면 이윤석(개그맨x, 연대 국문과 교수)은 위 그림에서 '국한문본'으로 되어 있는 필사본을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연대 국문과 고전문학 교수 소개란에서 |
어쨌든 지금 우리 손에 있는 《홍길동전》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18세기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한다.
[허균의 '홍길동'에 관한 傳] → (전하여지지 않다가) → [18,9세기에 '한글소설' 《홍길동전》이 등장] → [여러 이본 형태로 확산]
대충 이런 구도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홍길동전》은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가 정답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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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홍길동
왕조실록에 이 도적을 잡아 처리한 일이 다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어떤 일을 했는지, 집안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지배층과 결탁한 도적이었다는 것만 명확히 드러난다.
의금부의 위관(委官) 한치형(韓致亨)이 아뢰기를, "강도 홍길동(洪吉同)이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들과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하여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리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9권, 연산 6년(1500년) 12월 29일 (기유) 기사
아버지가 무관을 지낸 홍상직, 형이 호조 참판까지 오른 바 있는 홍일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사실이라고 보면 홍길동이 잡혀서 추국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70대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믿기 힘들다. 홍상직이 조부나 증조부라면 얼추 연령이 맞을지 모르겠다. '홍'씨라는 이유로 가탁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듯 싶다.
소설, 전설, 이야기
사람들은 '사실'만을 전하지 않는다. 듣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만들어서 전하곤 한다. 증거가 명확하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이야기'는 원본이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다. 누가 지었는지 모를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어떠한 내러티브를 선호했는지를 살피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호의 의미를 묻게 하고, 더 나아가 그 선호에 어떤 '일반성'을 읽어낼 수 있는지를 묻게 한다.
전 세계적으로 '의적'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에 기초한 것도 있지만 허구적인 것도 제법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의적'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뭐가 있을까? 아마 이 물음을 조선사회에서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는 《홍길동전》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정규복, 「홍길동전 한문본의 텍스트 문제」, 『동방학지』 68권, 1990, 273-307.
이강욱, 「<홍길동전>의 제문제와 그 해결」, 『韓國古典小說論』, 서울 : 새문社, 1990, 156-175.
정규복, 「洪吉童傳 텍스트의 문제」, 『정신문화연구』14권 3호, 1991, 127-161.
이복규, 「〈홍길동전〉 작자 논의의 연구사적 검토」, 『서경대 논문집』 20권, 1992, 9-24.
이윤석, 『홍길동전 연구: 서지와 해석』, 대구: 계명대출판부, 1997.
이윤석, 「홍길동전 작자 논의의 계보」, 『열상고전연구』 36집, 2012, 381-414.
에릭 홉스봄, 『밴디트: 의적의 역사』, 서울: 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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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블로그에 '홍길동전'에 대해 쓴 글은 2015년 6월 14일에 쓰였다. 여기에 쓴 글은 그 글을 토대로 다소 내용을 조금 보충하였다. 30%정도는 분량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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