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네팔 지진 고아로 알려진 사진 속 주인공이 베트남 아이들이었던 반전│오귀인 사례 (2)

이 글은 2015년 5월 8일에 작성된 글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 ∞∞∞∞∞∞ ――

얼마전 BBC기사에서 봤던 사진, 처음에 봤을 때 네팔 지진 피해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해당 기사("Haunting 'Nepal quake victims' photo from Vietnam")를 보면, 이 아이들 사진은 Na-Son이라는 베트남의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한 마을에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Na-Son은 그의 트위터에 이렇게 밝혔다.

이것은 Ha Giang 지방에서 2007년에 촬영된 베트남의 Hmong족 아이 둘에 관한 내 사진이지, 네팔에 관한 게 아닙니다.


오해, 유언비어, 사람들의 몰상식?

사람들의 '오해'로 해괴한 헤프닝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위 BBC기사를 보면 이 사진이 2011년에 발생한 '시리아 내전' 때도 '시리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로 유행했던 전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의 아이들은 고아들이 아니었다. 사진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먼 곳으로 부모는 일을 나가 있었고, 아이들은 집 앞에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사진작가)이 다가오니 여자 아이가 무서워하며 오빠에게 안긴 것이고, 큰 아이도 약간의 불안을 보이면서 동생을 안고 있는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말했다시피 이 사진을 시리아 내전의 전쟁고아, 네팔 지진 고아의 모습으로 유통시켰다. 악의적으로 이 사진을 이용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여러 사람들이 부화뇌동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인간 본성적 차원의 기제가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왜?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었기에.

 

이거 어디서 본적 있어

예전에 영화 <코치 카터>의 명대사, "Our deepest fear"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Coach Carter(2005) - 명대사, "Our deepest fear"와 그에 얽힌 이야기"*). 저 대사의 출처를 사람들이 넬슨 만델라의 연설이라고 여기고 있는 '현상'을 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고, 그게 '그림'이 참 잘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 정도를 제시했었다.

* 이 블로그에 'Our deepest fear' speech와 넬슨 만델라│오귀인 사례 (1)'라는 제목으로 수정 후 게재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러한 기억의 출처 오류(source confusion)는 인간사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개인의 기억 차원에서도 우리는 어떤 사건을 전혀 다른 사건과 연결지어 기억했던 적이 있었음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집단의 수준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무언가 기억되기 위해서는 단순화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일종의 '기억의 최적화'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잘 기억될 수 있는 형태로의 변형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럼 이번 "베트남에서 찍힌 네팔 지지 고아" 사진도 이러한 '변형'의 결과물일까?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그 변형의 지향성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진 피해로 부모를 잃은 아이, 이런 관념에 잘 부합하는 이미지라는 면에서 저 사진의 "재활용"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시, 그림 등)이 다른 작가의 이미지에 잘 부합한다고 해서 그 작품과 작가를 연결시킨 그런 예도 존재한다. 

최근에 내가 확인한 것에는 사육신에게 돌려진 그들의 시가 중에 일부 저작자가 다른 사람인 경우가 존재한다고 한다(신성환, 〈사육신(死六臣) 담론의 전변(轉變)과 조선후기 시가(詩歌)의 수용 양상〉). 

그런 식으로 의심되는 것 중의 하나가 <하여가>와 <단심가>이기도 하다(이건 설왕설래가 있어, 아직 확신을 못하겠다. 참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죽지 않았다?"*). 아마 이러한 예는 이런 경우 외에도 무궁무진하게 많을 것이다.

* 추후 이 블로그에 업데이트 예정.

이러한 관념 혹은 기억 이미지는 그 내적인 기본 논리 메커니즘에 맞게 재편될 때, 잘 기억될 뿐 아니라 잘 확산될 수 있는 것 같다(가령 '늠름하고 용감한 남자'/'가녀린 아리따운 남자' 중 우리의 연상에 자연스러운 것은?*). 연상작용을 통해서 그 관념/기억 이미지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기억과 기억의 확산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 꼭 친숙한 것이 잘 기억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너무 익숙한 것은 지루하고 그래서 외면받기 쉬운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 내용에서 주목한 것은 '익숙한 것이 기억하기 쉽다'는 게 아니라 '기억되는 것은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변형되어 간다'는 것이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자의 것으로 생각할지 몰라 덧붙여 본다.

모두 익숙한 데 한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는 경우가 더 잘 기억될 수 있다고 한다(반직관성counter-intuitiveness). 너무 낯선 것은 무시되고 잊혀지기에. 딱 적당한 '차이'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잘 기억된다는 이야기.

이 기억의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소문'의 영역이다. 유언비어, '그럴듯한 풍문'일 때라야 그 확산성이 높은 법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말에 어떤 이들이 '아니 땠어도 연기가 나더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경우를 보면, 어떤 사태나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투사하게 되는 감정이나 이미지, 그것으로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들러 붙은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인지구조 탓 아닐까?

기억, 소문 등에서 사건, 이미지, 이야기 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러한 변형이 쉽게 목격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결국 인간의 기본적 인지 구조 혹은 인지 작용의 '부산물'일 개연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왜 베트남 아이들이 시리아 내전의 전쟁고아, 네팔의 지진 고아로 회자되었는가에 대해 위 설명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

[사족1 - 이 사건에 대해서는 며칠 전에 트윗을 한 바가 있었고, 그것을 글로 만든 것이다.]


[사족2 - 최근 어떤 종편에서 '세월호 폭력 시위' 사진이라고 내 놓은 것이 2003년과 2008년 '시위대 전경 폭행 사진'이었다. 이것으로 '폭력시위' 규정하려고 한 일이었다. 

위의 '설명'이 이런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거의 범죄적 공작이자 선동이다. 이런 데이터들이 훗날 일부 사람들의 시위에 대한 기억을 전형화시킬 수 있고, 그런 과정에서 인지적 메커니즘이 어떠 어떠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위의 논의와 관련해서 '설명'해 볼 수 있는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악의적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정신병', 스캡틱, 박한선

※ 이 글은 ' 얼룩소 '에 2023년 1월 28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본래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이 글은 Skeptic Korea의 " 정신의학의 오래된 과제, 과학적 치료와 처방 "에 관한 얼룩소글의 출처를 체크하고, 정신질환 치료의 현실에 대해 박한선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정래해 본 글입니다. ─── ∞∞∞ ─── 최근에 나온 글인 줄 알고 찾아봤더니 전에 나온 글이군요. 마침 어제(1/27) 정신과 의사 출신 인류학자 박한선 선생님을 통해서 관련 이야기를 듣고, 글쓴이부터 찾아 봤습니다. 다른 저자인 걸 보고, 정신의학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박선생님께서 정신병 진단과 치료에 '정신분석학'이 사용되고 있다고 하셔서 좀 어리둥절 했었습니다. 심리학계(실험심리가 중심이 된)에서는 배우지 않게 된 분야로 알고 있어서 의학 분야에서도 당연히 퇴출되었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왜 인지 모르지만, 효과가 있다'는 면에서 정신과 치료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 '정신분석학'도 프로이트, 융 시절의 버전이 아니라 많이 업데이트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부분은 과문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제 박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도 떠올라 흥미롭게 이 스켑틱의 글을 읽다가 문득 출처가 궁금해서 찾아 보니, '한국 스켑틱'에는 14권(2018년)에 "정신의학은 과학이 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글로 실려있었습니다. (스켑틱에서 얼룩소에 올리는 글이 최근호에 실린 글이 아니라는 걸 이제사 깨달은 거죠) https://www.badabooks.co.kr/SKEPTIC_magazine/?idx=54 글은 14권의 68~83쪽에 실렸습니다. 이 글을 일부 발췌해서 재편집한 것이 위의 얼룩소에 실린 글이더군요.

ChatGPT에 '크리스마스와 동지'의 관계를 물어 보았다.

요즘 핫하다는 '챗GPT'에 크리스마스와 동지의 관계를 물어보았다. https://openai.com/ 나: 크리스마스가 동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니? 챗봇: 크리스마스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축제일이며 종종 북반구에서 1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동지와 관련이 있다. 동지는 보통 12월 21일 또는 22일 경에 발생하며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하는 것, 즉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을 표시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원래 기독교 이전의 동지 축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종종 태양의 재생과 낮이 더 길어지는 시기의 복귀와 관련이 있다. 고대 로마인과 고대 켈트족을 포함한 많은 고대 문화에는 동지와 태양의 귀환을 중심으로 한 전통과 축제가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및 종교적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동지가 축제일의 기원에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크리스마스는 광범위한 종교적, 문화적 전통과 연관되어 현재 전 세계의 다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기념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와 동지의 관계에 대해서 비교적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지 축제와 관련성을 '논증'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정보(동지 축제와 관련되지만 현재는 역사/문화/종교적 설명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거나 복잡하게 변화했다)는 대체로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인지진화적 설명은 관련 문서가 부족하기 때문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디테일이 부족한 것도 한계라 할 수 있겠지만, 간단한 답변으로서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챗GPT가 3문단으로 설명하는 것을 나는 A4 몇 페이지로 설명했던가. 대학 등에서 학생들에게 과제나 시험문제를 내줄 때 이제 안일하게 내면 AI가 답을 써주는 시대가 되어버린 듯하다. ─── ∞∞∞

절기, 시간의 마디와 의례 본능

‘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라는 타이틀의 시리즈물의 마지막 글이다. 이전 글까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크리스마스’가 동지라는 ‘시간의 마디’에 이루어지는 의례였고, 지금도 그 특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물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시간의 마디에서 인간은 왜 의례 행동을 하는가'가 될 것이다. 동지 축제의 주요 요소라고 할 만한 것들이 ‘주술-종교적 목적의 행동’이라는 점을 지난 글( 핼러윈, 크리스마스, 만우절의 공통점 )에서 언급했다. 팥죽과 주술-종교적 위험 회피 우리의 동지 축제 때 관습으로 ‘팥죽 먹기’가 있는데, 그것도 동지 축제에서 많이 보는 주술-종교적 행동이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보자.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다. ...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의 일종이다.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로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것이다. 이런 동기는 이 풍습이 관습화되면서 많이 약화되고 새해에 떡국을 먹는 것처럼 ‘한 살을 먹는다’는 의미 정도로 축소되었다. 세계 도처의 ‘동지 축제 풍습’, 또 신년 의례를 보면 시간이 변하는 시점에 귀신이나 악령이 출몰하고 이들로부터 인간이 액, 살과 같은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관념이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한 모종의 행동(의례)을 수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시간의 ‘경계’만큼이나 공간의 ‘경계’에서도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은 활발히 작동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석단이다. 영어권에서는 cair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할 때 사람들은 민감하게 초자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