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문제 제기 실패기 (뒤에 절반의 성공기 덧붙임)
성희롱 발언이 있었던 뒤풀이 자리 주관 학술단체에 가해자의 공식 사과와 단체 내 징계조치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과 그 결과의 공표를 재차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역시나였다.
1. 2차 술자리는 공식 행사 아님 2. 성희롱 발언은 개인 발언, 개인 간 해결할 문제, 당 학술단체와 무관한 사안 3. 성희롱 발언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쪽 말만 듣고 어떤 공식적 조치를 할 수 없음 4. 가해자는 당 학술단체에서 이익 얻는 자리에 있지 않음, 징계 무의미함 5. 가해자는 위계에 의한 압력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음 6. 당시에 문제 제기 했는지 안 했는지 궁금(안 했는데, 왜 이제사?) |
골자는 해당 술자리는 본 학술단체의 공식 행사가 아니고 문제의 발언은 한 개인의 발언이고 본 학술단체와는 관련이 없다. 본 학술단체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말고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라는 것이다.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성희롱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정리해 놓은 것이 있는데, 위의 문제 인식과 대처와 관계있는 내용을 옮겨 본다.
Q : 성희롱을 당했을 때 거부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면, 성희롱으로 문제삼을 수 없다?
A : 일단 성희롱이라고 여겨지면, 가급적 그 자리에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하고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러나 성희롱이 발생한 관계의 조건이나 상황 맥락에 따라서 피해자가 즉각적인 거부나 항의를 표시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발적인 동의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못한 경우에도 피해자는 성희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Q: 공식적인 일과 관련된 장소에서 업무 시간에 발생한 일만 성희롱이다?
A : 그렇지 않습니다. 성희롱은 회식 자리, 실습 여행, M.T와 같은 곳에서 일어나기 쉽습니다. 단체에 소속된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약속이나 만남의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그것은 공적인 관계에 영향을 주며 교육, 업무,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합니다.
Q: 성희롱은 사적인 문제이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마땅하다?
A : 성희롱을 개인들의 사생활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희롱은 권력의 불평등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집단적 현상으로, 여성을 오로지 성적인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차별적인 성문화가 중요한 배경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성희롱을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예방과 대처에 협조하며 평등한 성문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즘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이 의무화되어 이런 내용은 '상식'이 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학회 뒤풀이는 직장 내 회식에 대응되니 학회 주관기관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상식이 잘못된 것인가 보다.
학술단체는 아직 관련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양식과 양심을 순진하게 믿었는지도.
게다가 선배님들인데.. 아니 어쩌면 개념 없는 후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적인 사과를 받기 위해서 가해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옵션이 남아 있는 것인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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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문제 제기, 절반의 성공기
'성희롱 문제 제기 실패기'를 쓰다가 전에 오간 메일 내용을 참고하려 메일함을 들여다 보고 있던 차에 해당 학술단체에서 새로운 메일을 보내왔다.
해당 메일이 오기 전에 내가 보냈던 메일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성희롱의 구체적 발언은 000입니다. 2. 이 사안에 대한 당 학술단체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3. 근거는 '성희롱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참고해 주세요. 4. '앞으로 이런 사건 재발 않도록 신경쓰겠다'는 발언 잘 지켜주세요. 5. 통상 뒤풀이 자리에서 성희롱 발언 난무합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사람이 많다는 점 잘 헤아려 주세요. 6. 이 건으로 다시 메일 드리지 않겠습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략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그 동안 고생 많았고, 미안했다. 본 학술단체는 다음과 같이 대처하기로 했다. 가해자에게 1차 경고, 재차 성희롱 하면 제명하기로 함. 이 건에 준해서 성희롱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음. |
오... 내가 요구한 바 100%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생각한다. 부디 번복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어쨌든 그래서 '절반의 성공기'가 되었다. not bad ending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늦었지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전향적인 결정을 내린 해당 학술단체 선생님들께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문제가 잘 풀릴 거라 낙관하지 않고 시작한 문제 제기였지만, 그 과정에서 아쉬움과 답답함, 그리고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학계에서 그동안 봐 왔던 행태가 반복되는 듯해서 더욱 그랬다.
무슨 이유에서 갑자기 입장이 달라졌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정한 입장, 게다가 학술단체라는 조직의 논리로 보면, 그것을 바꾼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을 터였을 테다. 사실 종교학계에서 내가 아는 한은 그런 전례를 보지 못했다. 그것이 그 조직 안에서 벌어진 '추문'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종교학계에 양식과 양심이 어느 정도는 확인된 듯해 다행이라는 마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김칫국을 들이키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명예롭고 떳떳하며 피해자가 존중받는 문제 해결의 길이 마련될 수 있으리란 기대를 접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도감도 느껴졌다.
앞으로 이 '절반의 성공기'를 토대로 많은 동학들이 최소한 '성희롱에서 자유로운' 공부인, 연구자의 생활이 가능할 수 있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이 정도 수준에서 무모해 보였던 성희롱 문제 제기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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