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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때문에' 말이 바뀌고 있다?!

'인터넷 신조어'는 '언어파괴'로 규정되곤 한다.  출처: 알바콜 신조어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한글 파괴'와 '세대차이'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불편한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대체로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소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분위기가 다르다. 출처: 시민의 소리, 청소년 대상 조사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언어 습관이 정상이 될 날이 오리라는 걸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 사용 습관과 새로운 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이런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본 〈인터넷 때문에〉라는 책은 이런 시각으로 인터넷 환경에서 우리의 언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본다.   '스낵 지식서'는 아니니 쉽게 읽을 수 있을거라 기대는 말라 그레츤 맥컬릭(Gretchen McCulloch) * 의 〈인터넷 때문에〉의 원제도 놀랍게도 'Because Internet'이다. 제목을 직역한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놀라운 시도다. 왜냐면 책 제목이 입에 착 달라붙지 않기 때문이다. 부제는 원래의 부제와 다르게 갔다. 원래는 'Understanding the New Rule of Language'(언어의 새로운 규칙에 대한 이해)이다. 상당히 학술적 느낌이 강한 부제다. * 자신의 홈피 에 발음기호를 /ɡɹɛtʃn̩ məkʌlɪk/이라고 적어 놓았다. 다만 부르는 사람이 익숙한 발음대로 불러도 자긴 상관없다고 밝히고 있다. 영어권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경우가 흔치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이름 발음과 표기에 오해가 얼마나 많은지 자기 성(last name) 발음에 대해서 설명을 길게 해 놓고 있다( 참고 ). 책에서도 관련 언급을 볼 수 있다(74쪽). 번역서에는 '그레천 맥컬러'로 옮겼는데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발음으로 보인다. 한국어 부제는

'나는 옳은 일을 능히 하고 그른 일은 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

예전에 고전번역원 메일링 서비스로 우연히 보게 된 내용이다. 허목의 문집 《기언(記言)》에 실린 '어시재기(於是齋記)'라는 제목의 글이다. '於是齋記' 원문(클릭하면 고전DB로) 허목이 척주(陟州, 지금의 삼척 지역)의 부사로 재직할 때 전임 부사 임후에게 편지가 와 자신이 집을 하나 지어 '어시재(於是齋)'라 이름하였는데 허목이 기문과 편액을 적어 보내주면 좋겠다고 편지를 써 보냈다. 이에 허목이 임후에게 '어시재'라는 이름 내력을 알려달라 편지를 보냈다. 임후의 답장에는 아버지 묘 근처에 지은 집으로 여생을 보낼 곳이라 하며 이름의 내력이 되는 말을 이렇게 적었다. 아! 세상 사람들이 그른 것을 옳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문란한 일입니다. 누구나 다 ‘나는 옳은 일을 능히 하고 그른 일을 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꼼꼼히 살펴보면 옳은 것은 적고 그른 것은 많으니, 저는 이것을 두렵게 생각합니다. 噫, 世之是非非是, 亂矣。人之言莫不曰吾能於是, 而不願於非。然考之行事, 則於是者寡, 於非者蓋衆也。僕乃大懼也。 허목(許穆), 〈어시재기(於是齋記)〉, 《기언(記言)》 (고전DB 디렉토리: 기언 > 기언 별집 제9권 > 기(記) > 어시재기(於是齋記)) '나는 옳은 일에 능하다(吾能於是)', '옳은 것이 적다(於是者寡)'에서 '옳은 일에'(於是)라는 말을 따서 집의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허목이 이 말을 보고 감탄하며 '기록할 만하다'하고 '기(記)'를 지었다. 경계할지어다 / 戒之哉 옳고 그름이여 / 有是非 옳은 것과 그른 것은 / 有是非 명철한 사람이면 가려낼 수 있다네 / 明者擇之 옳은 데 처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 處是非難 확고하게 지키기가 어려운 법이라네 / 確於是爲難 강한 자라야 능히 할 수 있나니 / 剛者得之 경계하고 경계할진저 / 戒之哉 사실 이런 관찰은 흔하기는 하다. 그

《홍길동전》을 둘러싼 논란│허균이 지은 게 아니다? 최초의 한글소설이 아니다?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2018년 한글날 즈음 방영된 정재환 교수의 강연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 어쩌다 어른 2018년 '한글날 특집 방송'의 한 장면 576돌 한글날을 맞아 '홍길동전'이 다시 호명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논란이 국문학계에서 꽤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별로 확산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다. 아니면 관련 연구가 인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의적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국문학계의 관련 논의를 접하고 과거 블로그에서 글을 썼던 게 있다. 그것을 조금 수정하여 실어 놓는다. ━━━━━━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홍길동전》 허균 작자설, 아니 설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이 이야기는 의외로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최초의 기록 1674년 간행된 이식의 『택당집』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거의 유일한 근거라고 한다.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15, 「산록(散錄)」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다.] 번역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이 언급을 하는 맥락을 보면 '위조된 책'이나 '이설의 횡행'을 비판하면서 그 일례로 '수호지'를 언급하고, 그와 유사하게 지어진 '홍길동전'을 이야기한 것이다. 허균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홍길동전' 같은 '이설'을 떠드니 반란 혐의로 사형 당한 것이 어찌 그 응보가 아닐까 하고 말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이 언급된 그 단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