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6.5)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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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나 미신은 비합리적인 사고의 산물로 여겨졌습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학자들이 이성의 승리와 맹신의 퇴조를 예상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막스 베버라는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운명은 합리화와 지성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의 탈마법화’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명확하게 궁극적이고 숭고한 가치는 공공 생활에서 신비로운 삶의 초월적 영역이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인간관계의 형제애로 후퇴했다.
-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Science as a Vocation)』
비합리적인 맹신의 세계(종교)는 그렇게 힘을 잃어버렸을까요? 20세기에서 21세기를 통해서 그러한 예상은 국지적, 한시적으로는 참이었지만, 인류 전체로 볼 때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보였습니다. 오히려 종교사회학자들은 '세계의 재마법화' 혹은 '재성화'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고, 세계적으로 볼 때 종교 인구는 그렇게 감소하지도 않았습니다.
2015년 Pew Research Center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약 84%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2050년까지 종교 인구의 변화를 추정한 바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세계 인구 증가와 함께 기독교(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등)와 이슬람교 인구가 증가하는데, 특히 이슬람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서 2050년에는 세계 인구에서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의 비율이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무종교인(unaffiliated)'은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쳐서 전체 비율상으로는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한국은 반면에 현재 종교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가 아닐까 싶은 사회조사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한국갤럽, 2021).
2021년 결과는 코로나19 유행기라는 특성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종교 활동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더 고려해 볼 것은 '종교' 개념에 대한 한국인의 독특한 이해 방식인데, 다소 복잡한 내용이니 다른 글에서 풀어내 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분명 원시적인 믿음(태양신, 바람신, 나무신 등등)에서 도덕적인 신으로, 철학적 지식으로, 그리고 궁극에는 과학적 지식으로 세상에 대한 더 합리적인 이론을 만들어 내고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50년 종교 인구 예측 자료만 보아도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종교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얻지는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
신학/종교>형이상학>과학(오귀스트 꽁트)으로의 발전은 사회적 지식의 권위 변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프면 무당을 찾아가 굿을 했던 시대에서 이제 인간 몸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지닌 의료인을 찾아가는 시대로 변화했습니다. 분명 몇몇 영역들에서 종교의 역할은 사라지고 새로운 과학 기술이 이를 대체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상황도 펼쳐집니다.
21세기에도 가장 원초적 의례라고 할 수 있는 '기우제'가 이루어집니다. 그것도 세계 도처에서 말입니다. 서구 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주지사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물론 빈축을 사긴 했습니다만).
이스라엘에서는 최근 극심한 가뭄에 시달릴 때, 통곡의 벽에서 비를 비는 기도 의식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몇 년 전 대만에서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이런 기사가 나온 바 있습니다.
유일신교 전통에서는 신이 비를 내릴 능력이 있다고 믿겠습니다만, 애플이나 테슬라가 대만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며 '하늘의 신이 비를 내릴 수 있다'고 믿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식을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절한 호소'는 그 외에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주목됩니다. 종교적 의례는 자포자기하지 않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할 때 힘을 얻습니다. '정신승리'를 하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좌절적이라는 걸 말해 줍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과 종교적 경향성의 관계
스피노자는 인간의 '미신' 의존 경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모든 환경을 통제 할 수 있거나 지속적으로 행운이 따라준다면 인간은 결코 미신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스피노자, 『신학정치론(A Theologico-Political Treatise)』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이 가정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문장은 그 반대로 이해됩니다.
인간은 결코 주변 환경을 통제하거나 지속적인 행운을 겪지 않기 때문에 미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말은 종교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바로 1인당 GDP와 '종교의 중요도 평가' 사이의 관계 그래프입니다.
위 그래프는 '나의 삶에서 종교는 아주 중요하다'라고 응답한 비율과 국가별 1인당 GDP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1인당 GDP가 높으면 중요하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낮고 1인당 GDP가 낮으면 중요하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cf. 한국은 주요 선진국들과 함께 '종교의 중요도가 낮은 나라'입니다. 2015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IMF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에서는 약 36,600 달러로 나와 있습니다. 참고 반면 구글링을 해 보면 2015년 한국의 1인당 GDP는 약 28,700 달러로 나옵니다)
미국은 '잘 살지만, 종교를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치안과 보건 의료 시장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생존 환경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좀 더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1인당 GDP보다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인지 여부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반면 중국 같은 사회는 '공산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해당 사회에서는 '종교 단체'가 불온 세력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솔직한 의사 표현이 제약되었거나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교육을 통해서 강고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답변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해서, AI가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고,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긴 수명을 누린다고 해도 인류의 행복한 well-being은 정복하기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시험을 보고, 직장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를 하며, 병에 신음하고, 연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불안에 떨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점을 쳐보거나 미신 행동을 하거나 종교 활동을 하는 게 마냥 무지하고 비합리적 행동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내가 겪는 마음의 불안을 다스리려는 '마음 짓'(정신승리)과 '몸짓'(의례적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포자기 한 상태로 무력감에 빠져드는 것보다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초자연적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이 한계 속에서도 계속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의지를 빚어낼 테니 말입니다.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생존 전략의 차원에서 그 나름의 합리성을 이해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한계 상황에 놓이지 않을 때, 종교가 힘을 잃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에도 종교나 미신이 힘을 잃지 않는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한계(생존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종교론도 이와 비슷합니다만, 이건 다음 글에서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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