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6.12)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누구나 이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종교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되는 말입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헤겔 법철학 비판》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의 〈서문〉에서 한 말입니다(“Die Religion ... ist das Opium des Volkes”).
이 표현의 메시지는 통상 이렇게 이해됩니다.
종교는 대중을 환상으로 중독시키기만 할 뿐 어떠한 실질적인 구원도 이루지 못한다.
아편의 비유는 지배집단과 피지배(노동)집단의 구분 하에서 전자가 후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허위의식을 갖게 하는 장치로서의 종교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부분을 앞뒤로 살펴보면, 지금 '아편'이나 '마약'을 떠올리면서 부정적으로만 보는 해석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당 〈서문〉에서 "인민의 아편"이란 표현이 등장한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상의 불행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의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을 상실해버린 현실의 정신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홍영두 옮김, 서울: 아침, 1988, 187-188쪽.
이를 보면 '종교'를 단순하게 '허위의식'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상의 불행은", "불행의 표현"이자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동정적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마르크스 평전》의 저자 프랜시스 윈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소련에서 마르크스의 해석자를 자임하던 사람들 때문에, 그 말은 보통 종교는 사악한 통치자들이 대중을 흐리멍덩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투여하는 마약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좀 더 미묘하고 동정적이다. … 종교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장치다. 그러나 동시에 억압으로부터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 평전》, 정영목 옮김, 서울: 푸른 숲, 2001, 86쪽.
거칠게 바꾸어 말해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현실의 불행에 대한 대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존재 조건에 따르는 종속변수로서 종교를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앞서 글─21세기인데도 종교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에서 보았듯이요).
마르크스는 〈서문〉에서 '인민의 아편'을 말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초기 단계에서 종교가 후광인 저 눈물의 골짜기에 대한 비판이다.
이 말은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서 삶의 불행을 회피하니, 그 문제의 싹을 잘라야 비로소 사람들의 '종교 중독'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세계에서 실현되었던 종교 자체의 거부나 배척은 마르크스의 종교 이해에 대한 비논리적 추종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 해석이라면 인간 존재 조건을 호전시켰을 때, 이러한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 기제는 그 유용성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세계의 종교 정책은 '사회 부조리 해소' 및 복지 증진으로 국한되어야 했던 것이죠. '21세기인데도'에서 봤던 그래프(1인당 GDP와 종교 중요도 자기 평가의 상관관계)처럼, 잘 살게 되면(사회 복지 수준이 높으면) 종교는 삶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사회 복지 정도와 무신론자의 비율 사이에는 정비례 관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편의 비유의 이면, 그 미묘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편은 치료제의 하나로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일부 마약은 치료를 목적으로 허용되고 있기도 하지요. 과도한 고통에 노출된 환자에게 진통제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마약성 진통제: 모르핀, 코데인, 메타돈, 펜타닐 등). 이 비유에 대입해 보면, 마약은 남용의 위험(허위의식의 한계)을 가지고 있지만 ‘억압과 고통의 피난처’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 행동/상상을 하나의 행동 전략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한계 상황에 직면할 때 인간이 일반적으로 상징조작적 대응을 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우리가 '정신승리'라고 말하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생존성을 높이거나 유지시키기 위해 상징계를 이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에 근거한 세속화론의 경우도 이러한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종교의 쇠퇴는 대중에게 부여된 부조리 혹은 억압적 요소가 감소할 때 일어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종교관에 담겨 있는 부조리한 세계의 모습이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의 종교 비판에 근거한 세속화론이 실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조건과 종교의 증감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이렇게 인간 생존 조건의 종속변수 혹은 후행 지표(인자에 영향을 받아 결과가 정해지는)로 본다면, 종교(+교리)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 충돌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도덕 규율로서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인간 행동을 규정하거나 통제하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독립변수나 선행 지표로 보게 합니다. 둘 중 어느 것 하나가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일지, 아니면 각각의 진실이 있는 것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겠지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뤄 보겠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