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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님과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는 상상, 어떻게 봐야 할까?

※이 글은 얼룩소 글(23.7.5)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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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시대의 종교(문화)는 어떻게 바뀔까?

스마트폰이 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이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수단이 되면서 우리 삶의 많은 모습이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종교(문화)에서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 변화의 방향을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예상했습니다. 

가상 체험이 현실 체험을 압도하여 종교 활동도 디지털 기반으로 크게 변모할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디지털 종교' 혹은 '가상공간 속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교 활동도 온라인으로 하게 되면서 가상의 공간에서 종교적 체험을 하는 시대가 펼쳐질 것이고, 현실 세계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이퍼리얼리즘'을 구현하여 새로운 종교 소비 시장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습니다.

그런 변화에 발 맞추어 가상 세계에 종교의 성지를 구축하여 사람들이 사이버 순례를 경험하게 한다든지, 사이버 종교 공간에서 사람들이 종교적 의식을 경험하게 한다든지 하는 서비스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렇게 종교계에서 가상 세계의 종교적 공간이라고 몇몇 사이트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서 성지 순례를 한다거나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측은 인터넷 가상공간에 현실의 종교를 옮겨와 상상한 것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관념론이었던 것이죠. 메타버스도 망해가는 판국인데 사람들이 온라인 상에서 종교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소비할 리가 없지요.
애플의 '비전 프로', 출처: 디일렉(The elec) https://www.thelec.kr/news/articleView.html?idxno=21443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을 경험하게 해 주는 기기를 쓰고서 사람들이 게임과 재밌는 영상, 혹은 자극적인 어떤 활동을 포기하고 종교적 체험을 추구할까요? 콘텐츠 소비 경험의 차이가 선호 콘텐츠 유형을 결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VR/AR/MR에서도 디지털 웹 콘텐츠 소비 패턴은 어느 정도 유지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정적이고 말초적이며 즉각적 쾌락을 제공하는 콘텐츠들이 선호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교 콘텐츠는 외면 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사실 종교의 쇠락은 TV/비디오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그러한 경향은 급속도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종교 서비스 시장은 다른 대중 문화 콘텐츠 시장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렇게 쇠락해 간다고 해도, 사람들의 영성/종교성은 그와 별개로 변화되며 지속되는 게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미디어에 종교를 이식해 놓고 변화를 상상하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 때문에 사람들의 종교적 관념과 행동이 '달라진 부분'에 주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스마트폰과 신(god)
애니 '이세계는 스마트폰과 함께'의 한 장면, '신님'(神樣kami-sama)의 전화
스마트폰이 일상화 된 세상에서 신과 인간이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대화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도 스마트폰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종교적 관념이 변화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적 존재와 인간의 의사소통 방식은 역사상 다양하게 그려져 왔습니다. 신이 동물이나 식물 혹은 인간으로 변신해서 직접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다든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기도'를, 심지어 소리내지 않은 마음 속의 기도마저도 듣는다든지 하는 식입니다.

의사소통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성의표시'로서의 '선물' 주기도 포함됩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의례 행위는 희생제의, 봉헌, 고행, 헌신 등 바치는 물건이나 행위에 따라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어쨌든 신(적 존재)과 인간이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나름의 문법이 존재합니다. 어떻게 해야 인간의 메시지나 봉헌물이 신에게 전달된다든지, 신의 초자연적 가호(축복 등)가 내려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을 만족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신(부처)은 기와에 적힌 이름과 주소를 보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여겨집니다.
기와불사, 주소와 이름 그리고 소원이 적혀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무속의 신도 대체로 이름과 주소를 필요로 합니다. 제 개인적 체험을 "부처님과 신령님의 복도 배달이 되나요?"라는 글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일상화 된 세상에서는 신과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상상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화와 같은 콘텐츠 상의 상상에 불과합니다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제 직접 소원수리를 전달할 수도 있으리란 상상이 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여기에 관통하는 문법은 무엇일까요? 네, 신과 소통하는 방법은 모두 사람들이 현실에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들입니다. 이메일마저도 활용되고 있지요. 초자연적 행위자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추론(사람 같은 행위자로 상정하면 여러 상상을 편하게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상상이 자연스럽습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신이 된 주인공이 기도 메일에 응답하는 장면

스마트폰이 신과 인간의 만남을 더 직접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 사람들이 신과 더 친밀해질 수 있게 되는 걸까요?


  • 도구화 되는 신

신의 가호(종교적 서비스)가 편리하게 접근 가능할수록 그 값어치는 떨어지게 됩니다. 경제학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적 유익은 실체가 있다기보다는 상상된 어떤 근사한 것이기에 구체화 되면 될수록, 우리의 일상에 밀접해지면 밀접해질수록 더 이상 대단한 의미가 아닌 '도구'가 되고, '비인격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신이 점점 더 편리하게 접근 가능해지면, 신은 편리한 도구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책과 글이 있습니다.
iGen 영어 책표지와 한국어 번역본 책표지
진 트웬지의 『i세대』라는 책입니다. 청소년기에 스마트폰을 들고 성장한 사람들이 보이는 여러가지 특징적 행태를 추적하는 내용입니다.

스마트폰 세대는 사람들과 직접 상호 작용을 회피하고, 간접적 상호 작용을 선호하며, 더 우울해 한다고 합니다. 종교 활동에서도 뭔가 색다른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종교 문제에 별 관심이 없지만, 종교 활동을 하는 10대들 사이에서 독특한 신 관념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신입니다. 이러한 신 관념을 '도덕적 치유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ism)이라고 말합니다.

도덕적 치유 이신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행복을 중요시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기분을 강조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신이 필요할 때가 아니면 신은 개인의 인생에 특별히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번역본, 226쪽)

그런데 보통의 신 개념(통상 '지역신'local god으로 불린다)이 사실 그런 모습입니다. 무속의 신, 불교의 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유일신 개념을 예외적으로 생각하니 젊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신 개념을 그렇게 어려운 말로 표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글은 "How smartphones and social media are changing Christianity(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기독교를 바꾸는 방식)"라는 제목의 BBC 기사입니다.
BBC 기사. 스마트폰이 기독교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다룬다.

이 글에서도 '도덕적 치유 이신론'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더 개인화된 종교 경험을 추구하고, 덜 친밀한 신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종교학계에서는 익숙한 '먼 신' 개념deus otiosus). 아울러 '종교 밈'의 효과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농담으로 시작했지만 종교적 논쟁을 확산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 종교적 경건함을 저해하는 스마트폰

종교인들은 이런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디지털 원주민으로 커가는 아이들에게 진지한 혹은 경건한 신앙을 갖게 해 줄 수 있을까 하고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일부 사제들이 여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스마트폰 세대의 종교적 고행에는 '핸드폰 금욕'이 포함되고 있습니다(참고: ""스마트폰 사용 줄이자"…종교계 '디지털 금식'"[연합뉴스 기사]). 기독교계의 표현은 '디지털 금식'입니다.

핸드폰 사용도 먹는 것에 빗댄 것인지, 금욕 수행의 대표 행동이 '금식'이라서 저런 표현이 선택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위 연합뉴스 기사에 나온 '디지털 금식 서약서'

이런 '심증'을 뒷받침해 주는 연구 결과도 나온 것 같습니다. Journal of Religion and Health(2019, 58: 1272-1285)에 실린 "Christian Spirituality and Smartphone Addiction in Adolescents(청소년의 기독교 영성과 스마트폰 중독)"입니다(이 연구자의 박사학위 논문은 "기독 청소년의 스마트폰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기독교 영성의 역동성").

논문에서 저자는 "스마트폰 중독 청소년 그룹에 대한 고위험군은 잠재적 위험군 및 대조군에 비해 낮은 수준의 영적 웰빙과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나타냈다"고 주장합니다. 고위험군 11명, 잠재 위험군 20명, 일반 대조군 254명으로 설계된 조사이고, 조사결과도 일관되게 '고위험군<잠재<일반'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됩니다만.


  • 새로운(?) 종교성의 출현

기성 종교 활동이나 경험 수준의 '저하'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위에서 본 '도덕적 치유 이신론' 성향은 전문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이겠지만, 그 자체로 의미있는 변화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활동의 실상은 교리의 외피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인간의 진화된 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직관적 추론에 근접한 관념과 행동이 주를 이룹니다. 앞서 본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 방식의 예처럼.

교리 종교에서 그것은 종종 이단이나 미신, 오해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종교서비스는 신과의 거래 감각, 친밀감, 가호 얻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 활동은 대부분이 일종의 방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불안, 위험, 시련 등을 막아줄 수 있는 든든한 방패를 만드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퍼 파워를 지닌 신을 부르는 가장 근원적 동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일신을 믿든, 사유의 힘으로 연기의 굴레를 초탈하는 것을 지향하든, 어느 종교의 현장에서나 우리가 볼 수 있는 종교활동은 '-해주세요'라는 호소입니다.

'새롭다'고 묘사될 수도 있겠지만, 과거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원초적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굳이 새로운 것을 말하자면 종교 교리(혹은 기성 종교)의 권위가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걸 '세속화'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자연종교로의 회귀'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 덧〉

기성 종교의 권위가 상실되는 경향이 항구적일지는 속단하기 이릅니다. 세속화론이 탈세속화론으로 뒤집히기도 했다는 걸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 트웬지의 TEDx 강연 영상이 유튭에 있습니다(대부분의 TEDx 강연이 그렇듯이 한글자막은 없습니다). 결론은 '야, 스마트폰 끄고 사랑하는 사람과 직접 얼굴 맞대고 시간 보내'라는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A8kZZS_bzc
종교계의 해법('금식')과 겹쳐집니다. 스마트폰에서 현대인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이런 뻔한 답이 사람들을 구원해 주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종교적 서비스로서는 주목 받을 만합니다. 자유의지에 맡기는 게 아니라 핸폰도 되지 않는 곳에서 명상을 하든가 하는 종교 활동이 어필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미 성행 중입니다.
한 힐링센터를 소개하는 한국일보 기사

과거 한석규가 나왔던 광고가 생각납니다.
한석규 출연 SK텔레콤 스피드011 CF의 한 장면(재편집)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을 꺼야 한다 ... 전통적 종교
스마트폰을 통해서 신과 만날 수 있다 ... 뉴미디어적 종교
이런 대비를 그릴 수 있을까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인간의 종교적 관념과 행동은 또 어떻게 변해 갈까요? 흥미로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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