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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없는 '차가운 종교학', Science of Religion을 생각하며

※이 글은 얼룩소 글(23.7.13)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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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는 주제를 다루려면 '위로'가 필요하다?

이 말을 저는 곳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정재승 박사가 총괄자문 및 프리젠터로 참여한 다큐 시리즈 '뇌로 보는 인간'의 마지막 '종교' 편에 제가 자문으로 참여하여 아주 짧은 시간 출연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시청률이 높았던 편이 아니라서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우연히 EBS 다큐를 보던 친구가 '야, 너 나왔더라...잠깐 ㅎㅎ', 이런 반응을 보인 예가 있었을 뿐입니다. 함께 자문에 참여한 구형찬 박사(인지종교학)가 종교학자로서는 메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뇌로 보는 인간' - 종교 편의 한 장면┃저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그때 나왔던 미디어 비평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스 기사 캡쳐

해당 다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다음에 이런 논평을 내 놓았습니다.


미디어스 관련 기사


'위로가 없다'는 비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종교라는 주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종교의 본질', '참된 의미' 같은 것을 발견하고, 뭔가 진리의 말씀이나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종교학도 존재합니다. '현대인의 종교는 병들었다'는 진단을 내리며 '고대인의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거나 모든 종교에 담겨있는 가장 고귀한 가르침(가령 황금률 같은)은 모두 상통하고 그것이 인간이 향유해야 할 소박하지만 분명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예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출처: Wikimedia Commons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 뮐러는 '종교학으로의 초대(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라는 책에서 이 과학(비교언어학적 종교 연구)이 밝혀낼 진실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옛날의 귀금속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종교는 여러 시대의 녹이 지워진 후에는 그것의 순도와 광채를 드러낼 것이다. 그것이 드러내는 형상은 아버지의, 즉 지상에 있는 모든 민족의 아버지의 형상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그 표제를 읽을 수 있을 때, 그것은 유대의 언어에서 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인종의 언어에 있을 것이다. 그 언어가 오직 드러날 수 있는 곳에서 즉 인간의 마음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일 것이다[Müller: 67].

기독교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류의 종교들(그 기록)을 비교해서 서구인들이 믿었던 초월적 존재의 계시를 확인하려고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창기 '과학'을 외쳤던 학자마저도 궁극적으로 서구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주제에서 '차가운 과학'을 배제하고 '따뜻한 위로'를 찾는 언어는 종교계에서 '과학은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 '믿음을 지식으로 측량하려는 것은 인간의 오만한 망상'이라고 말하는 정서와 일맥 상통합니다. 종교에 대한 이해는 '종교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에게 의존하여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위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런 사고방식에는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에 대한 이해가 인류교를 지향해야 할까

특정 종교의 호교론(어느 종교만이 옳다)에 머물지 않는다면, 인류 보편의 종교적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종교 연구자의 몫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 보편의 종교적 진리'로 상상될 수 있는 것은 황금률 정도의 도덕률이고, 그마저도 없는 종교문화도 숱합니다. 소규모 부족 사회 기반의 종교나 하위 문화에서 향유되는 종교문화들이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편향을 긍정한다면, 결국 모순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소수의 '세계 종교'를 '위대한 종교'로 찬양하고, 그 가르침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종교문화 연구자의 숙명이 되는 것이죠. 'science of religion'의 꿈은 그렇게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교'를 지향하지만, 그것은 결코 인류 전체가 될 수 없는 선택받은 일부의 가치관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귀결될 공산이 큽니다.


편견의 벽을 넘어설 방법은?

'과학적 이해'를 추구하려던 애초의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특정 믿음에 귀속해서(특정 문화적 편견에 입각해서) 현상을 왜곡해서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종교 혹은 종교적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과학도 이 부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과학을 선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구권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죠. 특히 인간(관련 현상/문화)에 대해서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 societies) 편향이 많이 지적됩니다.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인간/문화 이해의 길이 과학으로도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언어, 특정 문화의 언어에 의존한 인간과 문화의 이해는 그보다 더 편견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지금 그 문제에서 가장 최선의 해법은 '더욱 철저하게 과학적 관점과 방법론'을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게 되는 '차가운 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이야말로 그나마 가장 편견없는 종교와 종교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 줄 테니 말입니다.


'차가운 종교학'의 미덕

인간의 아름다운 종교/종교성을 발견할 길을, 차가운 종교학은 제공해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차가운 종교학'은 종교/종교문화에 깃들어 있는 아주 동물적인 '계산'들을 조명해 줄 것입니다. 신/영혼을 만들어 내는 뇌의 작용, 불안에 떨며 정신승리하며 주술과 미신에 허덕이는 나약한 인간, 신과 진리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그 이름으로 누군가의 영웅적 모습을 찬양하고 있는 일견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인류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화/문명/진보라는 가면 속에서 인류는 자연을 파괴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날아와 향후 인류의 존속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포함하는 문화라는 옷을 입고 우리의 나약함, 부끄러움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차갑고', '가차없는', '몰인정한' 인간/종교/종교문화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칼 세이건이 말한 '우주 먼지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존재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 책임을 감당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각자가 스스로 고민하는 데에는 그러한 '차가운 종교학'이 외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학적 종교 연구의 지향은?

저는 이런 설명을 할 때, 세네카의 이 말을 종종 인용합니다.

atheistrepublic.com

종교를 보통 사람들은 참이라 여기고, 현철들은 거짓으로 보며, 통치자들은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종교 연구의 지향도 이런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통상의 과학적 종교 이해는 과학적 호교론(변증론, '우리 종교는 과학적으로도 참이다'), 과학적 무신론('나약하고 비이성적인 사람만이 종교를 믿는다')으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치자의 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인류에 말이죠. 그러할 때 종교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인간의 종교적 특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데 목적을 둘 수 있습니다.

과학적 종교 연구가 추구하는 바 중에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 왔던 것인 세나카가 말한 통치자의 태도가 진정한 '차가운 종교학'의 지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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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Müller, F. Max,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four lectures, delivered at the Royal Institution, 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873. (김구산 옮김, 『종교학입문』, 동문선,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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