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부처님과 신령님의 복도 배달이 되나요?

※이 글은 얼룩소 글(23.5.29)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어머니의 단골 무당과 4월 초파일 하루등

몇 년 전 4월 초파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동생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 무당을 어머니는 '시엉 엄마'라고 부릅니다. 그 호칭은 '수양 어머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시엉'이라는 말이 충청도 방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아이팔기', 한국민속대백과), 정확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싱아'의 충청도 사투리가 '시엉'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참고). '수양'이란 말을 '시엉'으로 쓰는 사례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것 같습니다('기생의 은어').

예전에 '단골 무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의 한 버전인 듯 싶습니다. 수양어미-딸의 관계를 무당과 그 고객이 맺음으로 해서 가정 대소사의 종교적 측면(주로 기원, 액막이 등)을 무당이 담당하게 되는 형태입니다.

어쨌든 부처님 귀빠진 날, 절에서 '하루등'이라는 걸 달아 놓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하루' 동안 달아 놓는 '연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기에 아마 기원을 하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적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불교 풍속을 따라서 무속인들의 집에서도 하루등 달기를 4월 초파일에 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초파일 날 그 단골 무당을 찾아가 '하루등'을 다신다고 주소를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사코 됐다고 했으나 물러서지 않을 자세셨습니다. 일단 우회로를 찾고자 다른 이모님과 통화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이모님 설득에 들어갔습니다.

연등 아래 다는 등표에는 '주소'를 쓰게 되어 있고 넓은 칸에는 이름과 소원을 적습니다. (이미지 출처: 경북매일신문)

나: 아니, 무슨 신령님이 사람 찾는 데 주소가 필요해요?
이모: 그럼 주소가 있어야 너네 집에 찾아가서 복을 주지.
나: 그럼 그 신령님 수준이 좀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용한 신령이면 기도만 가지고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모: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니. 주소가 있어야 사람을 찾지.

논리적인 공략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웃으며 주소를 알려드렸습니다.

그날 동네 사찰에서도 하루등을 달고 있었습니다. 5만원이나 하더군요. 예전에 사찰에 답사를 가면 기와에 사람들 이름과 주소를 적어 기원하는 것을 종종 보았는데, 연등으로도 이런 개인 소원 기원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더군요.


복은 택배처럼 온다?

신적 존재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주소'를 적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생각일 수 있습니다.

영혼, 귀신 같은 존재는 인간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간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처럼 마음을 가지고 있고,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등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반면에, 인간과 같은 신체를 지니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는 직관이 많이 적용이 됩니다.

영화 〈사랑과 영혼〉(1990)에서 보듯 영혼(귀신, 유령)이 물건을 움직이는 등 인간계에 영향을 끼치거나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다거나 먼 곳을 가기 위해서는 교통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https://makeagif.com/gif/molly-finally-believes-ghost-910-movie-clip-1990-hd-FI9fnV


'하루등'의 예에서는 복을 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주소가 필요하다고 여겨진 것입니다. 신적 존재가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그 개인을 특정할 요소가 필요하고, 그걸 주소라고 생각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아마 주소가 필요한 신령님이나 부처님의 모습은 최근의 경향이었을 겁니다. 예전에는 '무슨 마을 아무개'라는 식이었겠지요.

이것은 복잡한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념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추론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뭔가 사람과 같은 존재를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그 존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의사소통하는지', '먹는 것이 필요한지' 등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활동들에서 완전히 유리된 존재는 그다지 자연스러운 대상이 아닙니다(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신령이 가호를 내려야 할 대상을 찾기 위해서 주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습니다. 신적 존재의 '움직임'을 인간의 움직임을 근거해서 상상하고 있기 때문에 영계의 질서가 어떻게 현세의 질서와 동일할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교리화된 종교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도 '누군가를 찾으려면' 주소가 필요하니 신령님에게도 주소가 필요할 것이라고 '의식하지 않은 추론'(직관적 추론)을 하게 됩니다. 잘 생각해 보아야만(다른 '위대한 신'들과의 비교) 그러한 정보가 신령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어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은 완전히 다를까?

기독교의 유일신은 '인간적 생각'으로 떠올릴 때 신학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라는 표현으로 모든 그러한 상상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모든 것을 아는 '상태'나 어디에나 있는 '상태'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논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두 곳 이상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물리적 직관과 충돌하지요. '삼위일체'도 인간적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교리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직관에서 기독교의 신이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무소부재의 특성 때문에 신은 언제나 개인 수호 천사처럼 사람들과 직접 연결된다고 여겨집니다. 친구처럼 가족처럼 상상되기도 하는 것이죠. 가까이 있는 존재, 언제나 의사소통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런 신은 축복을 위해 주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이메일 주소'가 필요하긴 했군요.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신이 된 주인공이 기도 메일에 응답하는 장면

기독교 신의 인간적인 모습은 성서 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신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좋아한다거나 분노했다고 여겨집니다. 또 그의 호칭은 '아버지', '주인', '왕'이라는 인간적인 것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호칭이 옛 기록인 성서 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기도 속에서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 호칭입니다.


종교의 교리를 넘어선 일반적인 종교적 상상력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를 '인간'처럼 상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머리 속에서 인간 행위자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진화시켜 온 능력을 사용하면 쉽게 신, 귀신, 유령, 요정, 도깨비 등과 같은 존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배워 알지 않더라도 약간의 단서만으로도 그런 존재를 현실적인 존재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귀신, 도깨비, 유령 같은 존재에 가장 열광했을 때가 어렸을 때였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인류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루등'은 불교적인 것만도 무속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그래서 습합(혼종)으로 이야기할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위로가 없는 '차가운 종교학', Science of Religion을 생각하며

※이 글은 얼룩소 글(23.7.13)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라는 주제를 다루려면 '위로'가 필요하다? 이 말을 저는 곳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정재승 박사가 총괄자문 및 프리젠터로 참여한 다큐 시리즈 '뇌로 보는 인간'의 마지막 '종교' 편에 제가 자문으로 참여하여 아주 짧은 시간 출연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시청률이 높았던 편이 아니라서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우연히 EBS 다큐를 보던 친구가 '야, 너 나왔더라...잠깐 ㅎㅎ', 이런 반응을 보인 예가 있었을 뿐입니다. 함께 자문에 참여한 구형찬 박사(인지종교학)가 종교학자로서는 메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뇌로 보는 인간' - 종교 편의 한 장면┃저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그때 나왔던 미디어 비평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스 기사 캡쳐 해당 다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다음에 이런 논평을 내 놓았습니다. 미디어스 관련 기사 '위로가 없다'는 비판 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종교라는 주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종교의 본질', '참된 의미' 같은 것을 발견하고, 뭔가 진리의 말씀이나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종교학도 존재합니다. '현대인의 종교는 병들었다'는 진단을 내리며 '고대인의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거나 모든 종교에 담겨있는 가장 고귀한 가르침(가령 황금률 같은)은 모두 상통하고 그것이 인간이 향유해야 할 소박하지만 분명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예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출처: Wikimedia Commons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 뮐러는 '종교학으로의 초대(Introduction to the Science ...

"뇌 회로는 친숙한 것, 중요한 것과 단순한 배경을 식별합니다."(논문 정리)

흥미로운 신경과학 연구 소개를 봤습니다. 친숙한 것과 중요한 것을 먼저 식별하는 뇌 경로에 관한 연구입니다. '신경종교학'에 참고가 되는 논문일 것으로 판단되어,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  *  * Brain Circuit Identifies What’s Familiar, Important, or Just Background┃Neuroscience News.com 요약 : 과학자들은 기억과 감정을 통합하여 감각 정보를 빠르게 평가하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뇌 회로를 발견했습니다. 내측후각피질(entorhinal cortex)과 해마(hippocampus) 사이의 이 직접 피드백 루프를 통해 뇌는 중요한 광경과 소리를 거의 즉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알려진 더 느린 경로와 달리, 이 회로는 관련 자극과 배경 소음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PTSD와 자폐증과 같은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발견은 뇌가 정보를 걸러내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감각 및 기억 관련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 ───  익숙한 것을 한눈에 알아보는 뇌 회로, 해마의 비밀 우리는 왜 친숙한 얼굴이나 물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처음 보는 것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런 능력 뒤에는 우리의 기억 이 큰 역할을 합니다. 뇌의 해마(hippocampus)라는 부분이 과거의 기억을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 들어오는 감각 정보와 비교하여 이것이 익숙한지 새로운지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해마는 “이건 예전에 봤던 거야” 혹은 “처음 보는 거네”라는 신호를 뇌의 다른 부분에 보내 우리의 인식을 조절합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중요한 새로운 정보 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미 아는 것은 배경 소음처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해마는 특히 대뇌피질의 한 부분인 내후각 피질 (entorhinal cortex)과 긴밀히 소통합니다. 내후각 피질은 오감에...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은 많다?│시간과 종교적 본능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