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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 속 민속학자를 보는 종교학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글은 얼룩소 글(23.7.23)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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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악귀'에서 주인공과 함께 악귀의 비밀을 찾아다니는 염해상이라는 인물이 민속학과 교수로 등장합니다.

드라마 '악귀', 나무위키

이 때문에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내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민속학자에 대한 오해’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종교학자’에 대한 오해가 팽배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다빈치 코드'가 큰 인기를 끌었을 때입니다.

'다빈치 코드', 책과 영화 (출처: 위키백과)

물론 '다빈치 코드'가 종교 분야에서 일으킨 관심은 주로 기독교 신학적 문제였기 때문에 '종교학자에 대한 오해'는 '다빈치 코드 논란'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구글 등 포털에서 '다빈치 코드 논란'으로 검색해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종교학자에 대한 오해'는 주인공 로버트 랭던(Robert Langdon) 때문이었습니다. 영화상에서 그는 하버드 대학의 예술사 및 종교 상징학 교수로 나옵니다. 이 시기에 종교학자라고 하면 종교에 감추어진 상징을 능수능란하게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현실과는 다른 이야기죠(종교적 비의가 '사실'이며, 그 비밀을 풀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는 연구는 객관적 학문으로 인정받기 어려우니까요). 극 중의 캐릭터가 가진 직업이 꼭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Harvard: No Symbology here," New Yorker

이야기가 재미있고, 현실에서 있음직하다고 여겨지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랭던 때문에 '재밌는 종교 상징 해석학'을 하기 위해 종교학 분야에 기웃거리다가 실망하고 돌아선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악귀’의 민속학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지인(종교학자)이 트위터에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악귀> 보는데 민속학자는 아니지만 중세 민속 연구하는 종교학자(그리고 교수) 입장에서 보면, 민속학자/종교학자에게 (귀)신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귀)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이해하고 썼느냐가 중요하다. 

교수가 일단 귀신이 나오는 데마다 쫓아다닐 시간은 없다. 회의, 문서작업, 수업, 학생지도, 다 끝나면 연구해야 한다. 물론 절도 교회도 굿판도 가지만 (귀)신을 찾는 게 아니라 인터뷰도 하고 관련 문헌도 찾아본다.

이 분야 거장 중에 온갖 초자연적인 현상들 다 수집하는 경우(자신도 신비경험 한 적 있지만) 사람들 얘기를 듣는 거지 (귀)신한테 듣는 게 아니다.
 
내가 종교학 한다고 하니 [개신교인이] 천주교인도 천국에 가냐고 묻던 질문이랑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종교학자가 알 수 없다. 마녀사냥 연구한다고 하면 마녀가 진짜 있는지 물어볼 기세…
(어느 종교학자의 트윗, 일부 표현은 수정하였습니다)

이 트윗을 보기 전에 다른 종교학자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악귀’ 속 민속학자 때문에 민속학이나 종교학에 대한 오해가 생기겠어요.

국내에 민속학이나 종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을 겁니다. 다만 그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기사화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별로 없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야에 대한 오해는 해소될 길이 없습니다.

민속학이나 종교학자는 결코 '퇴마사'는 될 수 없습니다. 귀신과 유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존재를 '믿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축귀'에 대해서도 실제 쓰일 수 있는 기술이라고 '믿고' 연구하는 것은 학계에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민속학이나 종교학은 무슨 연구를 하는지 궁금하실 텐데요(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out of 안중'이겠죠). 워낙 연구자마다 주제가 다양해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사람들이 믿고 실천하는 민속문화/종교문화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고, 민속문화/종교문화의 기원이나 변화를 설명하는' 일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귀신과 유령에 대해서 조사하고 연구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존재한다고 믿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왜 세상의 언데드/귀신/유령은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죽은 존재'라는)'를 규명해 본다든지, '귀신/유령 같은 존재에 대한 관념의 기원은 무엇일까?', '귀신에서 언데드로 인기있는 초자연적 존재의 변화는 어떤 문화사적 함의를 갖는가?', '한국 사회에서 좀비의 유행이 갖는 문화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백일의 낭군님'의 "지금 나만 불편한가" 짤 수정

어쨌든 인기 영화, 드라마에서 민속학자나 종교학자가 어떻게라도 주목되면 이런 비인기 분야에 대한 관심이 ‘반짝’ 높아지는 효과가 생기기도 합니다. 구글링을 해 보면, 다빈치 코드가 인기를 끌었을 때, 영국의 한 대학에서 ‘종교 교육’ 강좌 수강생이 증가했다는 글을 볼 수 있습니다("Why The Da Vinci Code is making RE lessons so popular"). 해당 내용을 소개하는 글에서 한 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종교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주목을 받지만, 학생들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장려하는 것은 무엇이든 환영해야 합니다.

뭐 이런 것이죠.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

그런데 민속학은 '다빈치 코드'의 로버트 랭던의 전공(상징학 및 예술사)과 마찬가지로 '현실에는 없는 학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또 TMI이긴 합니다만, 한국에는 현재 어느 대학에도 '민속학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앙대와 안동대 민속학과가 그동안 명맥을 이어오다가 중앙대는 2013년에 '비교민속학과'를 폐과했고, 안동대는 2023년부터 민속학과를 '문화유산학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비인기 분야라서 신입생 수급이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종교학도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서울대와 서강대, 한신대 등에 관련 학과가 있습니다만, 교육 개혁 과정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높아 보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가 아니라 정말 귀신이나 유령이라도 튀어 나와야 상황이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기일 겁니다.

어찌 되었든 인기 있는 드라마에서 '민속학자'가, 설혹 귀신을 쫓고 있다고 하더라도 호명된다는 게 값지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민속학의 이웃 분야 전공자이지만, 김은희 작가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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