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7.2)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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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홍길동전 이야기'(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를 허균이 지었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문화적 상식에 가깝습니다. TV 방송에서 그런 정보를 접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국문학계에서 이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다뤄져 왔고, 결론은 지금 우리가 아는 그 '홍길동 이야기'는 허균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만). 이는 꽤 명확하게 확인됩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언론에 보도되어 누구나 알게 된다거나 다큐나 교육 예능에 그런 정보가 잘 소개되지는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확인 작업'은 사실 이야기로서 재밌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정보'가 사실적 정보가 되는 예는 인간사에서 상당히 많습니다. 그걸 '신화'와 연결짓기도 합니다만, 신화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을 담은 기이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라기보다는 '가상의 이야기'로 이해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사람들이 정말 믿었을까라는 의문을 다룬 책도 있습니다). 근래 주목되는 '가짜 뉴스'가 그런 예로 더 적합해 보입니다.
가짜 뉴스는 통상 적대적 정치 세력에 치명적인 정보나 지지 정치 세력에 유리한 정보입니다. 훨씬 자극적인 정보이고, 확증 편향된 정보이기 때문에 드라이한 사실 정보보다도 훨씬 빨리 멀리까지 퍼지고, 고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기사1, 기사2). '틀린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은 그렇게 자극적이지도 재밌지도 않고, 피곤한 일인 경우가 많으니까요(왜 '팩트 체크' 기사가 인기가 없는지 생각해 보시면..).
"최초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다"라는 정보의 정정도 그래서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정정되어야 할 정보가 깔끔하지는 않습니다. 허균이 지었다는 원본이 발견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팩트 체크'를 하기 위해서 관련된 주요 근거를 짚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국문학계에서 이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다뤄져 왔고, 결론은 지금 우리가 아는 그 '홍길동 이야기'는 허균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만). 이는 꽤 명확하게 확인됩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언론에 보도되어 누구나 알게 된다거나 다큐나 교육 예능에 그런 정보가 잘 소개되지는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확인 작업'은 사실 이야기로서 재밌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정보'가 사실적 정보가 되는 예는 인간사에서 상당히 많습니다. 그걸 '신화'와 연결짓기도 합니다만, 신화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을 담은 기이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라기보다는 '가상의 이야기'로 이해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사람들이 정말 믿었을까라는 의문을 다룬 책도 있습니다). 근래 주목되는 '가짜 뉴스'가 그런 예로 더 적합해 보입니다.
가짜 뉴스는 통상 적대적 정치 세력에 치명적인 정보나 지지 정치 세력에 유리한 정보입니다. 훨씬 자극적인 정보이고, 확증 편향된 정보이기 때문에 드라이한 사실 정보보다도 훨씬 빨리 멀리까지 퍼지고, 고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기사1, 기사2). '틀린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은 그렇게 자극적이지도 재밌지도 않고, 피곤한 일인 경우가 많으니까요(왜 '팩트 체크' 기사가 인기가 없는지 생각해 보시면..).
"최초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다"라는 정보의 정정도 그래서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정정되어야 할 정보가 깔끔하지는 않습니다. 허균이 지었다는 원본이 발견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팩트 체크'를 하기 위해서 관련된 주요 근거를 짚어 보겠습니다.
- 《홍길동전》의 허균 작자설은 어떻게 퍼지게 되었나?
학계에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일제 시대 때 활동한 국문학자 김태준이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할 때 언급하면서 허균 작자설이 확산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아일보에 실린 연재물에 최초로 《홍길동전》이 언급된 것은 '조선소설사'의 목차가 나온 30년 10월 31일자 기사입니다. 15장 제목이 '홍길동전과 허균의 예술'로 제시되었습니다. '홍길동전'이 허균이 지은 것이라는 명시적 표현이 등장한 것은 30년 12월 3일자 '조선소설사(17)-임란후에 배태한 신사조와 신문예(속)'이란 제하의 기사에서였습니다.
허균의 「홍길동전」(1569-1618, 광해조) 등은 작자의 생세(生世)로써 그 저작연대를 어느 정도까지 규정할 수 있으며...
그리고 본격적으로 '홍길동전과 허균의 예술'을 다루는 기사는 12월 4일부터 6일까지 이어졌습니다. 동아일보 원문을 사진으로 보고자 했는데, 유료서비스라 포기하고 관련 내용을 일본어 버전으로 실은 '조선통신'으로 관련 내용을 살펴봤습니다(소화 5년(1930) 12월 12일자).
作者許筠の一生
「許筠作洪吉童傳, 以擬水滸」(澤堂雜著, 松泉筆談)の文句で洪吉童傳の作者が許筠であるとが解つた.
작자 허균의 일생
"허균이 홍길동전을 수호전을 모방해서 지었다."(《택당집》의 잡저(雜著)와 《송천필담》)는 문구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임을 알았다.
신문에 연재한 원고를 묶어 1933년에 간행한 《조선소설사》에서 해당 항목은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傳하는말에 許均이가 水滸傳을百讀하고서 洪吉童傳을지엿다고한다. 「許均作洪吉童傳, 以擬水滸」(澤堂雜著)(松泉筆譚)라는文句로써 洪吉童傳의 著者가 許均임을알엇다.
[전하는 말에 허균이 수호전을 백번 읽고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한다. '허균작홍길동전, 이의수호'(택당잡저)(송천필담)라는 문구로써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임을 알았다.]
김태준은 그 정보를 경성제대에서 타카하시 토오루(高橋 亨, 1878~1967)로부터 들었다고 합니다(아마 수업에서 듣지 않았을까요?). 타카하시는 당시 경성제대에서 조선어조선문학과의 조선문학분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인 이식의 《택당집(澤堂集)》(1674년)에서 해당 내용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김태준을 통해서 일간지에 실리게 되었고, 그렇게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다라는 것이 사실로 통용되게 되었습니다.
- 《택당집》에는 뭐라고 쓰여있나?
요새는 문집을 온라인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택당집의 원문을 체크해 볼 수 있습니다.
均又作洪吉同傳, 以擬水滸.
김태준이 인용한 글귀와는 미묘하게 다릅니다. 홍길동의 '동'이 《택당집》에는 '同'으로 쓰였는데, 김태준은 '童'으로 썼습니다(실존인물 '홍길동'의 이름은 통상 '吉同'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통용되는 익숙한 표현으로 고쳐 쓴 것이라서 그런 것인지, 《택당집》이 아니라 타카하시의 수업을 듣고 기록한 바로 인용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이식이 '홍길동전'을 언급하는 맥락을 보면 '위조된 책'이나 '이설의 횡행'을 비판하면서 그 일례로 '수호지'를 언급하고, 그와 유사하게 지어진 '홍길동전'을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허균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홍길동전' 같은 '이설'을 떠드니 반란 혐의로 사형 당한 것이 어찌 그 응보가 아닐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홍길동전'이 언급된 그 단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許筠)과 박엽(朴燁) 등은 그 책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적장(賊將)의 별명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서로 그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번역 출처: 한국고전종합DB>택당집>15권>잡저>산록 中
국문학자들이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집요하게 이 문제를 살펴봤습니다. 그 결론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은 사용된 표현 등 여러가지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볼 때, 18세기 말에서 19세기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홍길동전' 이야기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록의 빈약성과 그것이 긴 시간 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허균이 홍길동에 대한 傳(한문본)을 지었지만,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도적떼의 우두머리였습니다(15세기 후반에 활동). 허균은 생몰 연대가 1569년~1618년입니다. 홍길동에 대한 기억이 아직 말로 전해질 때, 사서의 기록에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을 때' 허균이 활동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허균보다 후대의 사람인 성호 이익은 '임거정'이라는 글에서 유명한 도둑들(홍길동, 임거정, 장길산) 이야기를 했습니다. 홍길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대목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서도(西道)에는 큰 도둑이 많았다. 그 중에 홍길동(洪吉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세대가 멀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장사꾼들의 맹세하는 구호(口號)에까지 들어 있다. 명종 때 임거정이 가장 큰 괴수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적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항간에 '홍길동'('동'을 '童'으로 쓰고 있습니다)이란 인물의 이름이 회자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허균 시대에도 아마 유명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 택당이나 성호나 이런 '도적'에 대해서 상당한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데, 항간에서는 전설처럼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언가 민초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이 있어서겠지요.
지식인의 기록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진압하는 데 관에서 애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탈옥수 신창원에 대한 신드롬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는 요소가 주목이 되면 쉽게 '의적'으로 이미지가 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인식 패턴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후일에 다뤄 보겠습니다).
허균이 홍길동 이야기를 만들기 전에 아마도 '신출귀몰'했던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와 '수호전'이 만나서 허균의 '홍길동전'이 한문본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얼마나 비슷한 것이냐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짐작을 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최근에 발굴된 바 있습니다.
2019년에 '홍길동전은 허균이 지은 게 아니다'는 주장을 해 온 이윤석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소(芝所) 황일호(1588∼1641)가 쓴 홍길동 일대기인 노혁전(盧革傳)을 발굴해서 발표했습니다.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혁'이 '홍길동'이기에 노혁전이 곧 홍길동전입니다. 이 이야기가 허균의 홍길동전과 가까운 버전일 것으로 이윤석 교수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홍길동 이야기와는 조금은 다릅니다(원문, 번역본 참고).
'아비를 아비라 하지 못하고'라는 표현을 등장시켜 적서차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명망가 자제이나 '미천한 몸에서 태어난 자'라고 하여 신분이 낮은 첩의 자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본 내용은 재능을 펼 수 없어 도적 무리와 어울려 도적질을 일삼다가 늙어서 개과천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술을 사용했다거나 재물을 빼앗아 민초들을 도와준다거나 율도국을 세운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허균의 홍길동전의 이본(이야기를 듣고)이라고 해야 할지, 허균처럼 풍문을 기반으로 전을 쓴 것으로 봐야 할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만, 당시 유통된 홍길동전이 어떤 버전이었는지는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현재까지 나온 홍길동전 텍스트에 대한 국문학자들의 연구는, 이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18,9세기에 등장한 홍길동전이 한글본이며, 이전 홍길동전 이야기를 많이 각색한 버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버전이라는 것이고요.
- 정리하자면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기록(택당집)을 거짓으로 볼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 소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희박하다).
16세기 초 홍길동에 대한 항간의 이야기
→ 허균의 한문본 홍길동전(16세기 말 혹은 17세기 초) → (전해지지 않고) 이야기로 떠돈다
→ 노혁전(한문본)(17세기 초) → (역시 전해지지 않고) 이야기로 떠돈다
→ 18세기말 한글 홍길동전으로 각색('장길산'이나 '선혜청'의 언급 등) →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
이런 식으로 전개되며 '홍길동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길동전'을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할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는 말과는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허균이 지은 것과 우리가 아는 홍길동전이 동일한 텍스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정보는 자극적이고, 선명하고, 재밌는 것이고, '팩트 체크'하는 정보는 이해하는 데에 힘이 들고, 모호하거나 불분명하고, 재미없는 것이기 때문에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
이란 표현은 앞으로도 계속 회자되리라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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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거에 제 블로그에 쓴 글(《홍길동전》을 둘러싼 논란│허균이 지은 게 아니다? 최초의 한글소설이 아니다?)을 기반으로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해서 다시 쓴 것입니다.
"최초의 한글소설=허균의 홍길동전이라 배웠는데?"…한문판 발견, 경기일보
최초 한글소설이 홍길동전이라고?, 주간동아
홍길동전, 나무위키
[노혁전 발굴 르포]허균은 홍길동전을 쓰지 않았다, 이푸르메가 보는 세상(네이버 블로그)
원문자료는 한국고전종합DB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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