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7.9)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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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줄 요약
- 영혼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그 물리적 실재성을 검증하는 게 아니다(ex. '21그램 실험').
- 영혼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인지적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이 영혼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법이다.
- 현대의 과학적 임사체험 연구는 죽음에 임박한 상태 혹은 친밀감이 높은 대상의 죽음을 경험할 때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뇌 활동이 나타나면서 죽은 자나 죽은 자들의 세계를 현실감 있게 느끼게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귀신, 유령, 더 나아가 신적 존재가 사람들에게 '현실감' 있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 영적 존재가 정말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이 테마는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인 과학자들의 '훌륭한 먹이감'이 되어 왔습니다.
과학적으로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거짓이야.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은 허약한 사람들이거나 무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과학적인 설명에 이런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한 예이지만 '영혼의 무게가 21g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21g 실험'으로 불리는 이 실험은 고작 6명의 사람으로 이루어졌고, 이런저런 이유로 측정한 사람 1명의 무게만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대조군으로 15마리의 개(독살로 추정)를 측정해서 무게 변화가 없었다고 보고했습니다(1907).
클라크의 비판이 맥두걸의 실험에 대한 결정적 비판은 아니었습니다. 클라크의 설명은 맥두걸의 실험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할 수 있는 비판이었으니까요. '21g 실험'은 빈약한 사례, 엉성한 측정 방법 등 때문에 과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실험 자체가 '검토할 가치 없음' 판단을 받은 것이죠.
'영혼의 무게'에 대한 호기심 이전에 이 실험의 전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가설을 세운 것이죠.
영혼이 존재한다면, 질량이 있을 것이다.
죽은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임종시 무게 변화를 측정하면, 영혼의 무게를 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과학적 실험의 가설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가설을 삼는 것은 그 의도가 너무 뻔한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사람들의 믿음은 잘못되었다'라는 것이죠(물론 '21그램 실험'은 사람들의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데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 그런 식의 접근은 종교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죠. '우리의 믿음, 우리가 믿는 존재는 과학 같은 것으로 측량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기 마련입니다.
'영혼의 무게'를 재는 실험은 그 이후에 산발적으로 어설프게 시도되긴 했습니다만, 과학적 연구 주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연구비를 집행해야 할 주제인지도 의심스럽고, '죽음의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문제도 아닐 뿐더러, 임종 연구의 연구 윤리 문제도 넘기 힘든 장벽입니다(현대에도 죽음 연구는 이 어려움 때문에 충분한 피험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한 것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겁니다(페가수스-날개 달린 유니콘-를 떠올릴 수 있다고 해서 그 존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하지 않죠). 다만 종교적 믿음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상상과 믿음을 현실과는 구분해야겠지요.
- '영혼'은 왜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가?
영혼, 귀신, 신적 존재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많은 사람들이 '믿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질문 자체가 신경과학적 질문이 됩니다.
인간이 지각하는 현실이라는 게 뇌에 의해서 해석된 것이라는 것은 뇌과학 강의나 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닐 새스의 TED 강연을 많이 추천합니다.
영혼과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런 초자연적 존재들이 '있다고 느껴진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 꿈 속에서 만난 존재라서?
영혼이 심리적 실재라는 생각은 옛 사람들도 했던 것입니다. 종교(문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꿈꿨던 19세기 학자들 중에서도 심리적 실재로서의 영혼을 설명하려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 – 1917)는 그의 책 《원시문화》에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은, 낮은 수준의 문화에서도, 두 종류의 생물학적 문제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첫째로, 무엇이 살아 있는 몸과 죽은 시체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 둘째로, 꿈이나 환상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형상들은 무엇일까? 고대의 야만인 철학자들은 이러한 두 종류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아마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속한 두 가지, 곧 생명과 혼령(phantom)을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추론에서부터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원시문화》 2권, 27쪽).
원시인들이 영혼과 같은 존재를 인식하는 계기가 "꿈이나 환상"이었을 것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종교의 기원을 '조상숭배'로 이야기한 하버트 스펜서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상의 영혼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지를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꿈같은 체험의 효과를 말했습니다.
4. 다른 자아[영혼]에 대한 이러한 믿음의 근원은 꿈의 경험에 있습니다. 우리[문명인]가 꿈속의 삶과 현실의 삶을 너무나 쉽게 구분하는 것을 야만인도 할 수 있지만 모호한 방식입니다. 그는 자신이 인식하는 차이조차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가 깨어나서 자신이 잠자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 그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는지 설명 할 때, 그의 야만인의 언어로는 그가 실제 본 것과 꿈에서 본 것, 실제 한 것과 꿈에서 한 것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언어의 부적절함으로 인해 ... 대안적인 해석이 없는 상황에서 그와 그가 자신의 모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의 다른 자아가 떠났다가 깨어났을 때 돌아왔다고 믿습니다. .... 5. 사라졌다가 돌아올 수 있는 또 다른 자아의 개념은 야만인에게는 때때로 그의 부족 구성원들에게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의식 정지 및 의식 이탈을 결정적 증거로 보는 것 같습니다. 기절하여 즉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은 잠자는 사람처럼 다른 자아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한동안 떠난 상태를 보여줍니다. 또 다른 자아의 장기간 부재는 실신, 혼수 상태 및 기타 형태의 활기 없는 경우에 더 많이 나타납니다. ....(Herbert Spencer, "On ancestor worship and other peculiar beliefs")
우리의 일상에서 '조상님이 점지해 준 로또 번호'도 보통 꿈에서 계시되곤 하죠. 이런 일반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영혼', '귀신', '유령'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현실감 있게 느껴졌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만, 19세기 학자들은 이런 믿음이 비과학적, 비문명적 사고의 '오류'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문명/야만의 자타관에 기반한 사회진화론적 관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기 쉬웠던 것입니다.
어쨌든 '꿈', '환상', '죽음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으니 그것이 실재하는지 따져보자는 발상보다는 '상대적으로', 과학적으로 종교적 관념을 다루려 한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이런 관찰이 마냥 틀렸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타일러는 원시 영혼관을 이야기하면서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현대의 의료 현장에서 관찰되는 것과 신경과학적 연구들도 그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혼 감각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신경과학적 설명
죽음과 관련된 여러 경험(주마등, 임사체험 등)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이 주제, 영혼의 존재에 대한 현실감이 신경생리적 효과 때문에 나타나는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혹은 어떤 치명적 충격을 받았을 때, 주마등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로 임종 직전의 사람들에 대한 뇌파 측정을 통해서 숨이 멎을 때 폭발적인 뇌 활동이 감지되면서, 주마등이 신경생리화학적 효과일 것이라는 가설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체험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임종기 일시적 의식 명료 상태(Terminal lucidity), 죽은 자들과의 만남, 임사체험(+사후세계 경험) 같은 것입니다. 생명을 잃는 치명적 단계에서 뇌의 폭발적 활성화가 이런 체험들을 유도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뇌가 해석한 정보가 우리의 '현실' 경험이 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강렬한 뇌 활동이 생산한 정보가 우리에게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높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하는 것은 물론 모든 사람들은 아닙니다. 심정지에서 소생한 사람 중에서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이 약 18%라는 보고가 있습니다(관련기사). 친밀한 사람의 죽음 이후에 그 사람과의 만남 혹은 의사소통을 경험하는 경우도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사된 사람의 50~75%가 이를 보고하기도 했습니다(관련기사).
그 빈틈은 어떻게 메워질까요? 장동선 박사가 인용한 어린이 대상 연구가 이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모호한 정보를 익숙한 것으로 잘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뜻 본 장면에서 뭔가 사람 비슷한 형체를 떠올렸지만, 막상 그곳을 다시 봤을 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으면, 귀신 같은 영적 존재를 쉽게 떠올리기도 합니다('내가 지금 헛것을 봤나'라고 말하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현실감' 있게 경험하는 영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그걸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믿거나 말거나 이긴 합니다만).
- 영혼의 존재에 대한 현실감은 믿음이 아니라 직관적 인식의 산물
뇌, 마음의 해석 때문에 그러한 존재의 현실감을 우리가 '느끼게' 된다는 것은 종교적 관념(더 나아가 종교)에 대한 하나의 전제를 되묻게 만듭니다. 바로 '믿음'이란 것이죠. 앞서 살펴본 타일러나 스펜서 모두 문명화 되지 못한 사람들(원시인 혹은 야만인)이 '착각'에 기반해서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의 전제를 사용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사고의 오류에 기반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영혼의 존재에 대한 감각이 뇌의 특별한 인지작용의 산물이라는 게 잘 이해될 수 있다면, 이 인지작용이 직관적 추론(착시처럼 뇌에 특정 정보가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해석된 정보를 인식하는)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감각은 의식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알아서 믿는' 정보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종교적 정보가 다 이런 특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신적 존재가 있다, 그런 존재하고 대화할 수 있다, 신적 존재가 화를 낼 수 있다 등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직관적 추론입니다. 신적 존재가 하나 밖에 없다, 다른 신적 존재는 악마다 같은 것은 전문종교인들의 체계화 과정을 거친 교리적 정보로서 우리의 직관에는 통상 반하는 것으로 '노력을 들인' 학습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종교적 정보는 '알아서 믿는'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문화-제도적 종교 체계(특히 기독교)에 의존하여, 현실과 다르게 인간의 종교적 행동/관념을 재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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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원시문화》 2권, 유기쁨 옮김, 서울: 아카넷, 2018.
"눈이 보는 세상, 뇌가 보는 세상", 동아사이언스
"Why Unusual Things Sometimes Happen as Someone Is Dying," Psychology Today
Why Unexplainable Events Are Common as Loved Ones Die," Psychology Today
"죽는 순간, 뇌에서 이것이 번쩍였다", 한겨레
"죽음 직전 뇌 활동 급증…'주마등' 비밀 풀까?", EBS 뉴스
"죽음의 '찰나' 뇌 활동은 늘었다",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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