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5.18)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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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서 6월은 많은 사회적 죽음을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사회적/종교적 의례에 추모제나 위령제라는 말이 붙습니다.
추모제와 위령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의례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개념입니다. 추모제는 '기억'과 '기념'에 초점이 맞춰진 이름이라면, 위령제는 '죽은 자를 위로한다'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강조점의 차이는 의례의 목적 상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추모제와 위령제는 같이 쓰이기도 합니다만...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사회적/종교적 의례에 추모제나 위령제라는 말이 붙습니다.
추모제와 위령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의례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개념입니다. 추모제는 '기억'과 '기념'에 초점이 맞춰진 이름이라면, 위령제는 '죽은 자를 위로한다'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강조점의 차이는 의례의 목적 상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추모제와 위령제는 같이 쓰이기도 합니다만...
명백하게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물 대상으로는 '추모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일견 당연합니다. 기억과 기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령제는 사람, 동물 가리지 않고 쓸 수 있습니다. 그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식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 추모제와 위령제의 약간의 차이
추모제는 주로 사회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죽은 자를 위한 의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억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들자면, 먼저 순국선열을 위한 추모제입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살아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망자들을 영웅적 존재로 여기며 기억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남은 자들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사회적 사건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입니다. 많은 사회 구성원에게 큰 충격을 준 사회적 사건/재난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은 그들이 살아남은 자들의 어떤 잘못으로 인해 희생되었고, 그 같은 비극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그 희생의 비극을 곱씹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추모는 분명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려는 노력, 비극적 사건을 유발시킨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부수적으로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위령은 그런 사회적 관심이 결여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을 품고 죽었을 그 영혼이 죽어서라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산 자들의 미안함을 표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맥락에서는 그 망자의 원혼이 저주/살을 일으켜 불운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방어적 동기가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도덕화되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망자의 한을 풀어주고 산 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를 합니다.
실험동물 위령제를 지낸다고 해서 '동물 실험'을 금지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그 생명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으니 미안함을 표하고, 넋이라도 달래주어 그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것이죠.
- 추모/위령의 위로는 산 자에게로 향한다
추모와 위령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산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위로(慰勞)는 산 자들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죽음이든 그렇지 않든 추모와 위령은 남은 자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분노와 불안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사회적 위기가 발생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법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 존재에 매달리곤 합니다. 21세기에도 기우제가 이루어지는 이유입니다. 비를 내리는 신을 사람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내렸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도 표하지 않는다면 어찌 해 볼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비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망자를 위한 의례도 죽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그 중요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찌 해 볼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달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형식은 '죽은 자를 위해 산 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만.
비정상적 죽음은 죽은 자가 구천을 떠돌게 되는 이유라 여겨집니다. 그러한 죽음관은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 알게 되는 믿음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의 죽은 자에 대한 미안함, 슬픔 등 감정적 관여 정도가 클 때, 아주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종교적 관념입니다.
남은 사람들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존재를 계속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는 꿈에도 나오고, 남은 자들이 큰 감정적 동요 속에 있을 때, 희미한 형체를 드러낸다고 여겨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두뇌의 인지 작용이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마음을 쓰는 존재를 주변 상황에 투사하게 되니 말입니다. 그렇게 구천을 떠도는 영혼은 현실감이 있습니다.
남은 자가 망자에 대한 미안함과 해결되지 않는 분노와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면, 심리적-정신적 문제를 불러옵니다. 망자를 위한 의례는 이런 '맺힌 것'을 풀어주는 의미를 갖습니다. '망자가 이제 좋은 곳에 갔으니 유족은 의무를 다 했고, 이제 짐을 내려 놓아도 좋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죠.
한편 사회적 죽음의 경우는 미안함과 슬픔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 죽음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으로 다뤄지지 않으면 집단적 행동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망자를 위한 사회적 의례는 집단적, 정치적 행동을 관리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사회적 재난에서 '나랏님'은 특히 욕받이가 되기 쉽지요. 홍수가 나도 '왕이 정치를 잘못해서', 가뭄이 심해도 '왕이 무슨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대통령을 비난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의례는 그렇게 사회적 재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경감시키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나라에서는 할 도리를 다하고 있다. 그러니 망자의 안녕을 위해 마음을 모으고, 피해자들도 이제 분노와 슬픔을 이겨내시라'라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사회적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추모의 의미는 기억과 기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5.18입니다만, 국가 폭력에 의한 사회적 참사가 여전히 마타도어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온전히 한국인 모두가 추모할 사건이 되지 못합니다. 5.18만이 아니라 4.16, 10.29가 그랬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그랬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비극,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면 될 일, 추모제나 위령제가 치러지고 피해자 유족들이 슬픔을 달래면 될 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할 때 사회적 죽음의 추모는 '추모 위령제'처럼 '종교적 해법'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승리'가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 해법이 모색되지 않는다면, 계속 우리 사회 일부분의 아픔에 머물고, '사회적 죽음'이라는 인정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추모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재난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비극적 죽음을 맞아서 슬퍼하고 부디 저 세상에서라도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하는 것으로는 완성될 수는 없을 겁니다.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만들 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의 죽음을 딛고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결과물을 남은 사람들이 받아 들 수 있을 때 말이죠.
지금 우리는 사회적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이것이 무척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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