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4.27)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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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은 '악마'나 '악령'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이해가 상식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데몬이 본래부터 이런 '순수 악'의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demon은 악마라는 의미와 귀신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악마라고 한다면 devil이나 Satan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말은 심지어 악마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귀재, 명인, 비범한 사람'이라고 말이죠. 부정어도 특정한 맥락에서 강한 긍정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니 뭐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상충되는 의미들이 '데몬'이라는 말이 기독교화되어 '악마'가 되었던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귀신'이라는 말에는 '악마'나 '악령'이란 의미는 없습니다(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요). 기본적인 의미는 '죽은 사람의 영혼'입니다. 그리고 귀신은 인간에게 재앙(禍)만 주는 존재가 아니라 복도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데몬'처럼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귀신'이란 말을 써서 나타내기도 합니다. '데몬'이라는 말과는 '악령'이나 '악마'를 제외하고는 확실히 비슷한 말로 보입니다.
우리의 '귀신'이라는 말에는 '악마'나 '악령'이란 의미는 없습니다(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요).
- 데몬, 죽은 자의 영혼
실제로 '데몬'은 기독교화되기 이전에 귀신과 똑같은 특성을 가졌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 'daimon(다이몬)'에서 나왔습니다. 다이몬은 고대 그리스에서 일반적으로 '신'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헤시오도스의 기록에 따르면, '다이몬'은 황금 시대 인간의 죽은 영혼이었습니다.
(ll. 109-120) 먼저 올림푸스에 사는 불멸의 신들은, 크로노스가 천상을 다스릴 때 살았던 필멸자인 황금 종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의 근심 없이, 노역과 슬픔에서 멀리 떨어져서 신들처럼 살았다. 비참한 노년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다리와 팔은 결코 쇠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악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잔치를 즐겼다.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마치 잠에 빠진 것 같았다. 그들은 모든 좋은 것을 가졌다. 왜냐하면 열매 맺는 땅은 억지로 가꾸지 않아도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떼가 많고 축복받은 신들의 사랑을 받으며 많은 좋은 것들과 함께 그들의 땅에서 편안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ll. 121-139) 그러나 땅이 이 세대를 덮은 후에-그들은 땅에 거하는 순수한 영(pure spirit)으로 불리며, 친절하게 해악을 면하게 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수호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개를 입고 땅의 사방을 돌아다니며 판결과 잔인한 행위를 감시하며 재물을 가져다 주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고귀한 권한을 또한 그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
헤시오도스, 『일과 날』 중에서 (출처: Hesiod's WORKS AND DAYS COMPLETE)
순수한 영(pure spirit)으로 번역된 말은 δαίμονες ἁγνοὶ(daímones agnoí, 거룩한 다이몬들)였습니다(원문 참조). 다이몬에 대한 본래 아이디어가 '죽은 자의 영혼'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던 것을 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땅이 이 세대를 덮은 후"는 '황금 종족이 죽은 후'라는 의미).
다이몬의 중성 형용사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daimonion)은 '신적인 힘'이란 의미와 함께 '깨끗하지 못한 영', '악한 영'이란 의미로 신약성서(헬라어 버전)에 쓰였지만, 2세기 활동한 교부들의 문서를 보면 '죽은 불신자의 영혼'이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참조).
그리고 다이몬은 '인간의 수호자'였습니다. 이것도 '귀신' 관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많은 귀신들보다 '죽은 조상'을 떠올리는 일이 많습니다. 조상 제사가 행해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후손의 복이지요.
그리고 자연을 신격화한 신령들도 귀신으로 불리는 존재입니다. 마을 신앙에서 산신[마을 뒷산으로 표상]과 서낭신[주로 마을 경계의 큰 나무로 표상]도 마을 주민의 안녕과 풍요에 영향을 끼치는 신적 존재입니다.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라고 해도 잘 대접하고 달래면 복을 주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는 '수호신'의 기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본의 사례이긴 합니다만, 대표적 원령신 중 하나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신원 복권이 되고 '학문의 신'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올림푸스에 사는 불멸의 신,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적 존재로서의 다이몬은 인간을 도와 줄 수 있는 존재로 중간자적 신격이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인간에 가깝고, 친근하며,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신격으로 여겨졌던 것을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방의 신은 나쁘다, 악하다, 더럽다
다이몬이나 다이모니온의 용례에서 '다른 종교의 신격'을 가리키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도행전 17:18입니다.
... 또 몇몇 사람은 "그는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행 17:18 (새번역)
예수를 그리스인들이 '외국의 신들'로 칭하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용어가 '다이모니아(daimonia, daimonion의 복수형)'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신'으로 여기는 것도 다이모니온이 쓰여 표현됩니다. 이런 존재들의 대장을 '바알세불'로 호명하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마 12:24
가나안 지역에서 바알은 폭풍의 신이자 풍요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우스 등과 마찬가지로 천신 계열인 신입니다. 그 명칭도 그저 '주님'이었던 것이죠. 그리스의 '주님'이란 표현이 '아도나이'이고, 이것이 신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기도 한 것과는 대비됩니다. 현대판은 '알라'와 '하느님'의 구분일 것 같습니다. '알라'는 아랍사람들 말로 'The God'이지만,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바알처럼 '이방 신의 이름'으로 여겨지고 있지요.
기독교의 일신교 체계는 '유일하게 야훼만 존재한다'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다른 신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금제를 특징으로 합니다. 상당히 적극적(혹은 공격적) 형태의 일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 신'과 '이교의 신'을 악마의 대명사로 만들기 쉬운 것이죠.
- 최고신의 하수인인 데몬
성경책에도 데몬은 순수한 악으로만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데몬은 신의 일을 수행하는 하수인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에게서는 주님의 영(the Spirit of the LORD)이 떠났고, 그 대신에 주님께서 보내신 악한 영(an evil spirit from the LORD)이 사울을 괴롭혔다. 사무엘상 16:14(새번역)
그러자 그는 대답합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영(a lying spirit)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 열왕기상 22:19-23
이 영적 존재를 '데몬'이라고 보면, 신이 데몬의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되지는 않았지요. 이런 악령들의 주인, 대장은 타락한 천사인 '사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6세기) 이후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이 유입되면서 일어나기 시작하고(그레고리 라일리, 1994: 178), 초기 기독교가 로마에 정착하고, 교회 조직이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완성되어 갔습니다(Janowitz, 2019).
이런 변화를 통해서 데몬은 인간에게 복을 줄 수도, 재앙을 줄 수도 있는 양가적 특성을 지닌 '다이몬'에서 항상 악한 '악마'로 자리매김했다고 합니다.
- 데몬의 악마화는 복잡한 함수
다른 종교/부족/나라의 신들에 부정적이라고 해서 다 그런 신성을 순수 악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보통은 미개하다, 모자란다, 금수 같다는 수준에서). 그 정도의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순수 악의 사유는 고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현실에서 경험할 수가 없는 것이라서 더 그렇습니다.
이방 신 배척 정서, 중동의 극단적 이원론, 초기 기독교 운동과 로마 제국의 박해(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권세)와 순교, 로마 국교화 이후 개인 신앙 문제로의 초점 변화, 수도원의 성장과 수도사들의 악마론 유행, 인간 본성과 악마의 유혹론의 확산 등 데몬의 악마화는 다양한 수준에서 다양한 초점을 가지고 이루어진 복잡한 변화 과정이었습니다. 그냥 딱 '기독교 일신론에 입각해 볼 때, 이제 데몬은 악마야'라는 이해가 뿌리를 내려서 '데몬=악마/악령'이 문화적으로 확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합법화 이슈에서 우주 삼라만상 및 인간의 육신과 영혼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확장되면서 '악마'의 활동 영역과 방식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데몬은 신적인 것의 대척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과 의례를 정당화해 주는 절대적 적수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기독교인들의 '귀신'에 대한 편견
데몬을 '귀신'으로 이해하는 경향은 기독교인들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성서 번역이 이루어질 때, 데몬과 다이모니온 등이 '귀신'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사전' 같은 곳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본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귀신은 재앙도 줄 수 있지만, 복도 줄 수 있는 존재기 때문에 "대체로 사악한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위험한 존재'라는 평가는 가능하긴 합니다만.
데몬의 본래 의미를 알고 이에 맞춰서 '귀신'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귀신을 사악한 존재로 표상하고 데몬과 등치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신교 전통에 입각해서 우상숭배를 배격해야 하니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귀신'은 기독교인들의 기대만큼 '사악한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조상 제사와 마을 제사의 풍속이 유지되고 있어서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 조상의 영혼, 마을신 등을 표상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 의미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초적 이유는 한국에 기독교인(개신교+가톨릭)이 많다고 해도 전체 인구의 25% 이하(2021년 갤럽 조사 기준)로 비교적 소수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긴 합니다.
- 데몬과 귀신을 연결 지을 때, 무엇이 보일까?
영적 존재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사고 방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데몬, 귀신, 유령, 도깨비, 요정, 중동의 지니, 요괴 등은 비슷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화적 편차들이 존재합니다만, 트릭스터로 그려지는 측면, 선악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 성격, 죽은 자들과의 밀접한 관계, 주 활동 영역이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을 만한 곳이라는 점 등등을 공통점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관념들이 '종교 테크'를 타게 되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상상하는 범위를 초월해서 복잡한 모습, 세계관으로 그려지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절대화 된 악은 '악의 축'처럼 공포를 활용한 의사결정 독단화 도구로 기여합니다. 때문에 '복잡한 상상'을 요하는 종교적 관념은 종교적 권위 및 이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인간의 진화된 본성에 따른 기본적인 종교적 관념과 실천이 체계적인 문화적 제도화(교리, 공동체의 구성)를 통해서 전혀 다른 '사회적 기능'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악'은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에게 '절대적 권한'을 주는 특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참고자료:
Demons and Witchcraft in the Early Church
귀신(Demon)에 대한 고찰(그레고리 라일리), 이 글의 원문은 확인하지 못함.
다이모니온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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