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3.24)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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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은 ‘옳은 말을 하지만 행동이 잘못되었을’ 때 많이 쓰는 말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일.
현대 사회에서 위선의 대표 분야라고 한다면, 정치와 종교일 겁니다. 영어 사전에서 hypocrisy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예문을 볼 수 있습니다.
He condemned the hypocrisy of those politicians who do one thing and say another.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정치인들의 위선을 비난했다. - 옥스포드 영한사전
Why can't politicians just be honest with themselves and stop all this hypocrisy?
왜 정치인들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이 모든 위선을 멈출 수 없을까? - Cambridge Dictionary
위키백과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윤리적, 종교적인 사람의 본질을 폭로하거나 드러내는 데에 많이 사용된다.
종교 분야도 그 어떤 분야 못지 않게 '좋은 말씀', '선한 가르침'을 다루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직업적 종교인이나 일반 종교인들에게 보통 사람보다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게 마련입니다(자신들이 한 말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들이 정말 '말하는 대로' 선한 것을 추구하고 올바로 행동한다면, 기준이 조금 높더라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도 낫지 않습니다. 몇몇 눈에 띄게 '신성한 인간의 표본'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그 부분에서 유명합니다. 위선의 그림자는 자신의 고백과 그리고 한 집요한 언론인의 입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1979년 12월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그 부분에서 유명합니다. 위선의 그림자는 자신의 고백과 그리고 한 집요한 언론인의 입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1979년 12월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내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이웃, 만지는 이웃, 함께 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는] 자신을 배고픈 사람, 벌거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있는 사람, 외로운 사람, 원치 않는 사람으로 만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 이것이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입니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찾아야 할 굶주림입니다. 그것은 우리 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마음에 간직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연락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 기쁨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그 찬란한 기쁨은 실재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자료)
하지만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영적 친구인 마이클 반 더 피트(Michael van der 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사실이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영적 친구인 마이클 반 더 피트(Michael van der 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사실이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매우 특별하게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하며, 혀는 움직이지만 말을 할 수 없습니다. …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분께 손을 내어드릴 수 있게요."
또 다른 서신에서 자신이 겪는 일을 '건조함', '어둠', '외로움', '고문'으로 말했고,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 때문에 천국과 신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선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미소는 가면", "모든 것을 가리는 망토"라거나 "저는 마치 제 마음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어요."라고 고백하기도 하며 "만약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면 '무슨 위선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Mother Teresa's Crisis of Faith).
'마더 테레사도 인간이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위선'이 언급되었듯이, 그가 겪은 현실 속에서 신이 함께 하는 기쁨을 가지고 늘 밝게 지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겉과 속의 차이.
마더 테레사는 개인의 신앙적 갈등과 고뇌와는 질적으로 다른 그늘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의 가면 벗기기'의 1인자입니다. 그는 마더 테레사의 '가면을 벗기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아래의 말로 갈음이 될 것 같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빈곤의 친구였습니다. 그녀는 고통이 신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고 가축화된 강제 생식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유일하게 알려진 빈곤 퇴치법에 반대하는 데에 평생을 보냈습니다.
인도의 한 화학 공장이 폭발해 2,50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용서'를 입에 올리며 피해자를 다독인 마더 테레사의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믿었던 신념(가톨릭 신앙--낙태 반대, 절대적으로 신에게 감사하기 등) 때문에 보수적인 행동 방식을 보인 바에 대해서 최대치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자면 히친스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호 기금을 얻기 위해서 범죄자의 돈을 받고 자신의 명성을 판 일 등도 '빈자 구제'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더러운 일'로 치부할 수도, 위선적인 일로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히친스는 가차없이 후자의 선택을 한 것이죠. 그러나 히친스의 노력은 결실을 얻지 못했고, 마더 테레사는 가톨릭의 성녀가 되었습니다.
종교의 언어에는 '신성함'이 깃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죠. 그러니 그 갭은 늘 좁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교와 종교인을 생각하며 그 신성함, 그들이 좋다고, 옳다고 말했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하고자 합니다.
도덕 심리학에서 이런 실험이 있었다고 하죠. 윤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도덕에 민감할 테니 다른 직종의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윤리학자들이 도덕적으로 더 잘 행동하지도 더 못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배운 걸 어디에 쓰느냐 궁금하실 텐데요. '좋은 말씀'은 보통 사후 정당화를 하는 데 쓰인다고 합니다. 그 가치를 적용해서 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준에서 자신이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미묘한 수준까지 파고들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법조인들이 본인이 잘못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소송을 걸어 피해자를 진 빠지게 하거나 소송을 통해 징계 절차를 지연시켜 실질적 처벌을 무력화시키는 경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법이 누군가의 '방패'가 되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 확인했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의 기능도 보통의 경우에는 그런 '방패'로서 기능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그 가치를 실천하려고 하면 '이단'이 되거나 어딘가에 고립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의 아주 소수만이 '성스러운 인간'으로 대접을 받습니다만, 그게 꼭 '사실'에 기반한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대중적 기대에 따라 만들어진 이미지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합니다(마더 테레사가 꼭 그런 케이스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것이 종교에 관한 우리의 선입관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대게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기보다는 '선함'을 가장하기 좋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빠지지 않는 고민이 '위선'과 '가식'이 되고, 비종교인이 종교를 욕하는 주요 레퍼토리가 위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종교의 특성을 신성함에서 찾지 않는다면, 이런 오해는 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를 인간적인 한계 속에서 현생을 버티기 위한 문화적 기술이나 사회적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가 부여된 가치 체계, 그리고 그것을 전수하는 조직화된 집단을 일컫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분야도 하나의 업종이고 서비스 시장이라는 걸 생각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고, 그들의 선함은 하는 일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종교의 권위 창출 기능이 훼손될 것 같긴 합니다. 종교는 통상 무엇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정하고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에 모종의 기대를 거는 것인데요. 실상이 그렇지 않다면 그 권위의 '가면'이 벗겨지는 효과가 생길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존재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본디 사회 구성원이 모두 공유하는 가치 체계였습니다. 혹은 그렇게 강제된 가치 체계였지요. 그 경우에 정의와 진리의 기준으로서 종교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비판될 수 없는 존재',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해당 종교 밖의 사람들, 그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위선이 분명해 보일 겁니다. 내부자에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건 종교인 개인의 수준에서도 나타납니다. 종교 가르침이 '방패'로 사용되는 차원에서, '신의 이름으로'라는 정당화의 마법을 통해서 어떤 비인간적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혐오, 차별, 쇼비니즘, 친일적 식민주의, 폭력 등등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종교계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크게 바뀔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종교인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위선을 떨며, 비종교인들은 종교인들을 위선자로 욕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비슷하게 위선자이지만, 여기에서 그나마 덜 위선적인 존재가 선과 올바름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일 겁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만, '위선'의 정의상 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밖으로 내뱉는 올바름의 가치가 없다면, 행동과 말의 격차가 발생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분명 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모두가 다 비슷한 인간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종교/종교인이 '선해야 한다'는 전제가 실제로 의미 없는 것이지만, 그걸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싸움이 동반되는 일이죠. 내적으로 자신과의 싸움(믿었던 세계의 붕괴) 혹은 외적으로 특정한 신념을 가진 사람과의 싸움일 겁니다(이 후자가 특히 어렵죠). 〈스포트라이트〉의 기자들이 고군분투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도 합니다. 기득권 세력의 결탁만이 장벽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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