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가 그 부분에서 유명합니다. 위선의 그림자는 자신의 고백과 그리고 한 집요한 언론인의 입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1979년 12월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내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이웃, 만지는 이웃, 함께 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는] 자신을 배고픈 사람, 벌거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있는 사람, 외로운 사람, 원치 않는 사람으로 만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 이것이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입니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찾아야 할 굶주림입니다. 그것은 우리 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마음에 간직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연락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 기쁨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그 찬란한 기쁨은 실재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영적 친구인 마이클 반 더 피트(Michael van der 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사실이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매우 특별하게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하며, 혀는 움직이지만 말을 할 수 없습니다. …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분께 손을 내어드릴 수 있게요."
또 다른 서신에서 자신이 겪는 일을 '건조함', '어둠', '외로움', '고문'으로 말했고,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 때문에 천국과 신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선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미소는 가면", "모든 것을 가리는 망토"라거나 "저는 마치 제 마음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어요."라고 고백하기도 하며 "만약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면 '무슨 위선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Mother Teresa's Crisis of Faith).
'마더 테레사도 인간이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위선'이 언급되었듯이, 그가 겪은 현실 속에서 신이 함께 하는 기쁨을 가지고 늘 밝게 지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겉과 속의 차이.
마더 테레사는 개인의 신앙적 갈등과 고뇌와는 질적으로 다른 그늘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의 가면 벗기기'의 1인자입니다. 그는 마더 테레사의 '가면을 벗기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빈곤의 친구였습니다. 그녀는 고통이 신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고 가축화된 강제 생식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유일하게 알려진 빈곤 퇴치법에 반대하는 데에 평생을 보냈습니다.
인도의 한 화학 공장이 폭발해 2,50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용서'를 입에 올리며 피해자를 다독인 마더 테레사의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믿었던 신념(가톨릭 신앙--낙태 반대, 절대적으로 신에게 감사하기 등) 때문에 보수적인 행동 방식을 보인 바에 대해서 최대치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자면 히친스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호 기금을 얻기 위해서 범죄자의 돈을 받고 자신의 명성을 판 일 등도 '빈자 구제'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더러운 일'로 치부할 수도, 위선적인 일로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히친스는 가차없이 후자의 선택을 한 것이죠. 그러나 히친스의 노력은 결실을 얻지 못했고, 마더 테레사는 가톨릭의 성녀가 되었습니다.
종교의 언어에는 '신성함'이 깃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죠. 그러니 그 갭은 늘 좁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교와 종교인을 생각하며 그 신성함, 그들이 좋다고, 옳다고 말했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하고자 합니다.
도덕 심리학에서 이런 실험이 있었다고 하죠. 윤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도덕에 민감할 테니 다른 직종의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윤리학자들이 도덕적으로 더 잘 행동하지도 더 못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배운 걸 어디에 쓰느냐 궁금하실 텐데요. '좋은 말씀'은 보통 사후 정당화를 하는 데 쓰인다고 합니다. 그 가치를 적용해서 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준에서 자신이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미묘한 수준까지 파고들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법조인들이 본인이 잘못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소송을 걸어 피해자를 진 빠지게 하거나 소송을 통해 징계 절차를 지연시켜 실질적 처벌을 무력화시키는 경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법이 누군가의 '방패'가 되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 확인했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의 기능도 보통의 경우에는 그런 '방패'로서 기능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그 가치를 실천하려고 하면 '이단'이 되거나 어딘가에 고립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의 아주 소수만이 '성스러운 인간'으로 대접을 받습니다만, 그게 꼭 '사실'에 기반한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대중적 기대에 따라 만들어진 이미지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합니다(마더 테레사가 꼭 그런 케이스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것이 종교에 관한 우리의 선입관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대게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기보다는 '선함'을 가장하기 좋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빠지지 않는 고민이 '위선'과 '가식'이 되고, 비종교인이 종교를 욕하는 주요 레퍼토리가 위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종교의 특성을 신성함에서 찾지 않는다면, 이런 오해는 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를 인간적인 한계 속에서 현생을 버티기 위한 문화적 기술이나 사회적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가 부여된 가치 체계, 그리고 그것을 전수하는 조직화된 집단을 일컫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분야도 하나의 업종이고 서비스 시장이라는 걸 생각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고, 그들의 선함은 하는 일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종교의 권위 창출 기능이 훼손될 것 같긴 합니다. 종교는 통상 무엇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정하고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에 모종의 기대를 거는 것인데요. 실상이 그렇지 않다면 그 권위의 '가면'이 벗겨지는 효과가 생길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존재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본디 사회 구성원이 모두 공유하는 가치 체계였습니다. 혹은 그렇게 강제된 가치 체계였지요. 그 경우에 정의와 진리의 기준으로서 종교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비판될 수 없는 존재',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해당 종교 밖의 사람들, 그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위선이 분명해 보일 겁니다. 내부자에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건 종교인 개인의 수준에서도 나타납니다. 종교 가르침이 '방패'로 사용되는 차원에서, '신의 이름으로'라는 정당화의 마법을 통해서 어떤 비인간적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혐오, 차별, 쇼비니즘, 친일적 식민주의, 폭력 등등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종교계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크게 바뀔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종교인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위선을 떨며, 비종교인들은 종교인들을 위선자로 욕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비슷하게 위선자이지만, 여기에서 그나마 덜 위선적인 존재가 선과 올바름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일 겁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만, '위선'의 정의상 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밖으로 내뱉는 올바름의 가치가 없다면, 행동과 말의 격차가 발생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분명 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모두가 다 비슷한 인간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종교/종교인이 '선해야 한다'는 전제가 실제로 의미 없는 것이지만, 그걸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싸움이 동반되는 일이죠. 내적으로 자신과의 싸움(믿었던 세계의 붕괴) 혹은 외적으로 특정한 신념을 가진 사람과의 싸움일 겁니다(이 후자가 특히 어렵죠). 〈스포트라이트〉의 기자들이 고군분투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도 합니다. 기득권 세력의 결탁만이 장벽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1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 ∞∞∞ ─── 미신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그게 무엇이냐 물어 본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들이나 관념을 이야기합니다. 뇌과학자 정재승 선생님도 미신 이야기를 하면서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행위가 불길하다는 미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정재승 편 미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할 때, 이렇게 미신에 속한 것들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시험 볼 때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시험 볼 때 포크를 선물한다' '손 없는 날 이사해야 한다' '밤에 손톱을 깎으면 안 된다' '귀신을 쫓기 위해서 팥죽을 먹는다' 그럼 '미신'은 어떤 것이냐 설명해 보라면, 아마 이런 말들을 늘어 놓게 될 겁니다. https://engoo.co.kr/blog/먼나라이웃나라-세계-각국의-다양한-미신들/ 표준국어대사전에 바로 그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미신' 항목 그런데 이런 개념은 일상에서는 그런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쓸 수 없는 설명입니다.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게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경제적 판단과 믿음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관상은 과학이다', 'ABO 혈액형 성격론', '과시적 소비' 등등. 어떤 종교적 맥락에서 '이상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미신'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종교와는 다른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위 국어사전의 개념 정의는 종교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신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어딘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미신'은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시하는 많은 개념은 편견의 산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서 그런 게...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5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본래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 ∞∞∞ ─── 미신, 사이비, 이단 이 말들은 종교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입니다. 미신은 종교적 의식(儀式)이지만, 종교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비과학적인 믿음을 통칭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이비(似而非), 말뜻은 ‘비슷하지만 틀린 것’이죠. 영어의 ‘pseudo-’에 대응되는 말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pseudo religion’이라고 하지요. ‘가짜’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사이비'란 말은 『맹자(孟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편에 수록된 말입니다. 孔子曰: 惡似而非者(공자왈: 오사이비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을 싫어한다." 출처: 다락원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darakwonchild) 이 언급의 자세한 맥락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세요( 사이비-나무위키 ). 겉만 그럴 듯하고 속은 빈 경우를 말합니다. 사이비란 말은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말하는 맥락에서 많이 쓰이게 되면서 애초 의미에서 '거짓 가르침'으로 변하였습니다(사이비과학, 사이비종교 등등). 이단(異端), 말뜻은 ‘끝이 다르다’이고, 의미상으로 ‘사이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집주』의 주자주(朱子註) 중 '맹자는 양주와 묵적과 같은 이단에게서 유교를 지켰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유교의 맥락에서 '이단'의 대표주자는 '양주와 묵적'입니다. 양주는 '위아설'(나만 위하면 돼), 묵적은 '겸애설'(모두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라)로 이야기됩니다. 유가들이 곡해해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가르침'으로 평가되는 것이지, 그리 허무맹랑한 가르침은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참고: 양주(전국시대)-나무위키 ...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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