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4.5)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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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종교학 공부인으로서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위로의 언어는 일본인들에게 향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일본 신화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 이야기가 근사하게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 울림을 줄 것이라는 게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종교나 신화의 기능을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재난을 설명하던 신화와 전설
지진을 어떤 초자연적 존재의 의도적 행위의 결과로 상상할 수 있을까요? 지금에 와서는 그런 신화적 설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지구 내부 물질의 움직임과 지각의 이동으로 지진을 이해할 수 있는 시대니까 말이죠. 그런 지질학적 이론이 등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왜 지진이 벌어지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유를 모르는 자연 현상’을 겪으면서도 나름의 이유를 찾아냈습니다.
땅 속에는 커다란 메기가 사는데, 그것이 꿈틀 움직이면 땅 위에서 지진이 벌어진다.
에도 시대 일본인들이 지진을 다스리는 주술적 의례를 수행하면서 이러한 관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하죠(18세기 이전에 이런 메기 신화가 일본에 없었다고 합니다. 참고: Namazu). 그 기록을 ‘나마즈에(鯰絵, なまずえ)’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나마즈에'는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메기 그림’입니다. 이 메기 설화를 바탕으로 〈스즈메의 문단속〉의 미미즈라는 존재가 창조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ピクシブ百科事典의 ミミズ(すずめの戸締まり)). 물론 미미즈를 만든 결정적 출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かえるくん、東京を救う)』라고 하죠(지진을 일으키는 존재로서 '미미즈(지렁이)'가 그려졌습니다).
'나마즈에'는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메기 그림’입니다. 이 메기 설화를 바탕으로 〈스즈메의 문단속〉의 미미즈라는 존재가 창조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ピクシブ百科事典의 ミミズ(すずめの戸締まり)). 물론 미미즈를 만든 결정적 출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かえるくん、東京を救う)』라고 하죠(지진을 일으키는 존재로서 '미미즈(지렁이)'가 그려졌습니다).
일본인들만 지진과 관련된 초자연적 존재를 상상했던 것은 아니라고 하죠. 인도에서는 거대한 코끼리, 그 아래에는 더 거대한 거북이가 지구를 지탱하는데, 이 동물들이 피곤해서 몸을 움직이면 지진이 난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메기가 해일을 일으킬 수도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주로는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참고: 밀물썰물설화)
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에 의해서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세이돈처럼 지진을 일으키는 신적 존재를 상상한 곳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뉴질랜드에서는 루아우모코(Rūaumoko), 아즈텍에서는 테페욜로틀(Tepeyollotl)을 말합니다. 이들은 화산의 신이기도 합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로키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지진이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지진을 일으키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상상력이 일반적인 이유는 인간이 원인을 잘 모르는 사건에서 모종의 인과관계를 상상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 이면에 의도(마음)를 지닌 어떤 존재를 상상하는 식이죠. 그 존재의 어떤 의도 때문에 자연현상(지진 등의 재해)이 벌어진다고 설명하는 게 인간에게는 너무 쉽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뇌가 자동적으로 그런 상상을 만들어 내 주는 특성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지질학이 발달하면서 그러한 신화는 그저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메기 이야기’도 그런 것이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비한 행위자에 의해서 자연 현상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뇌가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cf. “The Cognitive Psychology of Belief in the Supernatural” ).
- 일본 신화와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일본의 변형된 신화가 그 세계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메기는 미미즈(지렁이)가 되고 메기의 몸부림을 다스리는 카시마대명신은 토지시(閉じ師)가 되고, 카나메이시(要石/かなめいし)는 다이진과 사다이진으로 그려졌습니다.
이야기의 출발지 미야자키현, 주인공의 이름(岩戸鈴芽/いわと すずめ, 이와토 스스메)도 일본 신화를 참조해서 선택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사노오(일본 신화 속 ‘로키’ 같은 존재)의 난동으로 누나 아마테라스신이 숨은 곳(아마노이와토, 天岩戸)이 이 지역(미야자키현의 타카치호초에 있는 동굴)이라고 하고, 태양이 사라져 곤란해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아마테라스를 끌어내는 역할을 한 여신 아메노우즈메(天鈿女命)의 이름을 따서 주인공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요(성 이와토는 아마노이와토에서, 이름 스즈메는 ‘아메노우즈메’에서).
우리에겐 낯선 이야기들이긴 합니다만, 일본인들에게는 꽤나 익숙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어른들 한정일지도 모릅니다만).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모르더라도 지진에 고통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해 보면,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서 발생하는 지진을 막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따라갈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 지진과 신화의 만남을 통해 ‘저 세상’과 ‘망자들’을 생각하기
저도 보면서 큐슈의 미야자키현이나 시코쿠의 에히메현 지진은 몰랐지만, 고베(1995년)와 도쿄(1923년)의 대지진은 알고 있던터라 과거에 지진이 벌어졌던 곳들을 돌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카나메이시(요석/다이진)를 건드리면서 풀려난 다이진이 장난을 치는 형식으로, 지진을 일으키는 존재(미미즈)를 폐허에 남은 ‘뒷문’(後ろ戸/うしろど)으로 빠져나오게 하여 큰 지진이 있었던 곳들에서 다시 지진이 일어날 위험이 생기고, 주인공이 이를 수습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습니다.
신카이 감독은 일본 신화를 활용해서 과거 지진이라는 재난 속에서 유명을 달리한 많은 망자들을 ‘기억’하는 서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폐허의 뒷문이 지진이 있었던 ‘그 때’를 떠올리게 하는 문들이었습니다. 도쿄의 뒷문은 100년 전의 문이었고요. 그리고 문을 닫기 위해서 주문을 욀 때,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과거 지진 피해가 있었던 고베에서 도쿄로 사건의 장소가 변해가면서 종착역이 3.11 동일본 대지진이 벌어진 곳(도호쿠 지방)일 것이란 걸 누구나,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감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때쯤 눈치를 챘던 것 같습니다. 스즈메는 동일본 대지진의 생존자이고, 다리 셋 달린 의자는 어머니의 유품이자 그 지진으로 인한 상실의 아픔을 상징화하는 것이란 걸 말입니다. 소타가 변한 그 의자의 다리가 왜 3개인지는 영화에서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만, 이야기의 행간을 보면, 쓰나미에 휩쓸려 부서진 설정이고, 그렇게 지진 피해의 상처를 상징하는 것이란 걸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미래의 스즈메가 전해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설정 오류가 생기는 것 같기는 합니다).
미미즈가 튀어나오는 문 안쪽의 세상에서 영화는 ‘망자’를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세상’이란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 문을 통해서 자연 재해로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사람들, 주인공이 잃어버린 엄마를, 카나메이시가 되어버린 남주를 찾아갈 수 있는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카나메이시가 된 남주를 인간으로 바꾸긴 하였지만, 그곳에서 스즈메가 만난 다른 사람은 죽은 엄마가 아니라 상처입은 어릴 적 자신이었습니다. 그것이 명계로의 여행에서 산 사람들이 얻는 전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굿판에서 망자를 만나는 것도 산 자의 위로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기도 하죠).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얻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인간의 기본적인 신화적 상상력이 고통과 상처의 공유로 이끌어
일본 신화를 몰라도 이 서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별로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험과 재난을 만나 초자연적 존재를 떠올리는 것은 무언가 우리의 본능적 사고방식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니 말입니다. 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서 우리가 당한 재난을 ‘이야기한다’는 게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죠. 우리 뇌의 특성 때문입니다.
메기든 지렁이든 코끼리든 거북이든, 재난을 설명하고, 죽은 자들이 어딘가로 갔으며,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명계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고, 그곳은 산 자들에게는 위험한 곳이고, 그래서 꼭 닫아 놓아야 산 자들의 세계가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간단한 세계관 설정만으로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신화적 이야기는 바로 그런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떠올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신화적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동질적인 사건으로 변화됩니다. 잊혔던 사건과 지금도 생생한 상처로 남아있는 사건이 이런 이야기 속에서 통합됩니다. 개별자들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으로 변환되고, 종국에는 나의 고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자연재해와 같은 사회적 재난의 상처, 그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요?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화적 서사를 통한 위로의 메시지로 이러한 치유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같이 그 상처와 아픔을 공감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누구나 떠올리기 쉬운 ‘이야기’가 그러한 공감을 끌어내는 기본 원동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질 그 시대에 재밌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야만 이런 효과들이 나타날 수 있겠지요. 모두가 몰입할 수 있는 재밌는 ‘쉬운 이야기’ 속에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겠죠. 치유의 시작은 공감과 인정에서부터니까 말이죠. 스즈메가 ‘앞으로 나아갈’(스스무すすむ) 수 있게 된 것도 어머니에 대한 상실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였죠.
- 공감의 한계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는 한국인의 감상은 다소 복잡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지 일본신화가 낯설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가 아직 수습이 되지 않았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 방류 문제가 양국 간의 문제(정부에서는 이미 양해를 한 것 같습니다만, 국민 감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죠)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과거사 문제도 일본인들의 아픔에 동조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벽입니다.
동일본 대지진 때 한국인들은 인류애를 발휘하여 과거사 문제를 덮어두고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고자 했었습니다. 지금도 회자되는 것이 2008년 중국 쓰촨성 지진 때 모인 성금의 10배 이상이 걷혀서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입니다(적십자사 모금 기준). 그런데 거의 동시적으로 일본 네티즌들의 비아냥대는 반응이 전해졌고, 새로 들어선 일본 정부(당시 아베 정부)의 잇따른 조치들로 인해서 일본의 이미지는 다테마에(建前)/혼네(本音)의 이중적 모습으로 더 굳어지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때는 ‘10원도 주지 말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일본 지배 세력이 추구하는 ‘보통 국가 만들기’와 미국의 대중국 방파제로서 일본 키우기가 만나면서 한국인의 역사 인식은 미일의 동북아 패권 전략 상에서 거추장스러운 짐짝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에게서도 그런 인식을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앞으로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 같아 더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역사 문제를 무시하고 건전한 한일관계를 설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학 공부인으로서는 일본인이 일본 신화로 만들어진 판타지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만, 한국인으로서는 공감의 문턱에서 망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인에 감정이입 하기보다는 삶의 고통에 힘겨워하는 동시대의 보편인에 감정이입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삶의 고통과 아픔에 힘겨워하는 현대인이 자기 상처를 보듬고 내일을 희망하는 이야기로 읽는 것이죠.
- 우리의 사회적 재난은 어떤 이야기로 보듬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스즈메의 문단속〉은 제법 근사한 이야기입니다. 자국의 신화로 국가적인 재난을 위로하는 서사를 만들어 낸 셈이니까 말입니다. 이런 영화로 제 마음 속에 떠올랐던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다뤘던 〈귀향(鬼鄕)*〉(2016)입니다. 스즈메도 일종의 무녀(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의 여주들은 모두 ‘무녀’인 것 같습니다)였죠. 〈귀향〉의 여주 중 한 명이 무당이 되는 은경이었습니다. 영화는 1940년대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 이야기와 현대의 새로운 영매가 되는 은경과 위안부로 끌려 갔다가 살아남은 영옥이 영매 은영을 통해서 자신을 위해서 타향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료 정민을 초혼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귀향은 보통 ‘歸鄕(돌아올 귀, 고향 향)’으로 쓰는데, 이 영화 제목은 ‘귀신 귀(鬼)’를 쓴 ‘鬼鄕’이었습니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해서 타향에서 목숨을 잃은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이 영혼으로나마 영매를 통해서 고향에 돌아오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읽을 수 있는데, 감독은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한 영혼이 돌아온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영화는 하나의 굿판이 되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의 고통을 스크린으로 보면서 관객은 어느새 위안부 소녀들의 영혼을 고향에 돌아오도록 하는 굿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굿판에서 무당이 망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것을 보는 것처럼 관객들은 은영을 통해서 정민과 영옥의 만남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굿판에 참여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관객이 위안부 소녀들의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하게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pt5JBjBQJA
인류가 공유하는 직관적인 종교적 상상력(영매를 통한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 그리고 무당과 굿에 대한 문화적 친숙성이 그 시절 소녀들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미안한 마음을 갖고, 그들의 늦은 귀환을 기도하는 마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영화는 힘겹게 만들어졌고, 힘겹게 상영되었지만, 아주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신화, 모두의 신화가 되지는 못한 것이죠. 현재는 그들의 고통이 다시 흐릿해졌습니다. 사회적 인정마저도 위태로워진 느낌입니다.
4.3이 그제였습니다. 국가 폭력에 의한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비극적인 사회적 죽음조차도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4.16이, 5.18이 머지않았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이태원 참사의 죽음은 또 어떨까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문제도 ‘일부 사람들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한국의 사회적 재난이지만, 모두의 고통이 되지는 못하는 현실이 떠오릅니다. 일본의 신화를 통해서 현대의 일본인을 위로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면서, 분열되고 파편화된 우리의 사회적 재난의 상처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그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신화가 필요한 것일까요?
인간의 종교적 특성을 공부하는 자로서 이 질문이 감상의 끝에서 떠오르더군요. 꼭 신화가 문제의 해답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의 인정과 공유를 통해서 사회적 치유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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