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종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질문 중 하나 입니다. 이런 질문이 제기되면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뭔가 시대착오적인 질문 같은 느낌입니다. 믿음의 문제가 사실의 문제로 오인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안될과학〉에서 '귀신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명'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HgA0Xlzdko당연한 결과를 확인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귀신(죽은 자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실험의 가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질이라는 것이고, 물질이라면 질량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도 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 가정이 틀렸다'고 하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 속 상상으로 떠올리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합니다. 페가수스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페가수스가 존재했는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페가수스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던져지지 않는다, https://www.techm.kr/news/articleView.html?idxno=86781
그러나 신이나 귀신, 유령,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늘 '존재한다, 아니다'라는 논란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너무 확신에 찬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분명 영적 존재나 사후 세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상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의도적 상상과 직관적 느낌의 차이
신이나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은 그 사람들이 '무지몽매'해서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신이나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뒷받침해 주는 건 아니고, 그런 대상들의 존재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페가수스 같은 상상의 동물, 기괴한 모양의 요괴들은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상상한 결과물들입니다. 그림이나 영화 속 외계인의 모습도 그런 것입니다.
영화 속 외계인들
물론 신들이나 귀신, 유령의 모습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집니다만, 그렇게 그려지기 이전의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의도적 상상이 아니라 우리 뇌의 오작동 혹은 인지 편향 때문에 생깁니다. 어두운 곳에서 유령이나 귀신 같은 존재를 떠올리는 게 그런 인지 작용의 결과로 이야기됩니다. 불확실성이 높은 어두운 곳(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곳 등)에서 사람들은 과도하게 '어떤 존재가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고, 그런 의식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고 합니다.
또 뇌의 정보 처리 특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정확한 정보가 주어지더라도 우리 뇌에서는 이를 보정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로 바꾸어 줍니다. 이런 특성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례가 '몬더그린'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주로 외국어)을 익숙한 말(자국어)로 듣게 되는 착각을 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cipk8gsm_4청각적 정보만이 아니라 시각적 정보 처리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잘 확인됩니다.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42698908003039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a 이미지는 b로도 c로도 인식될 수 있습니다.
https://www.frontiersin.org/articles/10.3389/fnhum.2012.00051/full
이 그림에서도 A와 C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형태가 다르게 지각될 수 있습니다. 모호한 정보에서 특정 정보를 잘 읽어내는 경향은 사람마다 조금 편차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C에서 할머니를 더 잘 보고, 어떤 사람은 소녀를 더 잘 봅니다.
'옷 색깔 논란'도 비슷한 사례입니다. 착시 효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누가 맞느냐로 뜨겁게 논쟁이 벌어졌었지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248700#home
어떤 사람들은 '흰금'으로 보고 어떤 사람들은 '파검'으로 봤습니다. 실제 의상의 색은 '파검'으로 확인되었습니다(참고기사). '흰금'으로 본 사람들이 '착시'를 일으켰다는 결론입니다. '흰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아마 이런 결론이 납득 불가일 겁니다. 뇌에서 보정해서 그렇게 인식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정말 '흰금'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신, 귀신 같은 존재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뇌가 그런 인식 결과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존재의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의 현실 감각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정말 그렇게 봤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필요의 맥락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모두 '사실'이 되지는 못합니다. 애닐 세스라는 신경과학자는 '현실성'이라는 게 뇌과학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Anil Seth의 TED 강연의 한 장면
우리의 환각에 우리가 동의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전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뇌에서 만들어 내는 현실 지각이라는 것이 '환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환각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뇌에서 우리 몸을 통해서 들어온 감각 정보를 '그럴 듯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이 거쳐진 그런 정보라는 점에서 '환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의 옷 색깔 사례에서 '파검'이 특정 조명 조건에서 '흰금'으로 인식되게 만드는 효과입니다. 그 사례는 일부 사람들의 착각으로 치부될 수 있겠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착시 사례는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0%A9%EC%8B%9C
배경을 지우지 않는 이상 A와 B는 다른 색으로 보입니다(실제로는 같은 색입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은 물리적 현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뇌가 초자연적 존재(신, 영혼, 귀신 등)와 초자연적 세계(사후 세계 등)를 '잘' 떠올리게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사람들이 공유할 때, 초자연적 존재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잘 퍼질 수 있습니다.
어두운 환경, 위험한 상황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죽음'을 표상하는 초자연적 존재의 모습은 너무 현실감이 있었을 겁니다.
'죽음의 무도회', 흑사병이 창궐한 유럽에서 등장한 회화의 한 장르, https://sleeping-gypsy.tistory.com/249
귀신, 유령, 언데드 등이 죽음을 의인화한 존재로 여겨지긴 합니다만, 옛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은 친족이나 마을 사람 같은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이승에서 미처 풀지 못한 한을 품은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무언가 미련을 갖거나 미안함을 갖게 되는 경우였습니다.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들'의 한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V1xHZ82NiRM&t=334s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아이를 둔 부모가 아이를 그리워하며 아이가 사후 세계에서만이라도 평안하기를 절실히 바라는 심정을 우리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아이의 '영혼'과 그 아이가 사는 '세상'은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누구도 그런 초자연적 존재와 세계를 떠올리는 마음을 '착각'이나 '값 싼 위로를 위한 망상'이라고 폄하할 수 없을 겁니다.
신, 영혼, 귀신, 사후 세계는 인간의 인지 방식의 특성, 살아가기 위한 필요, 사람들의 공감 속에서 '현실성'을 갖습니다. 물리적인 실재로서가 아니라 보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생존 본능과 관련되기에) 마음 속에 '그려내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문제가 아닌 필요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 영혼, 귀신, 사후 세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그래서 그 존재 규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의 필요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연구들이 점차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구는 과학의 언어로 종교를 말살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종교의 세계가 왜 필요한지, 그것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1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 ∞∞∞ ─── 미신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그게 무엇이냐 물어 본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들이나 관념을 이야기합니다. 뇌과학자 정재승 선생님도 미신 이야기를 하면서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행위가 불길하다는 미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정재승 편 미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할 때, 이렇게 미신에 속한 것들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시험 볼 때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시험 볼 때 포크를 선물한다' '손 없는 날 이사해야 한다' '밤에 손톱을 깎으면 안 된다' '귀신을 쫓기 위해서 팥죽을 먹는다' 그럼 '미신'은 어떤 것이냐 설명해 보라면, 아마 이런 말들을 늘어 놓게 될 겁니다. https://engoo.co.kr/blog/먼나라이웃나라-세계-각국의-다양한-미신들/ 표준국어대사전에 바로 그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미신' 항목 그런데 이런 개념은 일상에서는 그런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쓸 수 없는 설명입니다.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게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경제적 판단과 믿음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관상은 과학이다', 'ABO 혈액형 성격론', '과시적 소비' 등등. 어떤 종교적 맥락에서 '이상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미신'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종교와는 다른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위 국어사전의 개념 정의는 종교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신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어딘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미신'은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시하는 많은 개념은 편견의 산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서 그런 게...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5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본래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 ∞∞∞ ─── 미신, 사이비, 이단 이 말들은 종교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입니다. 미신은 종교적 의식(儀式)이지만, 종교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비과학적인 믿음을 통칭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이비(似而非), 말뜻은 ‘비슷하지만 틀린 것’이죠. 영어의 ‘pseudo-’에 대응되는 말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pseudo religion’이라고 하지요. ‘가짜’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사이비'란 말은 『맹자(孟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편에 수록된 말입니다. 孔子曰: 惡似而非者(공자왈: 오사이비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을 싫어한다." 출처: 다락원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darakwonchild) 이 언급의 자세한 맥락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세요( 사이비-나무위키 ). 겉만 그럴 듯하고 속은 빈 경우를 말합니다. 사이비란 말은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말하는 맥락에서 많이 쓰이게 되면서 애초 의미에서 '거짓 가르침'으로 변하였습니다(사이비과학, 사이비종교 등등). 이단(異端), 말뜻은 ‘끝이 다르다’이고, 의미상으로 ‘사이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집주』의 주자주(朱子註) 중 '맹자는 양주와 묵적과 같은 이단에게서 유교를 지켰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유교의 맥락에서 '이단'의 대표주자는 '양주와 묵적'입니다. 양주는 '위아설'(나만 위하면 돼), 묵적은 '겸애설'(모두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라)로 이야기됩니다. 유가들이 곡해해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가르침'으로 평가되는 것이지, 그리 허무맹랑한 가르침은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참고: 양주(전국시대)-나무위키 ...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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