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어디에 새겨져 있었을까?

※이 글은 얼룩소 글(23.5.7)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ΓΝΩΘΙ ΣEΑΥΤΟΝ'[gnōthi seauton/그노시 세아우톤]이란 글귀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정확이 어디에 새겨져 있었을까요? 델포이 신전 입구의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거나 그냥 입구에 새겨졌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느 위치를 말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 해당 유적이 거의 무너져 있으니 확인할 수가 없어서 그렇겠지요.

https://www.tripsavvy.com/temple-of-apollo-delphi-complete-guide-4172549

신전 전면의 페디먼트(pediment)나 프리즈(frieze)에 쓰여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만, 옛 사람들은 다른 곳을 말했습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기원전 1세기)는 신전 입구 쪽의 기둥(column)이라고 하고, 또 파우사니아스(110-180)는 프로나오스(pronaos)에 쓰였다고 했으며, 마크로비우스는 입구문의 문설주에 쓰였다고 봤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의 고대 주석자는 신전의 입구(propylaea)에 새겨져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기둥(column)은 유적으로도 많이 봤기 때문에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문설주도 알 수 있습니다만, 나머지는 그리스 신전 건축 양식을 알아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건축 양식 (출처: https://www.khanacademy.org/humanities/ancient-art-civilizations/greek-art/beginners-guide-greece/a/greek-architectural-orders)

페디먼트는 전면의 지붕을 지탱하는 삼각면 박공(gable)을 말합니다. 위 그림에서 이오니아식(Ionic order)의 맨 위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https://study.com/learn/lesson/what-is-a-pediment-in-architecture.html

프로나오스는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 문 앞의 공간을 말합니다.

https://www.glosarioarquitectonico.com/glossary/pronaos/

프로필라리아(propylaea)는 신전 앞의 입구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ropylaea

프로필레움(propylaeum)은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신성한 울타리의 입구에 있는 현관 또는 문간으로, 일반적으로 실제 문 안팎에 기둥으로 지탱된 현관으로 구성됩니다. 가장 유명한 프로필레움은 므네시클레스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기원전 437년에 시작)의 대현관으로 설계한 것입니다.

프로필라리아라는 이름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지어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스타일의 다양한 기념비적인 관문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뮌헨의 프로필리엔Propyläen(1862)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1784)이 대표적입니다. - Propylaeum┃Britannica

이런 곳들 외에 우리가 익숙하게 글귀가 적힌 곳으로 보는 곳은 프리즈(frieze)입니다. 위의 두 번째 그림의 이오니아양식에서 말이 그려진 부분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의 라틴어 버전(nosce te ipsum)이 프리즈(frieze)에 쓰인 건축물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바로 스페인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입니다.

마드리드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ia)의 전면 모습, https://anatomiaefisioterapia.com/2019/10/10/conhece-te-a-ti-mesmo/

이 중에 어디에 쓰였을까요?

페디먼트는 통상 그냥 벽으로 되어 있던지, 파르테논 신전처럼 부조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스페인 박물관처럼 프리즈에 쓰는 건 최근 경향인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이곳에 글자를 새기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경구들이 6보격(hexameter)*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아마 유명한 3개의 격언('너 자신을 알라', '과하게 하지 말 것', '보증은 파멸을 가져온다')이 한 줄에 쓰였다는 것이겠죠.
*보격은 '시행(詩行)의 운율 형태의 하나로 시의 리듬을 생성해 내는 규칙적인 강세의 배열 형식'을 말합니다. cf. 서구시의 기본운율, Hexameter (ex. So rich | and fair | a vale | in for | tuning | to wed.)

신전의 프로필라리아의 기둥 아니면 프로나오스의 벽과 기둥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델피 신전에는 별도의 프로필라리아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앞쪽의 구조물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아래 그림 ①).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포함한 고고유적지 도면 중 아폴론 신전, https://ko.wikipedia.org/wiki/아폴론_신전

많은 사람들이 이 글귀가 쓰인 곳을 프로나오스(위 그림 ②, 그 안의 벽과 기둥 혹은 문설주)로 보고 있습니다(cf. Maxims from the Delphic Oracle, The Forgotten Delphic Maxim). 이를 아주 간접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하나가 있습니다. 이 경구와 함께 쓰였다고 하는 델포이 신전의 상징 'E(엡실론)'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와 다른 두 경구('과하게 하지 말 것', '보증은 파멸을 가져온다')가 같이 아폴론 신전 입구에 쓰였다고 하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이와 함께 델포이 신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E'도 함께 쓰였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저도 관련 자료를 보면서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문양을 담고 있는 고대 주화가 알려져 있습니다.

파우스티나 황후 기념 주화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기념 주화 속 델포이 신전의 'E', 이미지 출처: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3576039089095158&set=p.3576039089095158&type=3

전면 기둥 사이에 표시된 것으로 볼 때, 당시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서 3개의 경구와 'E'가 입구 문이 있는 프로나오스에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문 위던지, 문 양 옆의 기둥이나 벽에 새겨져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추가 참고자료
Delphic maxims
Propylaia (Acropolis of Athens)
THE E OF THE TEMPLE AT DELPHI
Wilkins, Eliza G. (1929). The Delphic Maxims in Literature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위로가 없는 '차가운 종교학', Science of Religion을 생각하며

※이 글은 얼룩소 글(23.7.13)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라는 주제를 다루려면 '위로'가 필요하다? 이 말을 저는 곳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정재승 박사가 총괄자문 및 프리젠터로 참여한 다큐 시리즈 '뇌로 보는 인간'의 마지막 '종교' 편에 제가 자문으로 참여하여 아주 짧은 시간 출연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시청률이 높았던 편이 아니라서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우연히 EBS 다큐를 보던 친구가 '야, 너 나왔더라...잠깐 ㅎㅎ', 이런 반응을 보인 예가 있었을 뿐입니다. 함께 자문에 참여한 구형찬 박사(인지종교학)가 종교학자로서는 메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뇌로 보는 인간' - 종교 편의 한 장면┃저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그때 나왔던 미디어 비평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스 기사 캡쳐 해당 다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다음에 이런 논평을 내 놓았습니다. 미디어스 관련 기사 '위로가 없다'는 비판 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종교라는 주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종교의 본질', '참된 의미' 같은 것을 발견하고, 뭔가 진리의 말씀이나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종교학도 존재합니다. '현대인의 종교는 병들었다'는 진단을 내리며 '고대인의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거나 모든 종교에 담겨있는 가장 고귀한 가르침(가령 황금률 같은)은 모두 상통하고 그것이 인간이 향유해야 할 소박하지만 분명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예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출처: Wikimedia Commons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 뮐러는 '종교학으로의 초대(Introduction to the Science ...

"뇌 회로는 친숙한 것, 중요한 것과 단순한 배경을 식별합니다."(논문 정리)

흥미로운 신경과학 연구 소개를 봤습니다. 친숙한 것과 중요한 것을 먼저 식별하는 뇌 경로에 관한 연구입니다. '신경종교학'에 참고가 되는 논문일 것으로 판단되어,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  *  * Brain Circuit Identifies What’s Familiar, Important, or Just Background┃Neuroscience News.com 요약 : 과학자들은 기억과 감정을 통합하여 감각 정보를 빠르게 평가하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뇌 회로를 발견했습니다. 내측후각피질(entorhinal cortex)과 해마(hippocampus) 사이의 이 직접 피드백 루프를 통해 뇌는 중요한 광경과 소리를 거의 즉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알려진 더 느린 경로와 달리, 이 회로는 관련 자극과 배경 소음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PTSD와 자폐증과 같은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발견은 뇌가 정보를 걸러내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감각 및 기억 관련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 ───  익숙한 것을 한눈에 알아보는 뇌 회로, 해마의 비밀 우리는 왜 친숙한 얼굴이나 물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처음 보는 것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런 능력 뒤에는 우리의 기억 이 큰 역할을 합니다. 뇌의 해마(hippocampus)라는 부분이 과거의 기억을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 들어오는 감각 정보와 비교하여 이것이 익숙한지 새로운지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해마는 “이건 예전에 봤던 거야” 혹은 “처음 보는 거네”라는 신호를 뇌의 다른 부분에 보내 우리의 인식을 조절합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중요한 새로운 정보 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미 아는 것은 배경 소음처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해마는 특히 대뇌피질의 한 부분인 내후각 피질 (entorhinal cortex)과 긴밀히 소통합니다. 내후각 피질은 오감에...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은 많다?│시간과 종교적 본능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