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룩소 글(23.5.15)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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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델포이에서 아폴로는 테미스를 쫓아냈나?)에 이어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옴파로스에서 나온 E Γã(E Ga[Ge])를 근거로 아폴로 신앙이 들어오기 전 그리스 전역에 퍼져있던 대지모신(가이아 혹은 테미스)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고, 아폴로가 이를 대체했지만, 대지모신의 심볼은 재활용되면서 델포이 신전의 상징으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베이츠의 가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출발점이 된 옴파로스가 과연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인지, 새겨진 문자를 과연 E Ga로 볼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20세기 중반에 새로운 가설이 제시되었습니다. 그 주장이 맞다면 베이츠의 가설은 기초가 무너지면서 E의 비밀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옴파로스에서 나온 E Γã(E Ga[Ge])를 근거로 아폴로 신앙이 들어오기 전 그리스 전역에 퍼져있던 대지모신(가이아 혹은 테미스)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고, 아폴로가 이를 대체했지만, 대지모신의 심볼은 재활용되면서 델포이 신전의 상징으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베이츠의 가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출발점이 된 옴파로스가 과연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인지, 새겨진 문자를 과연 E Ga로 볼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20세기 중반에 새로운 가설이 제시되었습니다. 그 주장이 맞다면 베이츠의 가설은 기초가 무너지면서 E의 비밀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 델포이의 여러 옴파로스
베이츠 가설의 토대가 된 쿠르비(Courby)의 주장[돌은 기원전 7세기 이전 것이고, 새겨진 문자는 E Ga이다]을 강력하게 부정한 장 부스케(Jean Bousquet)는 작은 옴파로스의 재질, 덧붙여진 성분, 부속 물건(칼) 등에 주목해서 이 돌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이 문제를 살피기에 앞서서 델포이 신전의 옴파로스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옴파로스'로 불리는 게 한 두 개가 아니거든요.
'옴파로스'는 그리스말로 '배꼽'을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세상의 중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옴파로스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신화적 이야기로 이렇게 표현되었다고 하지요. 어느 날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알아보기 위해 세상의 양 끝에서 각각 독수리를 날렸고, 독수리는 똑같은 속도로 서로를 마주 보고 날아 왔고, 델포이 상공에서 서로 교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우스가 지구의 중심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곳에 돌덩어리를 놓았고, 그것이 우리가 옴파로스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주의 중심', '지구의 중심' 같은 관념은 통상 한정된 지리 인식에 기초한 '자기 중심 만들기'의 산물입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곳에서 '중심'을 찾는 것은 인도, 중국, 호주(우룰루) 등에서 대표적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 모든 나라들에서 벌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옴파로스는 델포이의 신탁과 관련해서 특별한 기능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이야기를 풀어내 보겠습니다. 아무튼 옴파로스와 관련된 신화적 이야기는 외려 대지모신 신앙과의 관련성을 더 부각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래도 그리스의 지질학적 특성과 관련이 될 것 같습니다(지진). 그 이야기는 또 따로 하고요. 다시 델포이의 옴파로스'들'로 시선을 돌려 보죠.
지금 우리가 델포이의 옴파로스를 찾으면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옴파로스와 델포이 유적지에 놓인 옴파로스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델포이의 옴파로스 원본은 아폴로 신전 남서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에 있고, 모조품은 델포이 신전 남쪽으로 50여 미터 떨어진 아테네인의 보물 창고 앞에 놓여 있습니다. 모조품은 애초 원본 옴파로스가 발견된 위치에 놓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아폴로 신전에 실제 옴파로스의 위치는 아디톤(Adyton)이라고 불리는 신전의 가장 안쪽 공간에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아래 그림의 X위치).
베이츠의 논의에서 주목된 옴파로스(그림3 좌)와 지금 옴파로스의 원본으로 알려진 것(그림1 좌)은 상당히 다르게 생겼습니다. 이 두 옴파로스는 1949년까지 델포이 박물관에 그림3 우(右)와 같은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작은 옴파로스가 더 고대의 것이고, 큰 것이 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만, 지금은 아래 것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49년 이후 작은 옴파로스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치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 작은 옴파로스는 옴파로스가 아니다?
장 부스케(Jean Bousquet)는 1951년 "델포이의 '고대 옴파로스'에 관한 고찰"을 발표해서 베이츠 논의에서 출발점이 된, 옴파로스가 옴파로스가 아니며 새겨진 글자도 쿠르비가 읽었던 E Γã(E Ga)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돌 자체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돌의 표면에 보이는 흰색의 치장 벽토가 기원전 4세기의 것이 아니고, 카스트리 지역의 벽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씨멘트'라고 부르는 것이 사용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은 것라고 봤습니다.
돌의 표면을 세척하고 보니 쿠르비 및 베이츠가 봤던 'E Γã(E Ga)'가 아니라 'ΠΑΠΑΛΟΥ(Papalou)'가 쓰여 있다고 봤습니다. 그는 이를 'Papaloukas(파팔루카스)'라는 카스트리* 지역 사람 이름의 축약형이라고 설명합니다.
*Kastri라는 마을이 자리잡으면서 델포이는 한 동안 '카스트리'로 불렸는데, 1890년 카스트리 마을이 발굴을 위해 이전 되면서 이 지역은 다시 델포이라는 이름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카스트리 마을 사람은 Kastriote로 씁니다(cf. Delphi┃Britannica).
한편 작은 옴파로스의 단면을 보면 가운데에 구멍이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칼이 하나 꼽혀 있었습니다.
부스케는 이 구멍과 꽂혀 있던 칼을 면밀히 관찰하여, 칼에 1860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과, 19세기 말에 그 지역에서 쓰인 칼과 비슷한 것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이 돌덩어리가 카스트리 지역의 벽이나 건물 수리에 사용된 것이라고 추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델포이 신전의 아디톤(지성소) 위치에서 발굴될 수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 지역의 갖은 풍파를 고려할 때 벽이나 건물의 돌이 신전 재건 등에 섞여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봅니다.
부스케는 최종적으로 작은 옴파로스가 옴파로스가 아니라 길가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정교회의 작은 성소인 프로스퀴니타리(προσκυνητάρι)의 돔이였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작은 옴파로스의 구멍은 그 돔 꼭대기에 십자가를 꽂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프로스퀴니타리(Proskinitari)는 예배하다(προσκυνέω/proskineo)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 첫 번째 의미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복음서나 성인의 아이콘(성화나 성상)을 놓는 가구입니다. 예배자들은 이곳에 놓인 복음서나 아이콘을 향해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성자의 아이콘이 놓인 작은 신전 같은 구조물을 뜻합니다. 실제로 '작은 신전'(small shrine)으로도 불립니다. 혹은 'iconostasis'로 불리기도 합니다. 부스케가 말하는 프로스퀴니타리는 두 번째 의미인 것이죠.
부스케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Kastri라는 마을이 자리잡으면서 델포이는 한 동안 '카스트리'로 불렸는데, 1890년 카스트리 마을이 발굴을 위해 이전 되면서 이 지역은 다시 델포이라는 이름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카스트리 마을 사람은 Kastriote로 씁니다(cf. Delphi┃Britannica).
한편 작은 옴파로스의 단면을 보면 가운데에 구멍이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칼이 하나 꼽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델포이 신전의 아디톤(지성소) 위치에서 발굴될 수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 지역의 갖은 풍파를 고려할 때 벽이나 건물의 돌이 신전 재건 등에 섞여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봅니다.
부스케는 최종적으로 작은 옴파로스가 옴파로스가 아니라 길가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정교회의 작은 성소인 프로스퀴니타리(προσκυνητάρι)의 돔이였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작은 옴파로스의 구멍은 그 돔 꼭대기에 십자가를 꽂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프로스퀴니타리(Proskinitari)는 예배하다(προσκυνέω/proskineo)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 첫 번째 의미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복음서나 성인의 아이콘(성화나 성상)을 놓는 가구입니다. 예배자들은 이곳에 놓인 복음서나 아이콘을 향해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성자의 아이콘이 놓인 작은 신전 같은 구조물을 뜻합니다. 실제로 '작은 신전'(small shrine)으로도 불립니다. 혹은 'iconostasis'로 불리기도 합니다. 부스케가 말하는 프로스퀴니타리는 두 번째 의미인 것이죠.
부스케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 프로스퀴니타리(작은 성소)의 돔으로 사용 된 구조물이 나중에 카스트리 지역(델포이의 옛 이름)의 벽이나 건물 수리에 사용되어 그 일부가 되었다가 산사태 또는 마을 철거 중에 어떻게든 사원의 셀라(cella)로 들어갔다. 20세기 초 이 돔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작은 옴파로스'로 여겨졌던 것이다.
아주 오래된 역사 유적에 후대 사람이 낙서를 해 놓았는데, 나중에 고고학자가 그 낙서를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잘못 상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과연 베이츠의 가설은 틀린 것일까요? 요즘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참고자료
Bates, William Nickerson, 1925, "The E of the Temple at Delphi,"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29(3): 239–246.
Bousquet, Jean, 1951, "Observations sur l'« omphalos archaïque » de Delphes," Bulletin de Correspondance Hellénique 75: 210-223.
Zeilinga de Boer, Jelle, 2007, “Delphi’s Small “omphalos”; An Enigma,” Syllecta Classica 18 (1): 81–104.
Hodge, A. Trevor, 1981, "The Mystery of Apollo's E at Delphi,"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85(1): 83-84.
Hulbert, Homer B., 1902, "Korean Folk-Tales," Transactions of the Kore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2: 45-79.
Noegel, Scott B., 2006, "Greek Religion and the Ancient Near East," The Blackwell Companion to Greek Religion, ed. by Daniel Ogden, London: Blackwell, 21-37.
Delphi┃Britan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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