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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 장난과 빙의의 관계 │ 놀이와 주술적 사고의 관계

※이 글은 얼룩소 글(23.4.1)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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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bc.co.uk/teach/school-radio/primary-school-assemblies-collective-worship-ks2-april-fools-day/z9ttxbk

전에 쓴 "핼러윈, 크리스마스, 만우절의 공통점"이라는 글에서 만우절이 신년 의례였다는 것을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만우절과 관련된 내용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만우절은 봄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는 관습의 산물로 보인다.
  • 서구의 ‘만우절’은 16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신년 첫 날을 1월 1일로 정리하면서(Édit de Roussillon, 1564) 공식 신년 기념일과 지방의 관습이 어긋나게 된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명하다.
  •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각 지역 신년 기념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디는 크리스마스(12월 25일), 어디는 3월 25일, 어디는 부활절이었다.
Édit de Roussillon이 반포될 때 프랑스 지역별 신년 기념일. 지도 구글맵, 자료 'Edict of Roussillon', Wikipedia.com
  • 4월 1일은 3월 25일에 시작하는 춘분 축제와 관련된 날짜다. (캘린더의 1일은 시간의 시작일로 적합하다. 1주일의 축제가 끝나면 4월 1일이 된다. 동지 축제가 시작되는 12월 25일에서 일주일 쯤이 흘러 1일이 시작되는 날은 1월 1일이다. 참고: 천문학적으로 의미가 없는 1월 1일은 왜 새해 첫날이 되었을까?)

  • 1월 1일을 신년 첫 날로 정하면서, 4월 1일은 신년으로서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 유럽의 다른 신년 축제 때, 장난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중세 크리스마스 때 '바보들의 축제'. 참고: 기독교 시대의 크리스마스도 연말 잔치 느낌)
  • 만우절을 특징짓는 ‘장난’, ‘농담’, ‘악의 없는 거짓말’ 등이 여러 신년 의식에서 나온 행동 양식과 비슷하다.
  • 만우절 장난은 액막이 행동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만우절 장난이 액막이 행동과 관련된다'라고 하면, 당장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어떻게 장난이 액막이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거냐'라고 의문을 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과거 글에 이어서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연말·신년 축제적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떠들썩한 잔치'의 풍경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1659년 보스턴에서의 크리스마스 금지 행동과 벌금 공고문을 소개했었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공고

신을 크게 불명예스럽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다른 집단에서 미신적으로 지켜지는 그러한 축제를 일부 사람들이 여전히 수행함으로 인해 이 관할권 내의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

이 법원과 당국은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고, 축제 또는 기타 방법으로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을 준수하는 것이 발견되는 사람은 누구나 5실링의 벌금을 카운티에 지불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1659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이 공고로부터 2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떠들썩한 잔치의 풍경은 기독교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로 신을 믿는 사람들--신학자, 목사, 사회 지도층 등에게) "불쾌감"을 주는 "미신적으로 지켜지는" 행동들이 빈번하게 발생했었다는 것입니다.


  • 시간이 나뉘는 때에는 유령과 귀신이 출몰한다

이런 '장난', '농담', '객기 부리기' 등과 같은 행동 방식은 많은 신년 의례(축제)에 동반됩니다. 전에도 비교한 바 있듯이 '핼러윈'의 trick & treat(장난칠까? 대접할래?)이 그렇고 핼러윈의 기원이 된 사우인(Samhain)의 가면극 풍습이 그렇습니다.

핼러윈은 현대에 와서 '코스튬'으로 대표되는 축제일입니다. 그 코스튬은 원래 '죽은 영혼', '귀신', '유령' 등으로 가장하는 관습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우인에서 동물 마스크를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장난치고 음식을 얻어 먹는 풍습이 있다고 하는데, 그 가면극은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 존재들을 흉내낸 것입니다.

시간의 기준점,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그 '전환의 시기'를 사람들은 '귀신이, 죽은 자가 출몰하는 시간'으로 생각했습니다. 멕시코의 '망자의 날'이 그렇고(신년의례 풍속), 북유럽의 '베뜨르네뜨르(vetrnætr/winter night)'가 그렇습니다(겨울 시작일, 다양한 영적 존재에 대한 희생제의가 이루어짐).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봄의 시작인 3월과 4월 그리고 수확기인 8월에서 9월에 '망자의 날'을 기념해 왔습니다. 봄에 조상의 묘소를 단장하는 풍습이 동아시아에 퍼져있습니다. 중국의 청명절, 한국의 한식날, 일본의 춘분의 날(春分の日/しゅんぶんのひ), 오키나와의 시미(シーミー) 등입니다.

가을에도 그렇죠. 우리나 중국의 추석,  일본의 오봉(お盆), 히간(彼岸) 등이 그렇습니다. 이 날에는 '조상에 대한 성묘'가 필요합니다(특히 일본의 '오봉'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일본의 핼러윈 데이'라고 하는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관습의 기저에는 '망자들이 산자들의 세계에 오는 날'이라는 인식이 존재합니다.

유대의 욤 키푸르도 이런 특성을 보이는 날입니다. 유대인 달력에서 가장 성스러운 날로 보통 9월이나 10월에 해당합니다. 주요 초점은 회개와 속죄에 있지만, 추모 촛불을 켜고 Yizkor 기도문('Yizkor'로 시작하는 기도문으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을 암송하여 사망한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기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일부 사례만 살펴봤습니다만, 세계에 이런 풍속은 너무 많습니다.


  • 변화의 위험과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상상

시간이 변하는 시기는 '위험한 시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절기, 시간의 마디와 의례 본능). 인간은 위험을 감지하면 위험을 일으킨 원인에 대한 갖가지 상상을 만들어 냅니다. 명백하게 위험 요소가 확인되는 경우는 정확하게 문제를 인식합니다만, 확인되지 않을 때는 '신', '귀신', '불운', '음모론(누군가의 기획)'을 떠올립니다. 음모론은 간혹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다른 '원인 찾기'는 그저 상상에 머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를 만들기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약간의 불안'을 느끼곤 합니다. '앞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다', '가족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와 같은 소망을 갖기 쉽습니다. 신년 인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appy New Year'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야릇한 불안 속에서 위험을 감지하며, 사회적 삶의 '저주'를 떠올립니다. 누군가에게 잘못했을 때, 그가 저주를 기원하여 액이나 살로 돌아오는 일을 민감하게 떠올립니다. 그러니 '액땜'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들러 붙을지 모를 액을 떼어내야 한 해의 평안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미묘한 불안감 속에서 '액'의 발신자, 매개자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입니다.

발신자는 함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해원─서로의 원한 풀기─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죠. 나에게 기분이 나빴을 친척/이웃에게 선물(음식 등)을 베풀어 그의 '저주'를 피해야 하죠. 죽은 친척/이웃은 그런 면에서 특히 걱정스러운 존재입니다. 토라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희생제의(제사)가 필요해지죠. 기본은 음식 베풀기(먹이기/대접하기)입니다.

자, 우리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당신(영적 존재)에게 대접하니 우리에게 맺힌 게 있더라도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내려 놓아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당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세요.

이런 종교적 의식을 학자들(과거의 전문종교인의 시각을 이어받아)은 교리 종교의 의식과 구분하여 도덕적 감수성이 희박하고, 이기적인 동기만 있다고 말합니다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핵심만 정리하면, '도덕률'이 없더라도 공동체의 갈등을 해소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도덕이니 윤리니 떠들 필요는 없었던 거죠. '법 없이도 살 사람'의 감각 같은 겁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 유교의 효 원리로 정당화가 됩니다만(종교 교리적 설명), 기본적 동기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조상묘 쓰기와 관련된 풍수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나(후손)의 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차례나 제사의 주요 목표도 망자에게 미안함을 표하고, 그의 영향력으로 의례자가 복 받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존재의 보호를 구하는 것이죠.

최근에 한 선배 연구자와 종교 의식의 제물(희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사상에 오르는 물고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기나 북어, 대구 등이 제사상에 오르곤 하는데, 전남 쪽에서는 도미나 민어가 오르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선배의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민어와 도미를 제사상에 놓으면서 '어를 드리니 (저희 후손들) 어 주시고, 미를 드리니 (저희 후손들) 와 주십시오'라고 하시더라..ㅎㅎ

효에 대한 감이 없는 통속적 수준을 드러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게 우리가 행하는 제사의 현실입니다. 우리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제사 잘 드리고 복 받은 사람, https://ncms.nculture.org/ceremonial/story/1490

유교며 효를 동원한 설명은 그러한 행동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그게 '허울'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교리적 설명의 기능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야기할 계획입니다).

유대의 욤 키푸르가 유대교(일신교)의 교리적 체계에서 '속죄일'입니다만, 속죄의 동기는 '축복'에 있습니다. 죄는 저주를 부르고 영적 존재에 의해서 그 저주는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돌아옵니다. 종교 교리적 측면에서는 도덕적인 신의 '처벌'을 통해서 '좋은 상태', '아름다운 상태'(윤리/도덕)로 만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속죄는 실제로는 (표현된 말과는 달리) 도덕적 상태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의 처벌(불운, 액, 살과 같은)을 회피하고, 영적 존재의 보호를 획득하려는 '신 달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왜 '장난'이 '귀신 달래기'와 관련될까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샌 감이 있군요.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만우절의 '장난', '거짓말'이 액막이 행동과 관련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보셨다면 대충 짐작을 하셨을 겁니다. 제사처럼 영적 존재를 '대접하는 행동'과 관련된다는 걸 말입니다.

사우인에서 가면극, 핼러윈에서 코스튬과 'trick & treat'에 답이 숨어 있습니다. 네, '장난치기'는 귀신, 망자의 혼령, 악귀 같은 존재를 '가장', '흉내'낸 '약한 해코지' 같은 것입니다. 불운한 일이 벌어지면, '에잇, 액땜했네'라고 말 하곤 합니다. 이런 의식은 '예방 주사'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방 의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방 의례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은 영적 존재를 가장하여 적은 비용으로 대접하는 연극을 통해서 '귀신 속이기'를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귀신 달래기'의 비용이 바싸다면, '귀신 속이기'가 대안이 될 수 있겠지요.

종교의 신과는 달리 민간신앙 이야기 속에서 속여 먹을 수 있는 어수룩한 초자연적 존재(도깨비, 귀신이나 아랍의 지니 같은 존재 등)를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알라딘 이야기에는 알라딘의 '기지(機智)'로 지니(와 같은 존재)를 속이는 이야기가 나오죠.

우리의 전래 동화에도 '도깨비 속이기'나 '귀신 속이기'가 있습니다. 이런 영적 존재들을 잘 활용해서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http://www.mkhealth.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343

어렸을 때 본 〈옛날 옛적에〉 만화 중에서 시종 귀신을 속여 먹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찾아보니 '오름과 바릇'편이군요.


이 편을 보면, 아이들이 '귀신 역할'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연극의 출발이 이런 주술적 예방 의식에서부터인지도 모르겠네요. 가면이나 가면극에 대해서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구석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도 차후에 풀어내 보겠습니다.

귀신, 가면, 역할극은 왜 현실감이 있었을까요?

빙의죠. 귀신들린 상태. 지금이야 신경생리학적 혹은 심리적 병리 상태('정상과 병리'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하죠. 사회적 생활, 일상 생활을 망가뜨리고 부적 정서를 불러올 때 병리 상태를 논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규정하겠습니다만,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원인'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신이 들기도 하니, '들린 것처럼 가장'하는 것도 반대 방향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된 것이죠.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적 사고방식('주술적 사고방식'이나 '미신적 사고방식'으로 표현되는)은 편하게 이리 튀고 저리 튑니다. 비슷한 말의 형태/소리/의미를 타고 종횡무진합니다. 말 뿐 아니라 행동/현상 등의 특징이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은 여기저기로 널 뛰기 합니다. 언어유희가 그렇듯이요. 그리고 그건 우리 뇌의 정보 처리 구조의 특성과 일치합니다(참고: 미신을 떠올리는 마음).


  • 왜 액막이 행동의 의미는 사라지고 장난스러운 일탈로만 이해되게 되었을까요?

시대/문화적 맥락이 바뀌고, 문화적 기억이 전승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소규모 공동체에서나 '나누어 먹기'와 '떠들썩한 잔치'를 통한 해원과 액땜이 효과적입니다. 국가가 커지고 도덕과 법률이 발달하고, 각 문화 영역이 하나의 시장으로 성장하고(가령 연극), 종교계도 교리 체계가 정비된 종교가 등장하여 민간 풍속을 '미신적'이고, '저속하다'고 폄하하고, 사람들이 강고하게 유지하는 민간 풍속에 그럴 듯한 종교적 의미를 덧붙여서 '종교의 기념일'(욤 키푸르/우란분재/석가탄신일/크리스마스 등)로 전환시키거나 억압하여 사라지게 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사회에 통용되는 '의미론'(사회적 권위를 갖는 설명)이 우리의 본능적인 종교적 관념과 행동에 덮어 씌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왜 이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역사 기록으로 말이죠. 과거에는 그런 의식을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종교와 문자 기록은 종교가 하나의 정치 권력을 획득(지배 권력과의 결합)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 전에는 그저 전통의 이름으로 실천이 될 뿐입니다. 체계화된 종교가 등장하고 일반 풍속은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어야지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4월 1일은 봄의 시작, 한 해의 시작으로 보기도 애매하죠(농경 사회가 아니니까 말이죠). 거짓말과 장난이 허용되는 재밌는 날로서만 명맥이 유지되는 이유입니다. 소비 문화에서 이런 특성은 계속 이 날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어 기억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게 곧 문화적 관성을 만들고, 하나의 기념일로 이 날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날은 장난을 쳐도 되는 재밌는 날'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이 날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죠. 축제의 흔적은 사라졌고, 액막이 행동의 동기도 사라졌습니다만, 현대에도 이야기 거리를 계속 만들기 때문에 여전히 생명력이 있는 기념일이 되고 있습니다.


덧>
1. 만우절의 세시의례적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몇몇 나라들에서 만우절의 장난을 특정 시간(낯 12시)에 딱 끝내야 하는 일로 여기는 바로도 알 수 있습니다. 날짜 변경 기준(하루의 시작과 끝을 몇 시로 하느냐)과 관련이 되어 있으니 시간 제한이 필요한 것이죠.

2. 프랑스에서 만우절은 'poisson d’avril'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4월의 물고기'입니다. 애초 물고기가 사용된 상징적 의미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대의 상상이 이 상징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설명1) 4월 초는 사순절이 끝나는 시기다. 사순절에는 단식을 했으니 단식이 끝난 걸 기념하기 위해 물고기를 선물했다. 진지하게 고행해야 하는 시기가 끝나고 농담도 하고 웃을 수 있는 일상의 날이 돌아온 걸 기념하는 상징적 의미를 물고기가 지니게 되었다고 여겨서다.

설명2) 4월 1일은 어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인데, 이날 집으로 귀가하는 어부들이 웃음거리가 되어 만우절의 상징이 물고기가 되었다.

이를 고대 중동의 풍요 관념과 연관시켜 설명하기도 합니다. 

물고기는 고대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에서 생명과 다산의 상징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성스러운 상징,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쓰였다(익두스ΙΧΘΥΣ).

아마 이쪽 설명이 더 유력할 것 같습니다. 물고기가 풍요의 상징으로 쓰였다고 보는 부분 말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 외려 '차용', '기독교적 전유'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전파'로 볼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북어는 왜 액막이 장식물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액막이 장식물 목록에서 사라진다)'라는 글에서 다루긴 하겠습니다만, 물고기를 풍요의 상징으로 여기는 관념은 세계 여기저기에서 발견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무언가 우리의 직관적 상상력과 물고기의 관계를 고민해 봐야 할 문제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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