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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방언과 빙의는 유사하다

※이 글은 얼룩소 글(23.4.10)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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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방언(方言)'은 '사투리'(dialect)라는 의미와 '신적 존재의 영향에 의해 하게 되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glossolalia)이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통상 '성령이 함께하는 상태에서 하게 되는 말'로 이해됩니다. 과거 그림에는 후광이나 머리 위의 하얀 불꽃처럼 표현하곤 했습니다.

Gustave Doré(1832-1883)'s "The Descent of the Spirit", https://ayomideakinbode.medium.com/speaking-the-tongues-of-angels-and-men-a-conundrumsconundra-of-the-21st-century-church-696ecd22f930

우리말 '성령'으로 번역되는 'holy spirit'은 'spirit' 중에서 좀 '다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절대신과 관련된 영입니다.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의 교리에는 '성령'은 '성부'(하느님), '성자'(예수)와 동일하다고 규정합니다(삼위일체)만, spirit이라고 한 바로 보면 어떤 '영적 존재'를 떠올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 '귀신'이라거나 '유령'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다 spirit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성령은 그 중에서도 절대신에 속한 것이라는 '예외적 감각'이 담겨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가 귀신이나 유령을 떠올리는 감각(인식)을 성령이란 존재를 떠올릴 때도 활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 빙의의 징후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 14: 2, 새번역)

기독교에서 유행하는 방언은 '신의 말'이라는 가능성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악한 영의 말'이 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그 외에 '흉내내기'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자들은 '신의 선물'로서 방언을 바라마지 않는 한편으로 정말 자신의 믿는 신이 준 선물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의 영향 때문인지 걱정하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성령이 임하여'로 표현되는데, 결국 빙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빙의는 성령만 일으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영적 존재도 사람 몸에 들어와 깃들 수 있습니다.

절대신이든 잡신이든 악마 같은 신이든, 빙의 상태는 어떤 일반적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바뀌기 때문에 말이나 행동이 달라지는데, 특히 '말'이 많이 주목되었습니다. 방언도 성령의 '임재'(들림, 성경에서는 '붓는다', '채워진다'고 표현)에서 하게 되는 말로서 '외국말'(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능력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행 2:4-6, 새번역)

요즘도 그런 '개신교 전설'이 떠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라떼'는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외국어 능력이 생길 수 있거나 외국어를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낭설이 떠돌았습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가 그럴 듯한 관찰과 경험의 산물일 수 있는데, 그럴 경우에도 빙의된 영적 존재의 특별한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다기보다는 우연히 방언을 하게 되면서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사례가 신비화되어 이해된 것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방언도 일종의 언어능력이니까, 애초 언어능력이 좋은 사람이 방언과 외국어를 잘 습득한 결과 때문에 오귀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 다른 빙의의 가능성

기독교 전통에서 귀신들림은 통상 '마귀들림'을 말합니다. 그래서 악령이 빙의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정형화된 판단 기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며, 주로 '외국어'로 이해됩니다(다른 예로는 십자가를 보여주거나 성경을 읽어 줄 때,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게 있습니다).

모건 프리먼의 '스토리 오브 갓' 시즌3 ep1 '악마를 찾아서' 중

엑소시즘을 다루는 영화에서 그러한 특징이 드러난 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검은사제들〉의 구마의식에서 악령들린 자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림은 대체로 부정적인 맥락으로 이해되지만, 간혹 죽은 소중한 사람과의 재회를 그리는 이야기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일본 영화 '비밀', 아내의 영혼이 딸에게 깃들게 되었다는 설정

고대 그리스의 '신탁', 무당의 '공수', 그리고 기독교의 '방언'은 접신을 통해서 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관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종교문화적 현상입니다. 영적 존재는 '사람 같은 존재이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며, 몸을 옮겨 다닐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문화적 전유와 향유 양상에 따라서 '겉보기'는 많이 달라 보일 수도 있지만, 영적 존재에 대한 직관적 이해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 이전 전통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나 그런 것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Speaking in Tong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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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방언은 인간의 진화된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영적 존재에 대한 직관적 상상이 종교의 언어(여기에서 기독교의 영적 존재)를 통해서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영적 존재와 상호 작용(빙의 같은)하며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인간이 보일 수 있다는 관념은 어느 종교에서나 어느 문화권에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어떤 병리적인 상태를 구분하는 것도 일반적입니다(한국 무속에서 '신병'과 '공수'의 구분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병리적이지 않은 올바른 상태를 규정하고 그 상태를 잘 이해하도록 하는 '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도덕적 가치들과 긍정적인 심리적 상태를 규정하긴 합니다만, 모호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 모호성 때문에 교회의 권한이 제도적으로 투사될 수 있기도 합니다.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잘 훈련된 종교적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제도화된 종교가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활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전문 종교인 집단(종교 단체)의 자의적 판단 가능성을 불식시킬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믿는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그 집단의 욕망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표상될 수 있는 것이죠. 참된 신의 메시지라고 공인을 받더라도 인간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참고자료:
Glossolalia and the Problem of Language(2021)

https://scholar.harvard.edu/harkness/publications/logic-tongues-glossolalia-and-limits-language-south-korea

한국 개신교의 방언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언어학적 논의가 불필요하게 과잉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기독교인류학'적 작업으로서 아주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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