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델포이에서 아폴로는 테미스를 쫓아냈나?┃델포이 신전의 E 심볼의 비밀(1)

※이 글은 얼룩소 글(23.5.12)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너 자신을 알라'(ΓΝΩΘΙ ΣEΑΥΤΟΝ, gnothi seauton*)라는 경구가 델포이 아폴로 신전의 어느 위치에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지를 다루면서 '델포이 신전의 심볼'로 여겨지는 'E'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지난 글). 이 심볼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제법 다양한 학술적 논의가 전개되었더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ΣEΑΥΤΟΝ(seauton) 말고 ΣΑΥΤΟΝ(sauton)으로 쓴 경우도 많은데, 주로 책에 쓰인 경우였다고 합니다.


  • 델포이 신전의 E가 가진 비밀

델포이 신전의 심볼 E는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긴 합니다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이 새겨졌던 곳 근처에 함께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무, 청동, 황금 버전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의 가운데 빨간 원 안의 기호가 '델포이의 E(delphic E)'로 불리는 것입니다. 다만 해당 기호는 최근에 유행하는 버전인 것으로 보이고, 과거에는 E의 모습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림1. 델포이 신전의 심볼 E, delphic E라는 문자를 보여준다. 이 이미지의 심볼의 모양은 고대 신전에 새겨진 것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출처: https://realgreekexperiences.com/delphic-maxims)

지난 번 글에서 봤던 2세기의 로마 주화에는 명확하게 'E'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림2. 파우스티나 황후 기념 주화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기념 주화 속 델포이 신전의 'E', 이미지 출처: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3576039089095158&set=p.3576039089095158&type=3

애초 기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cf. 아래 그림6). 추정되기로는 기원전 수천년 전부터의 숭배 의식과 관련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전후 기록을 토대로는 'E'라는 형태를 뚜렷이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현대의 학자들이 생각을 해 보게 된 것은 플루타르코스(46~약120)가 관련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델포이 신전의 E 문양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서 사제로 봉직했었다고 합니다. 이때 신전 입구에 걸린 'E'에 관해서 생각하며 글을 남겼습니다(On the E at Delphi). 


  • 플루타르코스의 7가지 설명

델포이의 E에 관해서 언급한 대화록에서 그는 7가지의 가능한 설명을 '대화자들의 입'을 빌려서 제시하였습니다.

  1. 델포이 신전의 격언을 정한 현자들이 5명임을 보여준다(E, 엡실론은 그리스 알파벳의 다섯 번째/영어의 E와 마찬가지로).
  2. E는 모음으로서 두 번째이고, 태양은 두 번째 행성(달이 첫 번째로 여겨짐)이며, 아폴로는 태양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E가 아폴로를 상징한다.
  3. 플루타르코스는 E의 발음을 'ei'로 보면서 'ei(εἰ*)' = "만일(if)"로 본다.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할 것인지 또는 그들이 이것을 할 것인지 또는 저것을 할 것인지를 신탁으로 묻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한다. 
  4. EI는 종종 εἴθε(eithe) 또는 εἰ γάρ(ei gar)[=if only, ~이면 좋을 텐데]의 조합으로 신에 대한 소원이나 기도에 사용된다. 
  5. EI, 곧 "if"는 논리학에서 필수적인 단어이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저런 결과가 따른다.' 아폴로 신이 즐겨 사용했다.
  6. 5는 수학, 생리학, 철학,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다(E, 알파벳의 다섯 번째 문자). 아폴로 신은 그 분야들과 밀접히 관련된다.
  7. EI는 "thou art(you are)"를 의미하며 신(아폴로)이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 εἰ는 고대 그리스어의 'if'.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αν(an)'.

이 심볼에 대한 현대적 논의를 이끈 고대 그리스 연구자 베이츠(William Nickerson Bates, 1867–1949)는 플루타르코스가 그럴 듯한 설명을 생각한 것이지 그 본래 의미를 알지는 못했다고 지적합니다(Bates, 1925: 241). 당시에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은 그가 엡실론(E)이라는 문자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긴 합니다.


  • 현대적 설명, 더 고대의 대지신(가이아)의 흔적?

베이츠는 보다 확실한 근거라고 판단했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델포이 신전의 E 심볼이 아폴로 신을 믿기 이전에 그곳에서 행해지던 대지신('가이아')에 대한 숭배와 관련된 것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내 놓았습니다.

델포이 신전에서 20세기 초에 발견된 옴파로스*에 새겨진 문자 E Γã(E Ga)를 기초로 해서, 'ga'는 'ge'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gaia'와 관련이 된다고 봅니다(ge/gaia가 고대의 대지모신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 때는 이 돌이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 옴파로스는 '배꼽'이란 의미로 '세계의 중심'을 나타내는 표지로 놓인 종(혹은 벌집)모양의 돌입니다(아래 사진).

그림3. 델피의 문자가 새겨진 옴파로스 (Bates, 1925: 241)

위 사진에서 아래의 문자를 읽어 냈습니다.

그림4. 옴파로스에 새겨진 문자? (Bates, 1925: 241)

베이츠는 이 돌의 문자가 기원전 7세기에 쓰였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여기에 표현된 'ge'(=gaia)가 아폴로 신앙이 델포이에 자리잡기 전에 그곳에서 신탁을 관장했던 대지의 여신 신앙과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그림5. 델포이, 미케네, 크노소스의 위치 (https://ko.wikipedia.org/wiki/미케네_문명)

당시 접근 가능한 델포이, 크레타의 미노스,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등지의 유적과 유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지 여신의 도상학,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및 연극 텍스트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20세기 전후로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에서 대지의 여신 신앙이 공히 발견되고, 비슷한 도상을 갖는 유물이 델포이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델포이에 원래 대지모신(Mother Earth Goddess) 신앙이 있었고, 그 대지모신은 때론 가이아로 때론 테미스(Themis)로 불렸었다. 그러다가 크레타의 크노소스 사람들이 델포이로 이주하면서 아폴로 신앙이 들어와 이를 대체했다.

그림6. Bates(1925) fig. 5 'Minoan Gem'의 해상도 높은 버전. 베이츠가 'E'로 본 문양은 다른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Jasper Lentoid / Minoan / ca. 1500–1400 BCE (이미지 출처: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251371)

이런 시나리오를 제기하면서 베이츠는 델포이 신전의 E 심볼이 아폴로 이전 대지모신의 심볼이었는데, 아폴로 등장 이후에도 '재활용'되었고, 이후에 사람들이 그 내막을 잊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았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참 흥미로운 그럴 듯한 가설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1950년대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바로 베이츠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던 옴파로스에 새겨진 글자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며, 베이츠 등이 글자를 잘못 읽은 것일 뿐 아니라 그 돌은 옴파로스도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 나가겠습니다.


참고자료

Bates, William Nickerson, 1925, "The E of the Temple at Delphi,"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29(3): 239–246. (이 논문에 대한 요약은 여기를 참고)
Bousquet, Jean, 1951, "Observations sur l'« omphalos archaïque » de Delphes," Bulletin de Correspondance Hellénique 75: 210-223.
ON THE E AT DELPHI, Plutarch's Morals: Theosophical Essays
The E at Delphi, CONRAD H. ROTH's Blog(Varieties of unreligious Experience)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예수 가족의 무덤, '예수 신화'에 이야기를 더하다

 얼룩소에 2023년 8월 2일에 쓴 글입니다. *  *  * 최근에 『예수의 무덤: 역사를 뒤집을 고고학 최대의 발견』(2007)이란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무덤』의 표지(출처: 교보문고) 원제는 The Jesus Family Tomb: The Discovery, the Investigation, and the Evidence That Could Change History (예수 가족의 무덤: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발견, 조사, 그리고 증거, 2007)입니다. 이 책을 보고 '제임스 카메론'이 등장할 것을 알기는 어렵지요. 관련 논란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책을 펼치면 '추천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제임스 카메론(캐머런)이었습니다. 『예수의 무덤』 17쪽, '추천의 글' 글쓴이 그런데 이 책의 문제 의식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역사학자, 성서학자의 '예수의 실존'에 관한 일반론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물리적 증거(예수 가족의 무덤)가 심차 자코보비치(Simcha Jacobovici)와 찰스 펠리그리노(Charles R. Pellegrino)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전문가들이 예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는 한다. 이교도들의 신, 죽음과 부활의 신화, 1세기경 유대인들의 메시아 전통 등이 결합되어 조작된 존재로, 예수 역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가 크리스마스도 동지를 축하하는 이교도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한다. 동정녀 잉태와 부활 등 예수의 이야기에서 기본적인 틀을 이루는 많은 부분이 예수의 존재보다 적게는 수백 년을 앞서고 있기 때문에,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이유로 조작된 신화적 인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았다는 물리적 증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

태백산, 산당, 서낭당 그리고 사람들┃답사 후기

[2017년 6월에 태백산 일대의 답사를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답사는 6월 3일부터 6월 4일까지. 후기 작성일 2017. 6. 7.] · · · 태백산에 다녀왔다. 천제단, https://www.khan.co.kr/local/Gangwon/article/202204281434001#c2b 난 답사를 싫어한다. 주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왜 가야 하나'에 적절한 답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학부 때는 '학술'을 가장한 MT같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싶었는데,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그마저도 관심이 시들해졌다. '학'은 사라지고 '술'을 위해서 가는 것이라면 또 굳이 갈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실제 답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답사에서 무언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박사수료 후부터 조금 달라졌다. 이제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재미가 있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역시 수준 높은 연구자들과 함께 가서 그런 것 같다. 혼자 갔다면 도저히 그곳의 이야기,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터다. ('자기 문제의식'이 명료화 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산악신앙'은 상식적으로는 '원시신앙'으로 학술적으로는 자연신앙 내지는 마을신앙과 관련된 민속신앙으로 이야기된다. 고도의 신학적 이야기,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는 따위의 것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상당히 빈곤하게 이해된다. 그런데 이번에 태백산 답사를 가서, 거기에 '인간'을 들여다 보는 '어떤 창'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었다. 산은 '신성한 곳'이다 태백산 같이 높은 산, 주변 지역의 '중심'이 되는 산은 특히 그렇다. 그런 산들은 일단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위험'하다. 맹수로부터 목숨을 위협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높...

우리 뇌의 '미래 보상 감지기'로서의 세로토닌?!

최근 오타와 대학교 연구팀이 세로토닌 뉴런이 우리 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릴 때 세로토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세로토닌의 새로운 역할: 미래 가치 예측자 세로토닌(serotonin)은 흔히 '행복 호르몬' 또는 '기분 좋게 만드는 화학물질'로 알려져 있다. 많은 항우울제가 이 세로토닌 시스템을 대상으로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세로토닌의 정확한 역할은 그동안 과학자들에게 수수께끼였다. 이번 연구에서 밝혀진 중요한 발견은 세로토닌 뉴런이 단순히 즐거움이나 고통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 가치(prospective value)'라는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이는 가까운 미래가 얼마나 좋을지를 뇌에 알려주는 일종의 예측 신호이다. 강화 학습 이론과 뇌 연구의 만남 연구팀은 '강화 학습 이론(reinforcement learning theory)'과 뇌의 세로토닌이 풍부한 지역인 '등쪽 솔기핵(dorsal raphe nucleus)'에서 얻은 신경 기록을 결합했다. 강화 학습 이론은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사용되는 개념으로, 행동의 결과를 바탕으로 학습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쉽게 말해, 좋은 결과를 가져온 행동은 반복하고, 나쁜 결과를 가져온 행동은 피하게 되는 학습 방식이다. 등쪽 솔기핵은 뇌간의 한 부분으로, 세로토닌을 생산하는 뉴런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우리의 기분, 수면, 식욕 등 다양한 기능에 관여하고 있다. 의외의 보상에 더 강하게 반응하는 세로토닌 뉴런 연구에 따르면, 세로토닌 뉴런은 특히 '예상치 못한 보상(unexpected rewards)'에 가장 강하게 반응한다. 예를 들어, 갑자기 길에서 돈을 발견했을 때 우리 뇌의 세로토닌 뉴런은 평소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는 세로토닌이 단순히 현재의 즐거움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