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1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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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1월 1일이 밝았네요. 종교가 없더라도 해맞이, 떡국먹기, 덕담 등을 하게 되는 날입니다. 저도 새해 첫날 일출을 보며 올해 꼭 이루고 싶은 것을 소원으로 빌 계획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 시기가 되면 늘 호들갑 떨며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 시기가 되면 늘 호들갑 떨며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OOO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위화감 없이 양력 설에 'OOO년 새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0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12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색은 10간에 배당되어 있죠. 오방색이라 해서 청·적·황·백·흑색을 말하죠. 각각 방위가 배당되어 있어 오'방'색이라 하는 것이죠.
이걸 두고 사이비 종교나 상업주의에 물든 무지성 추종이라 핏대 세워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민속(문화)은 사실 계속 변하는 것이죠. 육십갑자 기년과 오방색을 결합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 소비문화에 최적화된 민속 관념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양력 체계와 음력 체계가 뒤섞였다는 점이죠
뭐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조상님들은 음력만 쓰지 않고 양력도 써 왔죠. 그래서 태음태양력이라 하죠. 농사가 기본 산업인 나라에서는 어디나 태양력 체계를 필요로 하긴 합니다. (참고로 음력과 밀접하게 관계된 산업은 수산업입니다. 바닷물의 고저, 밀물썰물의 주기 정보가 생업에 필수적이니 당연합니다.)
24절기와 음력의 공존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은 신년 첫날을 24절기로 따지진 않았습니다. 음력 설을 새해 첫날로 삼았죠. 올해는 1월 22일 일요일입니다. 음력 체계의 기년법이니 그 날에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고 해야 맞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죠. (사주명리학계에서는 통상 '입춘'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죠. 아니다 '동지'부터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19세기말(을미개혁) 서력이 도입된 이래 양력과 음력은 부침이 있었습니다. 1896년 양력이 도입(음력 1895년 11월 17일)되었지만 이듬해에 명시력으로 바뀌었습니다. 음력이 중심인 음양혼용체계였습니다.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태양력 중심의 역법 체계가 도입되어, 일제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양력이 주, 음력이 부의 위치를 갖게 된 출발점이었습니다.
양력의 도입 배경에 언제나 일본의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에 태양력 체계로 완전히 넘어가는 데는 문화적 저항이 컸습니다. 음력(특히 설)을 지키는 것은 고유한 풍속을 지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양력 설과 음력 설
일제에 의해 '신정'과 '구정'이라는 말이 도입되었다는 건 유명하죠.
순종 즉위 이후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음력 설 폐지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민간에서 음력 설을 못 쇤 건 아니었습니다. 일제 때 신문지면을 통해서 '이중과세(二重過歲, 새해 두 번 맞이)' 문제가 심심치 않게 지적된 걸 보면, 음력 설 쇠는 풍습은 쭉 이어졌던 것이죠.
1930년대 후반에는 일제가 노골적으로 음력 설을 못 쇠게 하려고 여러 조치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못 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일제 시대의 역법을 이었고, 음력 설 배제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음력 설 폐지에 공을 들였던 대통령이었죠. 전두환도 이 기조를 따랐다가 1985년에 겨우 '민속의 날'로 하루 쉬는 날로 만들었습니다.
89년에 이르러서야 3일 휴일인 '설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음력 설은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민족 정체성과 관련된 풍습의 느낌이 있습니다.
양력-음력 공존, 신년과 명절
한국 사람들에게 음력은 과거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인연이 없습니다. 오로지 명절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오늘이 초하루구나, 초이레구나, 보름이다, 그믐이다,라며 음력 날짜를 세지는 않을 겁니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명절을 쇠는 경험도 사실 음력을 크게 의식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달력에 쓰인 빨간날로 구분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러니 설날이 '음력으로 1월 1일', 추석이 '음력으로 8월 15일'이라는 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양력이 삶을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음력의 존재는 달력에 쓰인 작은 숫자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음력 생일을 챙기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음력 기년법을 얼마나 엄밀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가면서 점차 그런 인식이 희미해질 겁니다.
신기한 건 말이죠...우리가 이런 이름 붙이기를 즐긴다는 거죠
음양력 시간의 혼란은 양력 설과 음력 설 사이에서만 발생합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혼란'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네, 현대판 태양-태음력 체계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음력은 다만 뭔가 고풍스럽고, 문화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장식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건, '검은 토끼'든 뭐든 이렇게 새해에는 의미 찾기에 여념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오방색과 60갑자 기년법의 결합이나 양력 설에 60갑자에 따른 기년을 하는 것도 '특별한 의미 찾기'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시간에서 '운명'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서겠죠?
양력 1월 1일에 계묘년을 외치다
양음력 혼란시키지 말라, 뭐 이렇게 지적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10여년 전에는 그랬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문화는 변하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이 시대에 우리가 창조한 시간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력과 음력이 짬뽕(?)된 시간에 대한 '운명적' 드립.
양력과 음력이 혼합된 체계를 누리며, 음력 명절을 민족정체성과 연관시키는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양력 설과 음력 설 사이 한정 양력화된 음력 체계를 창조해 낸 것이 아닐까요?
참고자료
1: 흑룡은 있지만 ‘흑룡의 해’는 없다
2: ‘오방색’은 다섯 행성을 의미한다
3: 100년 수난을 견디고 명절이 된 ‘음력 설’의 운명
24절기와 같은 양력 체계와 설, 추석과 같은 음력 체계의 요소들이 우리 내면에서 그리 충돌 없이 잘 어우러진 상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답글삭제참고로 달력을 완전히 인위적으로 정해버렸던 프랑스 혁명력(공화력, Calendrier républicain이라고도 하죠) 아래에서는 한달은 30일, 하루가 10시간, 1시간은 100분, 1분이 100초로 되어 있었는데, 나폴레옹 체제가 되면서부터는 다시 그레고리오력이 부활하죠. 이 시기에 농민들의 반발이 커서 이 체제가 12년 이상 지속된 것이 이상하다고까지 하더군요. (송기형, "프랑스 혁명기 공화력의 제정과 그 의미" 참고)
달력이 미래에는 우주시 같은 것을 기준으로 다시 변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추이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테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프랑스 혁명력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논문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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