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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진실은 사실일까 아닐까 │ 김어준을 언론인이라 못할 이유가 있을까?

※ 이 글은 ' 얼룩소 '에 2023년 1월 10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 ∞∞∞ ─── 뜬금없이 뇌과학 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TED 강연 중 " Your brain hallucinates your conscious reality "(당신의 뇌가 당신의 의식적 현실을 환각으로 만들어 낸다)라는 게 있습니다. 애닐 세스(Anil Seth)라는 신경과학자가 인간의 '현실 인식'이 가진 '시뮬레이션'으로서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강연입니다.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Anil Seth의 TED 강연의 한 장면 우리가 환각에 대해 동의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신경과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무척 신기했습니다. 종교라는 '내로남불 체계'가 딱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남의 종교는 거짓이고 우리의 종교는 진리라 여기는 발상 잘 아실 겁니다. 정치와 미디어(+언론)의 문제는 사실과 거짓의 싸움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록위마'의 고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힘 있는 사람들이 '현실'을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죠.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국제 질서 상에서 '사실'은 언제나 '전략적 사실'(남을 해롭게 하고 나를 이롭게 하는 서사가 가미된 사실)-강대국의 이익이 고려된 사실입니다. 종교학이나 신화학을 배우면서 이런 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화나 종교 같은 것은 내부자의 시선에서는 한 없이 아름다운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외부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 하나를 과장해서 진정한 종교/신화는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러한 삶을 살지 않지요. 우리는 진리나 사실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걸 이용해서 살아가야 하

기독교의 신년 점치기, '말씀 뽑기'┃미신론을 넘어서

※ 이 글은 ' 얼룩소 '에 2023년 1월 7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 ∞∞∞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51524 연말 혹은 신년에 기독교계에서는 '말씀 뽑기'를 한다. 모든 교회나 성당에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의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구글링만 해 보아도 알 수 있다. google 검색 결과, 편집된 것임 개신교계 일각에서는 주술적이고 샤머니즘적이고 이교적인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 혹은 신년 예배에서 ‘말씀 뽑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런 예를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오미쿠지, 출처: https://blog.naver.com/ky7000/110123986893 아니면 ‘포춘 쿠키’를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https://www.pinterest.co.kr/pin/573012752578857208/ ‘포춘 쿠기’ 속 운명의 메시지로 성경 구절을 사용하는 경우도 눈의 띈다. https://www.amazon.com/Fun-Express-Fortune-Cookies-Edibles/dp/B00ATEEIG4 개신교도들이 이런 ‘미신적 행위’를 일삼는 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위선자라느니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년 점’의 풍습이 예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는 점,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신년 운세를 점치는 의식이 많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은 많다?│시간과 종교적 본능

※ 이 글은 ' 얼룩소 '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

챗GPT로 전문자료 탐색시에 반드시 크로스 체크

※ 이 글은 ' 얼룩소 '에 2023년 1월 1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글의 원래 제목은 "챗GPT로 잘 모르는 분야 탐색시에 반드시 크로스 체크"라는 것이었는데, 더 적합한 것은 '전문자료 탐색'이 맞을 것 같아서 제목을 수정하였다. ─── ∞∞∞ ─── 요즘 챗GPT로 이것저것 해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디지털 인문학' 관련해서 공부를 하다가, "세르누다의 『현실과 욕망』에 관한 디지털 인문학적 분석 시도-전기 시와 후기 시의 어휘적 특성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https://www.bestialectora.com/2021/09/biografia-de-luis-cernuda.html 세르누다(Luis Cernuda Bidón, 1902~1963)는 스페인 시인입니다. 이 논문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람입니다.  위 논문은 이 분의 시집  『현실과 욕망(La Realidad y el Deseo)』(1924-1962)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집을 텍스트 분석 기법(빈도값 측정, 감정 분석, 공기어 분석)으로 분석해서 그의 망명 이전 시와 이후 시 사이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세르누다 시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지만, 시집이 나온지 오래 되었으니 그의 전기 시와 후기 시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밝혀져 있을 걸로 추정이 되었습니다. 이걸 챗GPT에 물어 보았습니다.  Q: 세르누다 시의 전기와 후기 사이의 차이를 알려줘. A: 루이스 세르누다(Luis Cernuda)는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스페인의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 시기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후자 시기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였다. 전자 시기에 세르누다의 시는 환멸감과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시기의 그의 시

오늘이 토끼 해의 시작? - 양력 1월 1일과 계묘년 (얼룩소 글)

※ 이 글은 ' 얼룩소 '에 2023년 1월 1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 ∞∞∞ ─── 양력 1월 1일이 밝았네요. 종교가 없더라도 해맞이, 떡국먹기, 덕담 등을 하게 되는 날입니다. 저도 새해 첫날 일출을 보며 올해 꼭 이루고 싶은 것을 소원으로 빌 계획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 시기가 되면 늘 호들갑 떨며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OOO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위화감 없이 양력 설에 'OOO년 새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https://www.gy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21376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이었고, 2023년은 계묘년(癸卯年)입니다. '검은 토끼의 해'라고들 합니다. 일단 'OOO년'은 60갑자로 만드는 거 다 아실 겁니다. 10간: 갑을병정무기경신임 계 12지: 자축인 묘 진사오미신유술해 색은 10간에 배당되어 있죠. 오방색이라 해서 청·적·황·백·흑색을 말하죠. 각각 방위가 배당되어 있어 오'방'색이라 하는 것이죠. https://blog.naver.com/patorry '임계'에 흑색이 배당되어 있어서 '검은 토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십갑자 기년법(紀年法)과 오방색이 결합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 것 같습니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과거 기록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자료 1 ).  이걸 두고 사이비 종교나 상업주의에 물든 무지성 추종이라 핏대 세워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민속(문화)은 사실 계속 변하는 것이죠. 육십갑자 기년과 오방색을 결합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 소비문화에 최적화된 민속 관념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문학적으로 의미가 없는 1월 1일은 왜 새해 첫날이 되었을까?

천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1월 1일은 참 애매한 날입니다. 지난 번에 '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라는 시리즈 글을 다루면서 동지가 '시간의 마디'로 인식된 측면(참고: 절기, 시간의 마디와 의례 본능 )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천체의 움직임(태양이나 달)과 1월 1일은 사실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태양 고도의 극점(solstice)이나 평분점(equinox)은 시간 사이클 상에서 변화의 기준점 역할을 하지만 달력에는 애매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21, 22일 혹은 22, 23일입니다(2023 춘분: 3월 21, 하지: 6월 21일, 추분: 9월 23일, 동지: 12월 22일).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역사적 기원으로 이야기하면 율리우스력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새로운 역법을 정할 때 1년을 365.25일로 정하고(소수점 시간은 윤년으로 처리), 춘분을 3월 23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1월 1일이 신년의 첫날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춘분을 4월 1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동지가 1월 1일이 되었을 겁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천문학적 기준점을 왜 새해 첫날로 삼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계속 해소되지 않습니다. 고대 로마 달력 https://www.througheternity.com/en/blog/history/beware-ides-march-assassination-julius-caesar.html 율리우스력의 기원이 되는 이집트력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집트력은 농경 생활과 천문 지식의 결합을 통해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달력 https://historicaleve.com/ancient-egyptian-calendar/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ChatGPT에 '크리스마스와 동지'의 관계를 물어 보았다.

요즘 핫하다는 '챗GPT'에 크리스마스와 동지의 관계를 물어보았다. https://openai.com/ 나: 크리스마스가 동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니? 챗봇: 크리스마스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축제일이며 종종 북반구에서 1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동지와 관련이 있다. 동지는 보통 12월 21일 또는 22일 경에 발생하며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하는 것, 즉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을 표시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원래 기독교 이전의 동지 축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종종 태양의 재생과 낮이 더 길어지는 시기의 복귀와 관련이 있다. 고대 로마인과 고대 켈트족을 포함한 많은 고대 문화에는 동지와 태양의 귀환을 중심으로 한 전통과 축제가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및 종교적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동지가 축제일의 기원에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크리스마스는 광범위한 종교적, 문화적 전통과 연관되어 현재 전 세계의 다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기념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와 동지의 관계에 대해서 비교적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지 축제와 관련성을 '논증'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정보(동지 축제와 관련되지만 현재는 역사/문화/종교적 설명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거나 복잡하게 변화했다)는 대체로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인지진화적 설명은 관련 문서가 부족하기 때문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디테일이 부족한 것도 한계라 할 수 있겠지만, 간단한 답변으로서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챗GPT가 3문단으로 설명하는 것을 나는 A4 몇 페이지로 설명했던가. 대학 등에서 학생들에게 과제나 시험문제를 내줄 때 이제 안일하게 내면 AI가 답을 써주는 시대가 되어버린 듯하다. ─── ∞∞∞

절기, 시간의 마디와 의례 본능

‘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라는 타이틀의 시리즈물의 마지막 글이다. 이전 글까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크리스마스’가 동지라는 ‘시간의 마디’에 이루어지는 의례였고, 지금도 그 특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물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시간의 마디에서 인간은 왜 의례 행동을 하는가'가 될 것이다. 동지 축제의 주요 요소라고 할 만한 것들이 ‘주술-종교적 목적의 행동’이라는 점을 지난 글( 핼러윈, 크리스마스, 만우절의 공통점 )에서 언급했다. 팥죽과 주술-종교적 위험 회피 우리의 동지 축제 때 관습으로 ‘팥죽 먹기’가 있는데, 그것도 동지 축제에서 많이 보는 주술-종교적 행동이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보자.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다. ...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의 일종이다.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로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것이다. 이런 동기는 이 풍습이 관습화되면서 많이 약화되고 새해에 떡국을 먹는 것처럼 ‘한 살을 먹는다’는 의미 정도로 축소되었다. 세계 도처의 ‘동지 축제 풍습’, 또 신년 의례를 보면 시간이 변하는 시점에 귀신이나 악령이 출몰하고 이들로부터 인간이 액, 살과 같은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관념이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한 모종의 행동(의례)을 수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시간의 ‘경계’만큼이나 공간의 ‘경계’에서도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은 활발히 작동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석단이다. 영어권에서는 cair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할 때 사람들은 민감하게 초자연적

핼러윈, 크리스마스, 만우절의 공통점

‘시간의 마디’에서 의례 행동을 하는 인간의 진화된 본성을 살피기로 했는데, 이 부분도 내용이 길어져서 두 부분으로 나눴다. 첫 번째는 ‘핼러윈, 크리스마스, 만우절의 공통점’에 대한 이야기다. 왜 크리스마스의 동지 축제적 특성을 살펴봐 왔는지 정리해 보기 위한 출발점이다. 종교적, 역사적, 자연적 층위들이 어떻게 복잡하게 어우러져서 종교적 관습—크리스마스—이 지금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인지 살펴보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이다. 동지 축제적 요소들 인간의 의례 행동은 종교 전통 속에서 너무 복잡하게 그려진다. 종교적으로 체계화된 어떤 세계관 혹은 어떤 종교적 사건을 기념하는 의미가 강조되다 보니 의례 행동은 종교적 믿음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처럼 비춰진다. 크리스마스가 동지 축제의 모습을 ‘동지’ 날짜와 이틀의 시간 차이가 있음에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4편의 글을 통해서 살펴봤다. 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1) - 예수의 탄생일?  [ 블로그 ] 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2) - 기독교 초기 동지 축제의 크리스마스화는 실패였다  [ 블로그 ] 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3) - 기독교 시대의 크리스마스도 연말 잔치 느낌  [ 블로그 ] 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4) - 크리스마스는 타락한 적이 없다, 덧칠되었을 뿐  [ 블로그 ] 기독교적 의미가 두드러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독교 이전에도 기독교사 초기에도 중세에도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과거 동지 축제의 영향이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름과 ‘산타클로스’(성 니콜라우스를 떠올리지만 그는 엘프다)라는 이름에서 기독교적 외피를 찾아볼 수 있지만, 실제 이 시기의 축제 감각은 ‘시간의 끝과 시작’이라는 시간의 마디에서 의례를 요청하는 인간의 본능적 감수성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게 드러난다. 동지 축제의 요소는 ‘떠들썩한 잔치, 자선, 베풂’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향성은 지금도 두드러진다. ‘죽은 자/영혼의 출몰, 가면극, 액막이’ 등의 요소는 지금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런 주술-종

과도한 혹은 쓸데없는 비용이 드는 의례는 왜 지속될까

현대 소비문화에 최적화 된 기념일은 '인간의 의례 본능'과 '의례 행동의 의의에 대한 추론' 사이의 갈등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물질(빼빼로나 초콜릿)을 소비하는 것만으로 특별한 관계(주로 연인)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한다는 건 어딘지 '가벼운'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념일은 아직 인기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기념일 챙기기는 특별한 계기에 의례를 요청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과 연관되기 때문에 인간사에서 늘 있었던 모습이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례 행동의 의의에 대한 의심도 같이 나타납니다. 비용이 많이 드는 허례허식에 대한 비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인간사에 있었습니다. 상업주의에 물든 기념일을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사에서 늘 반복되는 이 길항작용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의례 본능? 인지 인류학자(anthropologist and cognitive scientist)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Dimitris Xygalatas)는 최근 자신의 책 Ritual: How Seemingly Senseless Acts Make Life Worth Living(의례: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이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방법─아직 번역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에서 의례 행동이 동물의 진화된 본성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점을 역설하였습니다. https://www.amazon.com/Ritual-Seemingly-Senseless-Worth-Living/dp/0316462403 동물도 그런 행동을 하고 있으며, 인간도 마찬가지로 어떤 계기에 사회적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의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 가설이 '고비용 신호 가설'(혹은 '값비싼 신호 이론'costly signaling theory)입니다. 포식자 위험 회피와 짝 찾기

지구평평론자들이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는다고 '평평한 지구가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아이스블루님의 " 귀신과 초능력은 없는게 아니라 사람이 모르는게 아닐까요? " 글에 대한 답변으로 아래 내용을 작성하였습니다. '이어쓰기'로 위 글에 붙이고자 했지만 해당 탭이 활성화되지 않아 부득이 원글에 이어쓰기를 했습니다.                                                                               https://aleteia.org/2017/10/17/why-is-satan-depicted-with-horns-red-tights-and-a-pitchfork/ 신은 존재하는가? 악마는 존재하는가?  천국은 존재하는가? 귀신은 존재하는가? 종교학 연구자로서 어떤 기준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세상에 많은 신과 천국과 악마가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종교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종교(신화 및 전설 등 포함)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만, 종교학 연구자들은 교육과 학술활동 과정을 통해서 제법 많은 종교들의 세계관과 신관을 살펴보게 됩니다. 신을 인간과 비슷한 행위자로 상상하는 건 모든 사례들에서 공히 발견할 수 있지만, 신의 모습과 신이 사는 세상, 신과 경쟁하는 '사악한 신'의 모습이나 그들이 사는 세계(주로 지옥이죠)의 모습은 문화권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마다, 더 세세히 나눈다면 부족 수준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는 신, 사후세계의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런 걸 이것저것 보아오면, 자연스럽게 그런 존재의 실재성을 믿을 수는 없게 됩니다. 물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은 종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덕목이긴 합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상대의 믿음을 존중해 주는 태도가 기본 소양이 되는 것이죠. 연구를 위해 실제 종교인들과 접촉해야 할 경

종교 '억까', 스켑틱의 질문(가설)은 비과학적이다

스켑틱'은 종교에 대해서 답을 정해 놓았다.  '그런 비합리적인 것을 왜 믿느냐. 과학적으로 허무맹랑하다.' 이번에 '종교와 건강' 문제를 얼룩소에서 다뤘는데, 너무 신념에 찬 시각만을 보여준다. https://alook.so/posts/0kt69lJ 이 질문에 대한 '스켑틱'의 답변은 '건강에 좋지 않다'이다. 그런데 과학적 연구 중에도 종교 활동 혹은 그와 비슷한 활동(특히 명상)이 건강을 증진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제법 있다. 그러한 연구들은 아마 '스켑틱' 기고자의 눈에는 '유사 과학'적인 연구이거나 엄밀한 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은 연구로 보일 것이다. '답정너' 식으로 종교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종교에 대해서나, 종교를 향유하는 인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작업을 외면하게 만든다. 특히 반종교적 시각에 경도되면 종교 문제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비평하기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 과학적으로 다루기에 '종교(활동)'에는 함정이 많다 위의 글에서 해리엇 홀은 프랜시스 골턴의 기도의 효능에 대한 연구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연구가 과학적으로 종교 활동(기도)의 효과를 제대로 검증하기 위해서 잘 설계된 연구인 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종교 연구자들은 전혀 의미 없는 가설과 검증 방법을 사용했다고 판단할 것 같다. 종교 현상은 해리엇 홀이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믿고 있는 명제 그대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남을 위해 하는 기도는 그가 몰라도 효과가 있다' 혹은 '남을 위한 기도에 신이 응답해서 그에게 정말 도움이 된다'는 믿음). 이 점에 대한 이해부터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반종교론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현대의 진화 인지적evolutionary cog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