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와 동지 축제’라는 타이틀의 시리즈물의 마지막 글이다. 이전 글까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크리스마스’가 동지라는 ‘시간의 마디’에 이루어지는 의례였고, 지금도 그 특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물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시간의 마디에서 인간은 왜 의례 행동을 하는가'가 될 것이다.
동지 축제의 주요 요소라고 할 만한 것들이 ‘주술-종교적 목적의 행동’이라는 점을 지난 글(핼러윈, 크리스마스, 만우절의 공통점)에서 언급했다.
팥죽과 주술-종교적 위험 회피
우리의 동지 축제 때 관습으로 ‘팥죽 먹기’가 있는데, 그것도 동지 축제에서 많이 보는 주술-종교적 행동이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보자.
동지 축제의 주요 요소라고 할 만한 것들이 ‘주술-종교적 목적의 행동’이라는 점을 지난 글(핼러윈, 크리스마스, 만우절의 공통점)에서 언급했다.
팥죽과 주술-종교적 위험 회피
우리의 동지 축제 때 관습으로 ‘팥죽 먹기’가 있는데, 그것도 동지 축제에서 많이 보는 주술-종교적 행동이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보자.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다. ...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의 일종이다.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로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것이다. 이런 동기는 이 풍습이 관습화되면서 많이 약화되고 새해에 떡국을 먹는 것처럼 ‘한 살을 먹는다’는 의미 정도로 축소되었다.
세계 도처의 ‘동지 축제 풍습’, 또 신년 의례를 보면 시간이 변하는 시점에 귀신이나 악령이 출몰하고 이들로부터 인간이 액, 살과 같은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관념이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한 모종의 행동(의례)을 수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시간의 ‘경계’만큼이나 공간의 ‘경계’에서도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은 활발히 작동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석단이다. 영어권에서는 cair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할 때 사람들은 민감하게 초자연적 존재의 간섭 가능성을 살폈다. ‘누석단 쌓기’는 신적 존재의 가호로 새로운 공간의 위험을 회피하려는 활동인 측면이 있다. (지금은 '이정표'로 설명되고 있지만)
위험을 회피하려는 진화된 마음
새로운 시간은 불확실한 시간이다. 그 불확실한 시간을 맞아 사람들은 위험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행위들을 고안하고 함께 수행한다. 여기에서 신적 존재가 ‘누구’냐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초자연적 가호’를 내리거나 ‘초자연적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가 필요할 뿐이다.
의례를 인지진화적(cognitive evolutionary) 관점으로 설명하려는 학자들은 인간의 진화된 인지체계가 개입되기 때문에 이러한 일반적 행동 절차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본다.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이 위험-예방체계(hazard-precaution system)이다. 본래 포식자나 감염 회피를 위해 진화된 인지 프로세스로 여겨진다.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빠른 대응(회피)을 하기 위한 인지 프로세스로 보통 우리가 의식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마음 체계라고 여겨진다. 풀숲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듣고도 어떤 행위자(포식자의 경우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를 상정하고 대처하게 해주는 인지 체계다.
새로운 시간으로 진입할 때 불확실성 때문에 어떤 위험을 상정하고 그것을 회피하는 반응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마음의 작용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의례에서 보이는 ‘정화 의식’이나 종교적 신성함의 감각이 전염의 원리(ex. ‘부정탄다’에서 접촉성 오염 감각)에 입각해 있다는 점들을 보면, 이러한 설명의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다만 이런 이해 방식이 모든 의례 행동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분명 동지 축제와 같은 절기 의례에 대한 설명력은 높은 편이다.
또 ‘하나의 인지 프로세스’가 절기의 의례 행동을 모두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의 분기점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초자연적 행위자를 떠올리며 위험을 구체화하는 것에는 행위자 추론(‘어떤 존재가 있다’), 인간적 행위자 추론(‘인간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는 존재’), 사회적 상호작용 추론(‘그 대상이 인간의 행동에 반대급부로 어떤 조치를 한다’) 등 여러 마음 체계들이 개입한다.
문화적 기억도 활용된다. 우리는 팥죽으로 액땜을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동물 가면을 쓰고 액땜을 하거나 악령을 가장해서 무기력하게 인간의 기지에 당하는 악령을 연기하거나 혹은 최소한의 비용을 받고 물러나는 악령을 연기함으로써 초자연적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문화권마다 액땜의 아이템과 행위 절차는 다를 수 있지만, 시간의 분기점에서 ‘위험 회피 행동’이 활성화되는 것은 일반적이다.
결국 착각이다?
없는 존재를 상상하고, 없는 위험을 상상하는 마음의 착각 때문에 의례가 나타났다,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 방식의 일면만을 부각시킨 해석에 불과하다. 이 ‘착각’이 인간 행동 방식의 ‘디폴트(default) 값’이라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 모든 ‘착각’이 왜 발생하느냐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는 두뇌의 진화에 대한 설명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미래의 위험을 잘 시뮬레이션해서 대비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예측 기계’라고 이야기한다. 그 시뮬레이션 능력은 모든 위험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형태로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진화 과정에서는 비용-편익의 트레이드오프가 발생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당시의 상대적인’ 최적의 효과를 발휘하는 식으로 자연선택이 될 따름이다. 적은 비용으로 대체적으로 많은 위험을 인지하고 대처하며 다소간의 과도한 조처가 있더라도 그 비용이 생존에 치명적이지 않다면 해당 능력은 진화될 수 있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질 위험은 도저히 구체화될 수 없는 무형의 위험이다. 패닉에 빠져 그저 불안에 떠는 상태와 상상의 대응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통제감(‘이렇게 했으니 앞으로 행운이 있을 거야’, 일종의 정신승리?)을 갖는 상태 사이에서 비교 우위를 어떤 게 가져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늘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위험을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무서운 존재’를 마음에 떠올리는 게 아니다. 부지불식 간에 그러한 조건, 경계/문지방에 섰을 때, 어떤 전이기에 들어갔을 때, 변화의 불확실성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비슷한 정도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감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감지한다. 그래서 ‘문화적 코드’(해맞이 소망, 소원빌기, 기도 등)를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산신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등산하다가 돌무더기에 돌을 쌓고 안전한 등산을 기원할 수 있다. 태양신을 믿지 않더라도 새해 첫 날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해가 가장 짧은 날, 도깨비가 날뛴다고 믿지 않더라도, 그들을 쫓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팥죽을 쑤어 먹는다고 믿지 않더라도 팥죽을 먹을 수 있고, 축귀의 목적으로 옛 사람들이 팥죽을 먹어왔다는 이야기를 소비한다.
다시 크리스마스 그리고 종교에 대한 착각
시간의 끝에서 떠들썩한 잔치와 악령 퇴치 의식을 하던 크리스마스의 모습은 가족과 연인을 위한 이벤트로 바뀌었다. 과거의 주술-종교적 행위들은 문화적 관습으로 이러저러하게 새로 부여된 사회적 의미에 봉사하고 있다. 혹은 사라진 것들도 많다. 그렇지만 한 해의 끝에서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모종의 행위를 함으로써 그 유대를 재확인하고자 하는 행동에서 ‘어떤 행위가 요청되는’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종교의 외피, 역사적 외피를 벗기고 인간의 자연적 본능 수준에서 크리스마스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종교와 관련된 뿌리깊은 착각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이 문제야’, ‘종교는 왜 이 모양이냐’, ‘종교(적 관념)를 믿는 건 비합리적’이라는 판단은 종교 현상에 감추어진 복잡한 층위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 현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종교적 설명이나 역사적 설명만으로 이해할 수 있지도 않다.
덧>
의례 본능과 관련해서 ‘고비용 신호 가설’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다만 절기 의례와 관련해서 ‘위험-예방 체계’에 집중하기 위해서 이 내용을 생략했다. ‘고비용 신호 가설’로 의례 본능을 설명하는 것은 “과도한 혹은 쓸데없는 비용이 드는 의례는 왜 지속될까”라는 글을 참고하시길.
일년의 각종 기념일들에 대해, 인간의 내적인 리듬과 시간에 대한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20세기 역법의 변화와 전통 세시 : 서울 토박이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안주영 선생님의 "시간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 고찰 : 전통적 시간과 근대적 시간의 대조를 중심으로"(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비교문화연구 제19집 1호, 2013, pp. 41-82)라는 논문이 많이 도움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답글삭제상기 논문에서는 전통적 시간과 근대적 시간이라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딱 나뉘어 있다기보다는 여러 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중첩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양력의 지배력이 현대 사회에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오히려 내적으로는 음력의 지배력도 여전히 강력하다든지, 다양한 시간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하죠. 에드워드 홀의 지적처럼 어쩌면 우리는 ('시간의 마디'를 이애하기 위해) '시간 언어'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애하기 --> 이해하기 (오타)
삭제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