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블루님의 "귀신과 초능력은 없는게 아니라 사람이 모르는게 아닐까요?" 글에 대한 답변으로 아래 내용을 작성하였습니다. '이어쓰기'로 위 글에 붙이고자 했지만 해당 탭이 활성화되지 않아 부득이 원글에 이어쓰기를 했습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악마는 존재하는가?
천국은 존재하는가?
귀신은 존재하는가?
종교학 연구자로서
어떤 기준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세상에 많은 신과 천국과 악마가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종교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종교(신화 및 전설 등 포함)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만, 종교학 연구자들은 교육과 학술활동 과정을 통해서 제법 많은 종교들의 세계관과 신관을 살펴보게 됩니다.
신을 인간과 비슷한 행위자로 상상하는 건 모든 사례들에서 공히 발견할 수 있지만, 신의 모습과 신이 사는 세상, 신과 경쟁하는 '사악한 신'의 모습이나 그들이 사는 세계(주로 지옥이죠)의 모습은 문화권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마다, 더 세세히 나눈다면 부족 수준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는 신, 사후세계의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런 걸 이것저것 보아오면, 자연스럽게 그런 존재의 실재성을 믿을 수는 없게 됩니다. 물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은 종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덕목이긴 합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상대의 믿음을 존중해 주는 태도가 기본 소양이 되는 것이죠. 연구를 위해 실제 종교인들과 접촉해야 할 경우들이 많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옳은 게' 있고 '그른 게' 있다고 가릅니다만, 그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니, '내로남불' 종교론이 되겠지요(나는 맞지만 넌 틀렸어). 종교학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관점을 가치 상대주의에 불과한 태도라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근대적 학문 활동의 기준점은 '휴머니즘 기반 윤리'와 '과학적 객관주의' 같은 것이겠지요.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 '어떤 종교는 사교(邪敎)다', '이단이다', '사이비다', 이런 게 발 붙이기 어렵습니다. 그런 연구는 통상 특정 종교 배경의 연구라서 적어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종교학 연구라 하긴 어렵습니다.
종교학에서는 통상 종교인의 가치판단(믿음)을 판단하지 않으려 합니다. 특정 신앙 배경의 종교 연구와는 그런 점에서 차별점이 있습니다. 신적 존재에 대한 태도도 보통 '불가지론' 정도의 포지션을 취합니다. ('종교 전쟁'이란 책에서 종교학자--김윤성--의 시각을 참조해 보세요)
종교학에서 신의 존재를 규명하거나 논증하는 일, 초자연적 현상의 존재를 규명하거나 논증하는 일 등은 '학술적 가치'를 평가받기 어렵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과학적으로 종교연구를 하자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귀신이나 초자연 현상이 존재한다'는 게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자연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는 건 사실이고, 그런 현상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초자연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과학이 모든 존재의 증명을 위한 절대도구가 되진 않겠습니다만, 무언가를 '증명'하는 행위에 가장 탁월하며 신뢰할 만한 접근 방법이 과학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마지노선이 되지 않을까요?
나만의 기준이 아니라 누구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현상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걸 확인한 후에야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과학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고,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했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하니, 그 현상은 존재해'라는 논리는 '초자연적 현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인정할 만한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울 겁니다.
지구 평평론자들이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는다고 '평평한 지구가 실재한다'고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을까요?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지만 실제로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죠.
인간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종교와 관련된 현상을 '과학'의 언어로 설명하려 할 때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설명이 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인지 편향에 의해서 귀신과 같은 존재를 떠올린다는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단순히 '착각'이라는 것만을 말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현실감 있게 느끼는 것들이 우리의 진화된 인지체계의 특성에 의해서 너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틀린'(착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귀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지 편향(착각)의 산물이다'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를 우리가 믿는 게 아니라 너무 현실감 있게 느껴져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며, 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다양한 인지 편향의 효과로 설명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귀신 같은 건 없어, 믿지 마'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강요를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지구평평론을 과학의 언어로 비난하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는 '과학적인 오류'라서 믿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고, 그 판단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믿음과 설명은 다른 차원의 문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 문제입니다. 개인 신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는 건 별개 영역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종교 현상을 '종교인의 기억, 발화'를 기준으로 다룬다면,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문화 현상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이야기는 내집단의 자기 확증형 서사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해당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같은 층위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후자의 이야기가 전자를 불가능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자의 이야기가 후자를 불가능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에 대한 믿음의 이야기와 과학의 이야기는 별개의 논리로 따로 있어도 나쁠 게 없어 보입니다. 양자를 뒤섞을 때 혼란과 불필요한 싸움이 빚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이 글은 '얼룩소'에 2022년 12월 19일에 게재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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