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최근 논문(1883-1910 한국 종교 용례 특이성)에 대한 윤조철 박사의 논평에 대해

오늘 최근 낸 논문(초기 종교 용례 연구)에 대해 윤조철 박사님의 질정을 받았다.


1. '근대적 종교 개념'이 무엇인지 설명될 필요가 있다

당연히 알겠지 싶어서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교정이 진행될 때 나도 파악한 문제였지만 후속작에서 수습하기로 생각했다. 근대적 종교 개념의 중요한 특징은 '정교 분리', '사적 믿음', '배타적 신앙'(종교는 '갖는다'고 표현하며 특정 단체에 소속되는 기준으로 판단하는 시각)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일제가 통감부 시절부터 '포교 규칙'을 수립하여 '종교 단체'를 규정하고 공권력의 영향을 항시 받게 만들면서 그 이전의 '교의 경험'과는 다른 토대를 만들었다. 그 근대적 특성을 내면화 하기까지는 제도의 도입 이후 시간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다.


2.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사용된 '국교'가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state religion과는 차이가 있는데 혼란스럽게 쓰였다

이에 대해서는 심사자의 지적도 있었다. 주3으로 갈음하긴 하였다. 이 글에서 쓰이는 '국교'는 state religion으로 이해하면 오해라고.


3. '세계대세론'의 발행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방원일 박사님의 논문(2021, "한국 개신교계의 종교 개념 수용 과정")을 참고하면 되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해서 빠뜨린 것 같다. 중요한 정보를 잘 인용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방원일, 2021: 10.


4. '언문일치'의 측면에서 용례 빈도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我が国の宗教」, 「我国之宗教」의 차이를 말씀해 주셨다.

한자로는 '교', '도'가 그러나 국문으로 넘어가면 한자식 낱글자 의미로는 부족해지는 감이 없지 않다.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흥미로운 문제 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내용에 관한 글을 발표해 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드렸다.


5. '종교'의 기의(의미)와 기표(표기) 상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 글에서는 양자가 구분되지 않고 쓰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용례를 통해서 의미를 추정하는 논의이기 때문에 그러한 한계는 충분히 지적될 수 있을 것 같다.


6. 신문 기사 용례 중에서 일본 신종교를 제외한 이유가 자의적인 것 같다

가령 정토종교회는 '종교' 사용례에서 배제한 반면에 태극종교회는 '종교' 용례로 보았기 때문이다(217쪽 주9).

해당 주에도 밝혔지만, '정토종' + '교회'를 '종교' 용례로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일본 신종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종교'가 명시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배제하지 않았는데, 그런 설명이 좀 부족했던 듯 싶다.


.   .   .

윤조철 박사님은 학부 때부터 거친 나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조언과 비판을 해 주셨는데, 심사자 외에 학문적으로 의미심장한 코멘트를 해 주셨다. 구형찬 박사님도 일전 술자리에서 한계도 말씀해 주시고 '가치'도 평가해 주신 바 있다.

오늘 윤박사님은 특히 내 해당 연구의 한계를 조목조목 말씀하시면서 후속 연구의 중요한 맥을 짚어주시기도 했다.

분명 당시 '국교' 운운한 것은 전근대적 상황에서라면 불필요한 것이었다. 헤게모니라는 것은 대상화 될 때 이미 붕괴된 현실을 보여주는 특성을 가지니 말이다. 진리는 그것이 진리라 불리지 않을 때 정말 진리인 것이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그런 면에서 '국교'를 말하는 것이나 '종교'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 과거의 양상과는 달랐다. 그러나 나의 논의에서는 그 새로움이 '단절적'인 게 아니라 '연속적'이라는 걸 말하고자 한 것이다. (서론에 "‘종교’ 개념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적어 놓긴 하였다)

한국의 종교 개념사 연구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 할 것이 많은 상황이라는 걸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스펙트럼으로서의 종교 개념' 같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단일한 근대적 종교 개념이 아니라 각각의 용례에서 강조되는 포인트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결들을 드러내는 식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정교분리' 같은 경우도 국가권력으로 종교 단체를 탄압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고, 종교 단체가 국가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다.

각자가 자리한 위치에서 이 말은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용이 되기 때문에 그 말의 구체적 함의는 미묘한 차이들을 가지고 있다.

국가-종교-개인 간의 근대성 형성의 도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근대적 경험'이라는 것이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 역학(제도, 지배구조, 대결 주체들 등) 안에서 어떤 패턴을 그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기회와 새로운 가능성을 벼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 과분한 것 중 하나가 같이 공부의 길을 걷게 된 98동기 형들이다.

같이 공부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 일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미신과 종교라는 개념에 담긴 '너는 틀렸고, 내가 맞다'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1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 ∞∞∞ ─── 미신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그게 무엇이냐 물어 본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들이나 관념을 이야기합니다. 뇌과학자 정재승 선생님도 미신 이야기를 하면서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행위가 불길하다는 미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정재승 편 미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할 때, 이렇게 미신에 속한 것들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시험 볼 때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시험 볼 때 포크를 선물한다' '손 없는 날 이사해야 한다' '밤에 손톱을 깎으면 안 된다' '귀신을 쫓기 위해서 팥죽을 먹는다' 그럼 '미신'은 어떤 것이냐 설명해 보라면, 아마 이런 말들을 늘어 놓게 될 겁니다. https://engoo.co.kr/blog/먼나라이웃나라-세계-각국의-다양한-미신들/ 표준국어대사전에 바로 그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미신' 항목 그런데 이런 개념은 일상에서는 그런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쓸 수 없는 설명입니다.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게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경제적 판단과 믿음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관상은 과학이다', 'ABO 혈액형 성격론', '과시적 소비' 등등. 어떤 종교적 맥락에서 '이상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미신'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종교와는 다른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위 국어사전의 개념 정의는 종교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신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어딘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미신'은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시하는 많은 개념은 편견의 산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서 그런 게...

미신에 대한 중립적 개념은 무엇일까?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5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본래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 ∞∞∞ ─── 미신, 사이비, 이단 이 말들은 종교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입니다. 미신은 종교적 의식(儀式)이지만, 종교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비과학적인 믿음을 통칭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이비(似而非), 말뜻은 ‘비슷하지만 틀린 것’이죠. 영어의 ‘pseudo-’에 대응되는 말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pseudo religion’이라고 하지요. ‘가짜’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사이비'란 말은 『맹자(孟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편에 수록된 말입니다.  孔子曰: 惡似而非者(공자왈: 오사이비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을 싫어한다." 출처: 다락원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darakwonchild) 이 언급의 자세한 맥락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세요( 사이비-나무위키 ). 겉만 그럴 듯하고 속은 빈 경우를 말합니다. 사이비란 말은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말하는 맥락에서 많이 쓰이게 되면서 애초 의미에서 '거짓 가르침'으로 변하였습니다(사이비과학, 사이비종교 등등). 이단(異端), 말뜻은 ‘끝이 다르다’이고, 의미상으로 ‘사이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집주』의 주자주(朱子註) 중 '맹자는 양주와 묵적과 같은 이단에게서 유교를 지켰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유교의 맥락에서 '이단'의 대표주자는 '양주와 묵적'입니다. 양주는 '위아설'(나만 위하면 돼), 묵적은 '겸애설'(모두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라)로 이야기됩니다. 유가들이 곡해해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가르침'으로 평가되는 것이지, 그리 허무맹랑한 가르침은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참고: 양주(전국시대)-나무위키 ...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은 많다?│시간과 종교적 본능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