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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부적, 우상숭배가 아니라 기본 장착된 것

'부적'이란 말이 쓰이면 왠지 기성 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무속이나 점복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언급될 것 같은 말이다.

그런데 '부적'의 일반적인 의미를 고려해 보면, 어느 종교에서나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종교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부적'이란 말의 의미를 짚어 보자.

한자어로서 '부적(符籍)'은 근대 이후에 등장한 말로 보인다. 과거의 기록, 가령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국세시기'(1849년)를 보면 '符'나 '帖'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표현들은 부적 역할을 하는 대상의 표현 방식, 물질적 상태, 사용 방식 등을 나타내고 있다.

글자의 의미를 고려하면 '부적'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액을 막거나 악귀를 쫓는) 문자가 쓰여진 종이로 어딘가에 붙이거나 소지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적은 그런 종이만을 말하지 않고 주술적 의미를 가진 상징물 일반을 칭할 때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의 용어라면 '주구(呪具)'나 '주물(呪物)'이라고 하는 말이 있기는 하다.

요즘 유통되는 '수능 부적'류 (출처: https://www.idus.com/w/product/33de1b97-57a1-43cf-b246-a8145d4c366d)


영어로 부적에 해당하는 말은 talisman, amulet, charm이 있다. 의미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말이다. 다만 어원론 상의 차이가 있다. 탈리스먼은 아랍어 tilsam, 비잔틴 그리스어 telesma에서('완성'이라는 의미), 애뮬렛은 라틴어 amuletum(저주나 질병에서 보호하는 것)에서, 참은 노래나 주문을 뜻하는 라틴어 carmen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어원론적으로 의미상의 약간의 편차가 존재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해졌다. 이 세 단어는 신비한 힘(주술적 힘)이 깃들어 저주나 위험(질병 등)으로부터 소지자를 지켜주는 물건 일반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특히 기독교적 맥락에서 부적은 신의 축복이 아닌 다른 영적 존재(초자연적 존재)의 힘이 영향을 끼치는 문자, 사물 등을 일컫는다. 그래서 신의 가호가 담긴 '신성한 물건'이나 '신성한 글자'는 '부적'과 구분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신이라는 대상에 대한 숭배를 강하게 의식하는 기본적인 종교-교리적 지향 때문에 부적을 쓰는 것을 '우상 숭배'의 일종으로 보고, 부적을 '우상'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부적은 반기독교적이고, 이교적인 문화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기독교의 자의적 구분일 따름이다. 일반화해서 보면, 부적은 '초자연적 힘'을 인간이 소유(접촉)를 통해서 기계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도구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방어막'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성물도 실상 그런 용도로 사용된다. 신의 의지는 '축복'이라는 사건에서만 작동하지 성물을 활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걸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관념이 적용된다.

이런 특성을 보여준 흥미로운 사례로 이런 것이 있다.

교황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했을 때의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9월 미국 하원 의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가 연설을 할 때 마셨던 물컵을 한 하원의원(Bob Brady, 공화당)이 가져가서 남은 물을 본인은 물론 아내 및 직원 2명과 나누어 마셨다고 한다. 그 의원은 그 물을 '성수'로 여겼던 것이다. (관련기사)

https://abcnews.go.com/US/meet-congressman-drank-popes-glass/story?id=34038875

기독교 역사상 '부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 초기, 아직 이교도 문화가 사라지기 전에 그런 예가 있었다고 하는 식으로 설명한다. 중세 초기 기독교 부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래의 그림도 그런 예이다.

https://chestofbooks.com/new-age/spirituality/Talisman-Amulet/Early-Christian-And-Medieval-Talismans.html

부적은 악마의 힘을 빌어오는 것이지만, 신에게 기도한다든지, 신의 메시지가 담긴 구절을 읽거나 암송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시각을 보여준다.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이러한 관념이 두드러진다.

4세기의 주교이자 교부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은 누구든지 시편을 암송하게 하십시오. "내가 드릴 말씀은 이것입니다. '주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새번역, 시편 41:4)”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간청함으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하늘의 지혜를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야, 네가 아플 때 지체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께서 너를 고쳐 주실 것이다(집회서* 38:9)". 사실 부적과 마법은 도움을 얻는 데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것들을 사용했다면, 그는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교도,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사람 [...] 구원을 가져다 준 십자가의 표시를 배신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십시오. 질병은 그 표시를 두려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악마 무리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경이로워 한다[Athanasius, De amuletis (Patrologia Graeca 26.1320)].

*집회서(Book of Sirach)는 기독교의 '제2경전' 혹은 '외경'으로 불리는 텍스트다. cf. Book of Sirach

사실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기도'나 '성경 구절'은 일종의 '주문(spell)'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부적과 마법을 신의 축복이나 기적으로 '바꿔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기능'에 주목해서 보면,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만 부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성화, 성경 구절이 담긴 액자, 자동차나 대문에 붙이는 물고기 엠블렘 등이 그런 현대적인 예가 될 것이다.

십자가가 대표적인 기독교의 상징물인데, 이것이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역사는 너무도 오래 되었다. 악령 퇴치에 이 상징물이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거의 상식이다.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은 그 자체로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리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신의 아들'이 그려진 그림은 그냥 단순한 그림과는 그 종교적 의미에서 당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고, 그 때문에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주술력을 획득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다. (종교의 언어로는 '축복'이나 '기적' 혹은 '신력(神力)'으로 표현되긴 한다)

신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구세주'의 이미지, 그 의미가 일상에서 퇴색 혹은 후퇴할 때(엄밀하게는 그 의미가 일상적으로 강화되지 않을 때), 이 상징물의 종교적 힘은 주술력으로 전환된다(고 썼지만 실상 '같은 기능'을 말함). 모든 상징이 주술적 대상으로 변환되는 데에는 상징물의 전통적인 성스러움의 내러티브가 일상화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표시하는 '의미'보다는 단순하게 기능적으로 그 '표식'이 활용되는 상황의 일이다.

현대적인 버전으로 가장 익숙한 것이 교회를 다니는 집, 혹은 기독교를 믿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주로 걸어 놓는 성서 구절 액자가 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상투적인 성서 구절에서부터 각종 다양한 신의 구제와 구원의 역사에 대한 증언이 여기에 들어간다.

성서 구절의 주술성이 두드러진 것이 있는가 하면 순수 신앙을 강조하는 형태도 있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공간에서 이것은 기능적인 '표식'의 역할을 하고, 액막이용 부적 처럼 집안의 '기독교적 신성함'으로 '무장된 상태'를 보여준다.

물고기 엠블렘은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 상징물 중의 하나이다. ΙΧΘΥΣ,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의 헬라어 첫 글자를 딴 것으로 합치면 '물고기'라는 의미라고 여겨진다(관련 설은 여러가지가 있다. 기독교 이전에 여신의 상징물로 물고기가 사용되던 관습이 있었고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 혹은 앞의 '구세주론', 히브리어에서 '물고기'가 '그리스도'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등). 기독교인의 집이나 차량에 이것이 붙어 있는 것을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표시하기 위한 상징인데, 초기 기독교에서 사용된 이후에 20세기에 다시 유행하기까지 명맥이 끊겨 있었다. 안에 글씨를 넣는 것은 현대적 버전이고 두 개의 호를 겹쳐서 표현한 물고기 모양이 전통적인 형태이다. 이것의 경우 특히 '부적'의 기능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적 상징물이 유일신의 '가호'와 연결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십자가 상징과 동등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부적의 기능'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상징을 '부적'으로 읽는 것은 해당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타락한 것이고 일종의 우상화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런 뿌리 깊은 인식이 기독교 내의 주술적 전통에 대한 '이교적 이해'를 공고히 한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종교적 인간'의 일반적 능력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종교적 상징의 기능주의적 활용의 예일 뿐이다.

모든 의미있는 것들, 성스러운 것들이 일상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핵심 의미는 주의를 기울여야 환기되는 것이다. 그러한 주의는 일상적인 의식일 수 없다. 일상 안의 성스러운 물건으로 기능하지만 거기에 '일상화의 경향'은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것을 '탈신성화'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작용에 대한 가치평가를 지나치게 개입시키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 경향을 관찰하고 기술하는 수준에서는 무가치하고 어떤 면에서는 소모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런 버전의 사유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사안 중의 하나는 '한국 기독교의 기복적 모습'에 대한 것이다. 그 신앙 양상을 묘사하는 많은 기독교의 언어는 이것을 한국 샤머니즘적 잔존이라거나 한국 샤머니즘과의 습합으로 묘사하는 데, 세계 도처의 기독교 전통을 들여다 보더라도 '하위 문화 형태'로의 '일상적인 하강'은 일반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일상에서 발휘되는 기본적인 종교적 능력'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관심에서 배제해야 할 태도는 '반기독교적 태도'나 '하위 문화 비하적 태도'이다. 기독교의 부적은 타락의 징표나 대중 기독교인들의 무지몽매함의 발로가 아니다. 신학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정당화되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종교적 성향, 사고방식의 발로로 이해할 때에 신학적 배척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을 바꿔가며 끈질기게 유지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기독교 부적을 생각해 보는 유익한 점 중의 하나는 인간의 종교적 현상이 종교 내적인 교리적 설명 체계에서 벗어나 존재한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래야 한다'는 당위론이 종교 현상을 담지 못한다. '왜 늘 그렇게 행동하고 상상하는가'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으로부터 추론될 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얻게 된다.

참고자료:
Early Christian Amulets: Between Faith and Magic
Archaeological Views: Christian Amulets—A Bit of Old, a Bit of New
"Miracle or Magic? The Problematic Status of Christian Amulets"
성경 구절, 부적처럼 갖고 다니거나 차에 새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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