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가 되는 사례는 예부터 적지 않았습니다. 가령 유교의 주요한 개념들은 우리가 일상어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에 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기운’, ‘음기’, ‘예의’, ‘윤리’, ‘의리’, ‘사양(辭讓)’, ‘인간’, ‘천하’, ‘신주단지’ 등입니다.
'순리에 따라라.' '오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객기 부리지 마.' '예의 좀 챙기세요.' '너는 의리가 있어.' '뭘 그리 신주단지 여기듯 하니?'
이런 말들은 이미 유교적 맥락을 떠나서 우리의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한편 불교도 한국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 용어가 일상어가 된 사례들도 많습니다. 가령 ‘건달’, ‘야단법석’, ‘이판사판’ 같은 말입니다. 물론 불교적 의미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건달'은 '간다르바gandharva'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건달바(乾闥婆)' 등으로 음차된 말입니다. 애초 "긴나라(緊那羅)와 함께 제석천(帝釋天)을 모시면서 음악을 담당하는 천신(天神)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그 외의 불교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 지금은 "하는 일 없이 빌빌거리며 노는 사내나 난봉이나 부리고 다니는 불량한 사람 혹은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야단법석’ 같은 경우 애초 의미는 법당 밖에서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법회를 위해 마련한 야외 법단을 일컫는 말인데, 일상어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의미 변형은 조선조 유가의 편견어린 왜곡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박재양, 「일상어 속의 불교 유래어 연구」, 『어원연구』 3 (2000), p. 63).
무속 혹은 일반적인 종교적 관념에서 나온 말에는 ‘얼빠진’, ‘넋나간’, ‘얼차려’, ‘푸닥거리’, ‘신명’, ‘신바람’, ‘단골’, ‘빌미’, ‘선무당’ 같은 말이 있습니다.
‘푸닥거리’는 일상어 맥락에서는 군대의 선임이나 학교의 선배가 후배에게 정신교육 명목으로 구타나 기합을 주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무속에서는 “잡귀에 의해 살이 들거나 부정한 것이 들어와서 병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이를 쫓기 위해 행하는 작은 규모의 무속제의”를 말합니다(김선경, 「(알고 쓰는 말글)푸닥거리」, 《경향신문》 2016.5.12.; 「푸닥거리」,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기독교 개념 중에서는 ‘세례’나 ‘십자가’가 일상어로 사용되곤 합니다. ‘세례’의 경우 ‘물세례’, ‘주먹세례’, ‘소나기 세례’ 등 “어떤 사건이나 현상으로 받는 영향이나 단련 또는 타격”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됩니다(「세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표식인데, 일상의 맥락에서는 “존경‧명예‧희생‧속죄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십자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아울러 ‘갓-’이라는 접두어나 ‘-느님’이라는 접미어도 본래의 종교적 맥락을 떠나서 사용되고 있습니다(「느님」, 《나무위키》).
일상어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그 의미를 쉽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그 의미가 특정 종교에 부정적일 경우에 그 종교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사용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면 확산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 용어가 사용되었다면 해당 종교의 사회적 지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ex. ‘야단법석’, ‘푸닥거리’ 등). 이런 면에서 일상화된 종교적 표현은 해당 종교적 관념의 사회사적 함의를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사용되는 종교적 표현은 종교 개념의 일상어화의 결과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하는 물음입니다.
종교적 개념이 사용되는 신조어
최근에 유행한 몇몇 신조어들은 종교적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것도 있고, 일반적인 종교적 관념이 투사된 것도 있습니다. 유행이 좀 지난 사례로는 ‘지름신’, ‘지옥불반도’, ‘헬조선’, ‘-느님’ 등이 있고, 최근에 한창 유행하는 신조어는 ‘갓생(살기)’입니다. '갓생(살기)'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룬 바가 있습니다.
'갓생' 같은 신조어에서 종교적 상상력(+실천)을 읽어보면 안 될까?│'갓생'(god+生) 추적기(1) 소셜 데이터로 '갓생'의 의미 변화를 추적해 봤다 │ '갓생' 추적기(2) '갓생'과 '리추얼'의 결합에 보이는 손이 있다?! │ '갓생' 추적기(3) '갓생'의 종교적 잔상 │ '갓생' 추적기(4) 끝
이 용어들은 종교적 개념이 쓰이고 있지만, 종교 전통의 표현 자체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인터넷 성지’처럼 대중적으로 익숙한 종교적 개념(신, 지옥 등)을 활용한 인터넷 신조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몇몇 사례에서는 명확하게 종교의 개념을 차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접두, 접미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최상(하)의 가치평가’를 위해 사용합니다. ‘헬-’, ‘갓-’, ‘-느님’ 등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지역, 인물, 음식, 사물, 특성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어 표현됩니다. ‘헬조선’, ‘유느님’, ‘연느님’, ‘치느님’, ‘갓겜’, ‘갓벽’ 등이 그런 사례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경우에 따라서 비꼬는 의미로 사용될 때 반대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갓갓 갓갓갓’ 사례. cf. 「용암 광전사」, 《나무위키》). 이 표현은 그러나 일상어 수준까지 확산되지는 않은 걸로 보입니다.
‘지름신’은 이러한 사례와 다소 결이 다른 종교적 신조어입니다. 2004년 무렵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지름신’은 ‘지르다’는 표현과 한 온라인 게임(마비노기)의 ‘렉신강림’이 만나서 만들어진 표현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널리 확산된 계기는 한 만화의 장면을 패러디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아래 그림). 여기에 나오는 인물은 한 만화에 그려진 (가짜)예수였습니다.
일명 ‘지름신 짤방’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충동구매)
‘지름신’은 충동구매를 정당화하는 밈이 되었습니다. ‘지름신이 내렸다’ 혹은 ‘지름신 강림’이라는 정형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름신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해탈’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만화 속의) 예수 이미지, 불교 개념 등 일반인이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종교 이미지와 개념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개념화를 통해서 충동구매에 대한 자기 정당화 서사를 만들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소비에 의해 발생하는 죄책감을 경감시키는 용도로 신(神)개념이 활용된 사례로 종교적 관념의 위로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조어 속에 나타나는 신은 인간에 필요에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충동구매를, 지름신이 빙의해서 지름신의 의지가 발휘된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정말 그런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게 아닙니다. 충동구매의 죄책감을 지름신 이야기로 완화시키는 것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지름신은 ‘지역신(local god)’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만합니다.
지역신이라 불리는 대상들은 통상 민속신앙/종교에서 나타나는 신을 지칭하는데요, 기능적 특성이 두드러집니다. 지혜의 신, 농경의 신, 어로의 신 등등이 이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활동, 특히 생산 활동과 관련해서 특화된 기능을 발휘하는 신격들입니다. 이런 신들은 유일신 전통의 신들과는 표상되는 모습이 사뭇 다릅니다. 사람들은 지역신/기능신을 특정한 이기적 동기에 봉사하는 존재로 여기며, 적당한 공물을 바치고, 그의 가호의 '사용권'을 얻는 식으로 활용합니다.
신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어떤 고도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아닌 자연스럽고 직관적인 기대에 근거)는 동서고금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신 이해입니다. 심지어 유일신교에서도 그런 식으로 신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통상 대중 신도들의 '저급한 신앙'으로 폄하되기 일쑤입니다.
프로이트는 '강박 행동과 종교적 행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류는 부정한 것, 사회적으로 해로운 본능을 신들에게 되돌림으로써 이를 본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단으로 삼았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서울: 열린책들, 1997, p. 201.
온라인 신조어 속에서 사용되는 종교적 개념, 특히 신 개념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종교적 관념에 잘 부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사례는 종교적 관념(신)의 필요성(본능의 정당화와 안전의 욕구)에 대해서 교리적 이해와는 별개로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에 부합하는 기대(초자연적 존재의 개입)가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의 질문에 답을 내려보면, 온라인의 종교적 신조어는 아주 간단한 종교적 개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영향은 아주 미약해 보입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종교적 상상/기대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얼룩소 글(23.7.13)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라는 주제를 다루려면 '위로'가 필요하다? 이 말을 저는 곳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정재승 박사가 총괄자문 및 프리젠터로 참여한 다큐 시리즈 '뇌로 보는 인간'의 마지막 '종교' 편에 제가 자문으로 참여하여 아주 짧은 시간 출연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시청률이 높았던 편이 아니라서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우연히 EBS 다큐를 보던 친구가 '야, 너 나왔더라...잠깐 ㅎㅎ', 이런 반응을 보인 예가 있었을 뿐입니다. 함께 자문에 참여한 구형찬 박사(인지종교학)가 종교학자로서는 메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뇌로 보는 인간' - 종교 편의 한 장면┃저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그때 나왔던 미디어 비평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스 기사 캡쳐 해당 다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다음에 이런 논평을 내 놓았습니다. 미디어스 관련 기사 '위로가 없다'는 비판 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종교라는 주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종교의 본질', '참된 의미' 같은 것을 발견하고, 뭔가 진리의 말씀이나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종교학도 존재합니다. '현대인의 종교는 병들었다'는 진단을 내리며 '고대인의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거나 모든 종교에 담겨있는 가장 고귀한 가르침(가령 황금률 같은)은 모두 상통하고 그것이 인간이 향유해야 할 소박하지만 분명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예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출처: Wikimedia Commons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 뮐러는 '종교학으로의 초대(Introduction to the Science ...
흥미로운 신경과학 연구 소개를 봤습니다. 친숙한 것과 중요한 것을 먼저 식별하는 뇌 경로에 관한 연구입니다. '신경종교학'에 참고가 되는 논문일 것으로 판단되어,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 * * Brain Circuit Identifies What’s Familiar, Important, or Just Background┃Neuroscience News.com 요약 : 과학자들은 기억과 감정을 통합하여 감각 정보를 빠르게 평가하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뇌 회로를 발견했습니다. 내측후각피질(entorhinal cortex)과 해마(hippocampus) 사이의 이 직접 피드백 루프를 통해 뇌는 중요한 광경과 소리를 거의 즉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알려진 더 느린 경로와 달리, 이 회로는 관련 자극과 배경 소음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PTSD와 자폐증과 같은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발견은 뇌가 정보를 걸러내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감각 및 기억 관련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 ─── 익숙한 것을 한눈에 알아보는 뇌 회로, 해마의 비밀 우리는 왜 친숙한 얼굴이나 물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처음 보는 것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런 능력 뒤에는 우리의 기억 이 큰 역할을 합니다. 뇌의 해마(hippocampus)라는 부분이 과거의 기억을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 들어오는 감각 정보와 비교하여 이것이 익숙한지 새로운지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해마는 “이건 예전에 봤던 거야” 혹은 “처음 보는 거네”라는 신호를 뇌의 다른 부분에 보내 우리의 인식을 조절합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중요한 새로운 정보 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미 아는 것은 배경 소음처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해마는 특히 대뇌피질의 한 부분인 내후각 피질 (entorhinal cortex)과 긴밀히 소통합니다. 내후각 피질은 오감에...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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