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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reatyse of the Newe India의 원출처를 찾아서

1553년 본 표지에서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 리처드 이든(Translated out of Latin into Englishe. By Rycharde Eden)'에만 주목했었는데, 제목을 보면 이 책이 어떤 책을 저본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A treatyse of the newe India with other new founde landes and islandes, aswell eastwarde as westwarde, as they are knowen and found in these oure dayes, after the description of Sebastian Munster in his boke of universall cosmographie 세바스티안 뮌스터가 우주지리 에 관한 그의 책에서 기술한 이후로 오늘날 알려지고 발견되는, 동쪽으로나 서쪽으로도, 다른 새로이 발견된 땅과 섬과 함께 새로운 인도에 관한 논의 뮌스터의 대표작이 Cosmographia (1544)이다. 지금으로 치면 '세계지리백과사전'쯤 될 것 같은 책이다. 1544년에 독어본이 출판되었고, 1550년 독어본 5판과 함께 라틴어 본이 출판되었다( 참고 ). 이든이 참고한 책은 라틴어판이니까 바로 1550년 라틴어본이 저본이라고 할 수 있다(이든의 번역판이 1553년판이니까). 확인한 책은 1552년 바젤에서 출판된 버전이다(Basileae : apud Henrichum Petri, 1552) 이 책의 1099쪽을 보면, "De Novis Insvlis, quomodo, quando & per quem"(새로운 섬들에 대해, 어떻게, 언제 그리고 누구에 의해)라는 제목을 볼 수 있다. 그림 아래에 콜럼버스의 1차 항해의 출발 과정과 출발 후 첫 기착지에 대한 그의 인상을 적고 있다. '온화한 기후로 하늘의 축복을 받은 곳에서 원주민들이 religio도 부끄러움도 없이 벌거벗고 있다'는 내용이다. 영역자인

카나리아 제도 사람들은 종교도 없이 벌거벗고 있었다…출처를 찾아보니?

조너선 스미스의 이 글은 '종교개념사' 연구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글 중 하나인데, 원출처를 확인해 보는 경우가 흔치는 않다. 발심을 하여 해당 내용의 원출처를 찾아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나오는 저 말, 리처드 이든(Richard Eden, 1521?-1576)이라는 인물이 썼다는 저 글귀는, 서구의 religion 개념이 확장되어 나갈 때 초창기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들은 종교가 없다'. 카나리아 제도에 콜럼버스가 도착해서 경험한 바를 표현한 것이다. 이 제도를 지나간 것은 그의 모든 서인도 제도 탐험에서 서인도로 향할 때였다(1차: 1492–1493, 2차: 1493–1496, 3차: 1498–1500, 4차: 1502–1504). 그러니까 위 기록은 1492년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Voyages of Christopher Columbus", wikipedia 콜럼버스가 그곳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의 주민들은 부끄러움이나 religion 혹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도 없이 벌거벗고 있었다. 이 내용이 실린 책  A Treatyse of the Newe India (1553)를 시대가 좋아져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세바스티안 뮌스터(Sebastian Münster, 1489-1552)라고 나오고 리처드 이든은 영역자로 나오는 것이었다! Internet Archive에서 1553년 본을 찾아 보면, 길게 부제와 설명이 적힌 다음에 이렇게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Translated out of Latin into English. By Rycharde Eden 이걸 확인하고 조너선 스미스도 원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을 보면, 1553년판에는 'religiō'로 적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알아보기 용이한 1885년판의 표지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책 타이틀은

CT 스캔으로 밝혀진 천 년 된 불상 속 미라

불상 속에 미라가 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이야기를 과문해서 들어보질 못했는데,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2015년에 불교계에서는 떠들썩 했던 뉴스였던 것 같다. 이미지 출처: 드렌츠 박물관 2014년에 네덜란드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시의 미앤더 메디컬 센터(Meander Medical Centre)에서 이 불상에 대한 의학적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의뢰자는 네덜란드의 드렌츠 박물관(Drents Museum)이었다. 불상은 오스카 판 오버헤임(Oscar Van Overeem)이라는 네덜란드 미술품 수집가가 구입해서 드렌츠 박물관에 전시했던 것 같다. CT를 찍고, DNA 검사를 위해 뼈 샘플을 채취하고, 내시경을 이용해 내부 조사와 샘플 채취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해당 불상의 내부에 승려의 미라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장기는 제거되어 있었고 속에는 한자가 인쇄된 종이와 확인되지 않은 썩은 물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드렌츠 박물관 불상 내부의 인물은 서기 1100년에 사망한 불교 승려 류콴(Liuquan)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쪽 자료를 찾아보니 章六全(Zhang Liuquan)이 한자명인 듯하다. 중국에서는 통상 章公祖師(Zhanggong Zushi, 장공조사)라고 부르는 것 같다. 2015년 헝가리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미라 전시회를 통해 중국 쪽에서도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반환 소송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소송에서는 중국의 소송 당사자인 푸젠 지역의 양춘과 동푸 촌민위원회 쪽 소유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반환을 인정하지 않았다(아무래도 소송 당사자성이 문제된 듯하다). 반면 중국 국내 재판에서는 당연히 해당 마을의 소유로 인정하고 반환하도록 판결이 이루어지고 있다(22년에 2심 판결이 있었다).  이런 송사 이슈도 관심을 끌지만(법적으로 시신으로 봐야 할지 물건으로 봐야 할지 논란이 있다고 한다), 종교학 공부인에게는 '사자 숭배'의 한 양식으로서 미라 불상 숭배 양

핼러윈 축제의 기원은 무엇일까? 역사 속에 감추어진 본능을 찾아서

만성절(All Saints' Day)로 알려진 핼러윈 * 이 머지않았다. 누가 귀신과 유령이 출몰하는 날로 믿을까만 21세기 유흥 소비 시장에서 여전히 각광을 받는 축제일이다. * 핼러윈(Halloween)의 한국어 표기에 대한 논란이 있다. 통상 '할로윈'을 많이 쓰나 '핼로윈'을 쓰기도 한다. 로마자 표기 규칙에 따르면 핼러윈이라고 한다. 참고1 , 참고2 . 한국 사람들에게 핼러윈은 그리 친숙한 축일은 아니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향유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핼러윈으로 떠들썩한 곳이 서울 등 몇몇 대도시의 주요 유흥가인 것으로 보면 말이다. 이 날의 기원이 무엇인가가 핼러윈을 기념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아니겠지만 호사가의 관심사는 될 수 있을 것이다. ─── ∞ ─── 핼러윈 축제는 고대 켈트족의 사우인(Samhain) * 축제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라서 '모닥불을 피우고 유령을 쫓기 위한 의상을 입는' 축제로 여겨지기도 하고, '무덤이 열린다고 여겨지는 날 모여서 축제하는 날'로 여겨지기도 한다. * 한국에서 이 발음을 '삼하인'으로 적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 발음대로 적으면 '사우인'이다. 날짜로는 11월 1일(현대 달력 기준)을 말하는데, 통상 그 전날 밤부터 시작된다. 고대 켈트족 시간관은 해가 질 때 날짜가 바뀐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 11월 1일은 '겨울의 시작' 혹은 '새해 첫 날'로 간주된다고 한다. 하루의 시작도 일몰 이후로 보니, 한 해의 시작도 겨울부터 꼽는 듯하다. ** * Ó hÓgáin, Dáithí. Myth Legend and Romance: An Encyclopaedia of the Irish Folk Tradition . Prentice Hall Press, 1991. p. 402.  ** 켈트족은 한 해를 빛의 반년과 어둠의 반년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어둠의 반년

'인터넷 때문에' 말이 바뀌고 있다?!

'인터넷 신조어'는 '언어파괴'로 규정되곤 한다.  출처: 알바콜 신조어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한글 파괴'와 '세대차이'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불편한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대체로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소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분위기가 다르다. 출처: 시민의 소리, 청소년 대상 조사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언어 습관이 정상이 될 날이 오리라는 걸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 사용 습관과 새로운 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이런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본 〈인터넷 때문에〉라는 책은 이런 시각으로 인터넷 환경에서 우리의 언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본다.   '스낵 지식서'는 아니니 쉽게 읽을 수 있을거라 기대는 말라 그레츤 맥컬릭(Gretchen McCulloch) * 의 〈인터넷 때문에〉의 원제도 놀랍게도 'Because Internet'이다. 제목을 직역한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놀라운 시도다. 왜냐면 책 제목이 입에 착 달라붙지 않기 때문이다. 부제는 원래의 부제와 다르게 갔다. 원래는 'Understanding the New Rule of Language'(언어의 새로운 규칙에 대한 이해)이다. 상당히 학술적 느낌이 강한 부제다. * 자신의 홈피 에 발음기호를 /ɡɹɛtʃn̩ məkʌlɪk/이라고 적어 놓았다. 다만 부르는 사람이 익숙한 발음대로 불러도 자긴 상관없다고 밝히고 있다. 영어권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경우가 흔치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이름 발음과 표기에 오해가 얼마나 많은지 자기 성(last name) 발음에 대해서 설명을 길게 해 놓고 있다( 참고 ). 책에서도 관련 언급을 볼 수 있다(74쪽). 번역서에는 '그레천 맥컬러'로 옮겼는데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발음으로 보인다. 한국어 부제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누가 한 말일까? 스피노자인가 루터인가? │ 오귀인 사례 (5)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명언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어렸을 때 이 말을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의 말인지 궁금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우연히 이 말의 최초 발화자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말도 오귀인(misattribution) 된 말인가,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찾아봤다. 그 결과를 정리해 본다. ─── ∞ ───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스피노자'가 한 말로 여겨진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서 찾아보면, 관련 언급을 1962년 4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來日 世界의 終末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스피노자」인가 누군가가 말했다지만.. 기사를 통해서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지만 과연 기자가 지어낸 것인지, 어느 출판물에 언급된 것을 인용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에 국내의 최초 언급 사례로 1966년 기사가 지목되었는데(참고: [팩트체크] 내일 지구가 …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 조선일보 자료가 최근에(2020년) 서비스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최초 출처는 새로운 데이터가 나오면 향후에 충분히 업데이트 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의 발언자가 '스피노자가 아니다'라는 글들은 의외로 많이 보인다(구글검색 결과).  여러 글들을 검토해 보면, '스피노자가 한 말이다'라는 건 한국에서만 유행한 듯 싶다. 구글 검색으로 'Even if I knew ... apple tree'를 찾아보면 대부분 마틴 루터를 언급하고 있고, 일부 게시물에서 루터도 아니고 1944년 독일에서 해당 발언을 루터에게 돌리는 한 목사의 발언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Whi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는 누가 한 말인가?│오귀인 사례 (4)

문과vs이과 싸울 필요가 없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괴테말이 아니다. 'Direction is more important than speed'는 리처드 L 에반스의 Faith in the future (1963)에 나온다. 비슷한 괴테의 말이라 여겨지는 인용구(있는 자리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우리에게 낯선 올리버 웬들 홈즈 1세(Oliver Wendell Holmes Sr.)의 말이다. 문이과 대전으로 다시 소환되었던 이 명언은 일반적으로 '괴테'의 말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슈는 이 명언을 누가 했느냐가 아니라 '속도'라는 표현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속도가 아니라 속력임 (이 무식한...??) 속도는 벡터니까 방향을 포함하는 말이다. 방향과 대비되는 의미니 '빠르기'만 나타내는 '속력'(스칼라량)으로 표기하는 게 맞다. 지극히 이과스러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이에 대한 논리적 반박(문과생일지는 모르겠으나)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이것이다(출처: 문과vs이과, 논쟁의 현장 ).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즉,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벡터값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방향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며, 이는 구성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예시 :  *오빠, 고맙긴 한데 나는 가방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루이비통과 프라다를 좋아하는 거야. *아들아,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종이쪼가리가 든 봉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돈 봉투를 좋아하는 거란다. '속도' 사용이 별문제가 아닌 이유는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는 반박 외에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있다. 일상과 학문, 구분 못하는 건 누구? 원문을 근거로 번역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보자. 영어 원문이 'Life is a Matter of Direction, Not Speed.'로 되어 있다. 벡터인 velo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