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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종교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논의를 다루는 학술 대회

※이 글은 얼룩소 글(23.6.29)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KAIST 인간의기원연구소 1회 학술대회의 주제로 '종교의 기원'이 다뤄지게 되었습니다. 저도 프로그램 기획과 발표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2발표). 프로그램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출처: KAIST 인간의기원연구소 진화인류학자, 심리학자, 종교학자가 모여서 '종교의 기원', '과학적 종교 연구'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발표와 강연을 진행합니다. 저와 구형찬 박사는 '인지종교학'(Cognitive Science of Religion) 연구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인지종교학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종교 행동과 관념을 구형찬 박사가 소개해 주십니다. 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적 사고와 행동에 횡문화적 보편성과 다양성이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와 인지체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이 질문에 답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저는 과학적으로 종교를 연구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연구 대상의 문제(종교라는 개념)를 다룹니다. 과학vs종교의 흑백논리나 과학적 호교론(종교 정당화)을 넘어서 인간의 종교적 행동과 종교문화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종교'라는 대상이 잘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들의 한계를 살펴보면서, 과학적 종교연구를 위해 종교 정의 측면에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조셉 불불리아(Joseph Bulbulia)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지종교학, 종교심리학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불불리아는 종교적 행동과 감정이 인간의 친사회적 행동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다양한 심리실험적 연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 강연에서도 그러한 자신의 연구를 소개해 줄 것입니다. 3부 1...

종교와 환각제(+마약), 그리고 마음의 비밀

※이 글은 얼룩소 글(23.6.27)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와 환각제의 관계는 그 비유적 의미('종교는 민중의 아편')에서 '중독'과 해악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종교인들이 맹목적인 신앙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고 판단될 때, '종교의 중독적 성격'이 주목되곤 합니다(" 종교가 아편이 될 때 "). '종교 중독(religious addiction)'이라는 표현은 개신교계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이 경우 '종교 중독'은 '해로운 신앙 생활'로 간주되며, 대체로 이단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종교중독, 신앙의 열심으로 포장된 보이지 않는 질병 ", " 유사종교 중독과 영지주의 ", " 사이비 종교 세뇌, 마약중독 같아 "). 그런데 종교와 환각제는 실질적 차원에서도 밀접한 관계를 지녀왔습니다. 종교 의식에 환각제가 쓰이는 경우가 있었고, 환각제 경험을 통해서 종교적 체험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도박, 알콜, 컴퓨터, 약물 중독이 보통 중독의 대상으로 이야기된다. 출처: 헬스 경향, https://www.k-health.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3 종교 활동과 환각제의 밀접한 관계 '종교적 체험'은 보통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체험과 분리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러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합리적인 의식 상태라고 부르는 정상적인 각성 상태의 의식은, 아주 얇은 막에 의해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지 하나의 특별한 의식 상태일 뿐이다. 반면에 거기에는 잠재적 형태의 의식상태가 전혀 다른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 그것들은 일상적 의식 상태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한길사, 1999), 470쪽. 윌리엄 제임...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란 말은 마르크스만 한 말일까?

※이 글은 얼룩소 글(23.6.22)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저는 출처 오귀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소문이나 가짜 뉴스를 사람들이 사실로 믿는 현상을 통해서 인간이 신화와 종교를 만들어 향유하는 방식을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에 마르크스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말의 참 뜻을 살펴본 김에 이 표현이 과연 마르크스의 순수 창작물로 볼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https://famosos.culturamix.com/historicos/karl-marx 칼 마르크스의 반종교적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던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사용자들을 떠올리는 것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비슷한 표현이 사용된 이전 사례는 많았습니다. 하인리히 하이네와 모세 헤스, 출처: 위키피디아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와 모세 헤스(Moses Hess, 1812-1875)라는 사람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하이네는 괴테 시대에 활동한 시인으로 신랄한 풍자와 허무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합니다. 헤스는 마르크스와 같이 《라인 신문 Die Rheinische Zeitung 》을 만든 바 있는 인물입니다.) 하이네는 “종교를 갖게 된 걸 환영한다. 종교는 고통 받는 인류의 쓰디쓴 잔에 영적 아편 의 달콤하고 최면적인 음료와 사랑과 희망 그리고 신앙의 음료를 붓는다”(1840)고 말했으며, 헤스는 “ 종교는 … 아편이 고통스러운 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 농노 신분의 불행한 의식을 견디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1843)고 말한 바 있습니다. *  *  Löwy Micheal, The war of gods: religion and politics in Latin America , London; New York: Verso, 1996, p.5. 마이클은 “동일한 문구를 다양한 맥락...

델포이 신전, 종교문화의 지층을 보여주는 사례┃델포이 신전의 E 심볼의 비밀(3)

※이 글은 얼룩소 글(23.6.15)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https://www.john-uebersax.com/delphi/delphi1.htm 지금까지 '델포이 신전의 E 심볼'과 관련된 흥미로운 학계의 논의를 두 차례에 걸쳐 살펴봤습니다. 델포이에서 아폴로는 테미스를 쫓아냈을까?┃델포이 신전의 E 심볼의 비밀(1) - 베이츠의 가설 '델포이 신전의 작은 옴파로스'는 옴파로스가 아니다?┃델포이 신전의 E 심볼의 비밀(2) - 부스케의 가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격언의 출처를 탐색하다가(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 델포이 신전과 관련된 각종 흥미로운 이야기들(E 심볼, 옴파로스, 대지의 여신 등)을 보게 된 김에 관련 내용을 정리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부스케'의 가설에 비판적 입장을 보여준 '드 보어(Zeilinga de Boer, 1934-2016, 미국 지질학자)'의 논의를 중심으로 해서 'E 심볼의 비밀'은 어떻게 되고, 델포이의 본래 신앙이 대지의 여신에 기초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델피의 작은 '옴파로스'에 관한 수수께끼 옴파로스에 대한 드 보어의 논문과 드 보어(인물 이미지 출처: https://patch.com/connecticut/middletown-ct/obituary-jelle-zeilinga-de-boer-longtime-teacher-wesleyan-university) 부스케의 시나리오를 다시 말씀 드리면요. 기독교 역사 초기에 프로스퀴니타리(작은 성소)의 돔으로 사용 된 구조물이 나중에 카스트리 지역(델포이의 옛 이름)의 벽이나 건물 수리에 사용되어 그 일부가 되었다가 산사태 또는 마을 철거 중에 어떻게든 사원의 셀라(cella)로 들어갔다. 20세기 초 이 돔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작은 옴파로스'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의 진정한 의미는? 종속변수로서의 종교

※이 글은 얼룩소 글(23.6.12)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누구나 이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종교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되는 말입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헤겔 법철학 비판》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의 〈서문〉에서 한 말입니다(“Die Religion ... ist das Opium des Volkes”). 이 표현의 메시지는 통상 이렇게 이해됩니다.  종교는 대중을 환상으로 중독시키기만 할 뿐 어떠한 실질적인 구원도 이루지 못한다.  아편의 비유는 지배집단과 피지배(노동)집단의 구분 하에서 전자가 후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허위의식을 갖게 하는 장치로서의 종교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부분을 앞뒤로 살펴보면, 지금 '아편'이나 '마약'을 떠올리면서 부정적으로만 보는 해석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당 〈서문〉에서 "인민의 아편"이란 표현이 등장한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상의 불행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의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을 상실해버린 현실의 정신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홍영두 옮김, 서울: 아침, 1988, 187-188쪽. https://awestruckwanderer.wordpress.com/2014/11/27/marx-on-religion-the-opium-of-the-people-from-contribution-to-the-critique-of-hegels-philosophy-of-right/ ...

21세기임에도 종교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이 글은 얼룩소 글(23.6.5)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나 미신은 비합리적인 사고의 산물로 여겨졌습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학자들이 이성의 승리와 맹신의 퇴조를 예상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막스 베버라는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처: azquotes.com 우리 시대의 운명은 합리화와 지성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의 탈마법화’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명확하게 궁극적이고 숭고한 가치는 공공 생활에서 신비로운 삶의 초월적 영역이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인간관계의 형제애로 후퇴했다.  -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Science as a Vocation)』 비합리적인 맹신의 세계(종교)는 그렇게 힘을 잃어버렸을까요? 20세기에서 21세기를 통해서 그러한 예상은 국지적, 한시적으로는 참이었지만, 인류 전체로 볼 때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보였습니다. 오히려 종교사회학자들은 '세계의 재마법화' 혹은 '재성화'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고, 세계적으로 볼 때 종교 인구는 그렇게 감소하지도 않았습니다. 출처: https://www.pewresearch.org/short-reads/2017/04/05/christians-remain-worlds-largest-religious-group-but-they-are-declining-in-europe/ 2015년 Pew Research Center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약 84%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2050년까지 종교 인구의 변화를 추정한 바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https://www.pewresearch.org/religion/2015/04/02/religious-projections-2010-2050/ 세계 인구 증가와 함께 기독교(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등)와 이슬람교 인구가 증가하는데, 특히 이슬람교 인구...

부처님과 신령님의 복도 배달이 되나요?

※이 글은 얼룩소 글(23.5.29)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어머니의 단골 무당과 4월 초파일 하루등 몇 년 전 4월 초파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동생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 무당을 어머니는 '시엉 엄마'라고 부릅니다. 그 호칭은 '수양 어머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시엉'이라는 말이 충청도 방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이팔기 ', 한국민속대백과), 정확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싱아'의 충청도 사투리가 '시엉'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고 ). '수양'이란 말을 '시엉'으로 쓰는 사례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것 같습니다(' 기생의 은어 '). 예전에 '단골 무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의 한 버전인 듯 싶습니다. 수양어미-딸의 관계를 무당과 그 고객이 맺음으로 해서 가정 대소사의 종교적 측면(주로 기원, 액막이 등)을 무당이 담당하게 되는 형태입니다. 어쨌든 부처님 귀빠진 날, 절에서 '하루등'이라는 걸 달아 놓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하루' 동안 달아 놓는 '연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기에 아마 기원을 하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적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불교 풍속을 따라서 무속인들의 집에서도 하루등 달기를 4월 초파일에 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초파일 날 그 단골 무당을 찾아가 '하루등'을 다신다고 주소를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사코 됐다고 했으나 물러서지 않을 자세셨습니다. 일단 우회로를 찾고자 다른 이모님과 통화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이모님 설득에 들어갔습니다. 연등 아래 다는 등표에는 '주소'를 쓰게 되어 있고 넓은 칸에는 이름과 소원을 적습니다. (이미지 출처: 경북매일신문) 나: 아니, ...

타인 저작물을 베끼는 다양한 방법┃문란해진 표절 기준

※이 글은 얼룩소 글(23.5.22)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최근에 어떤 글을 보고 동료 연구자를 떠올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글은 다른 사람이 쓴 것이었습니다. 문장을 정확히 옮겨 쓰는 식은 아닌 걸로 보였는데, 그 글을 보면 누굴 떠올릴지 뻔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 사람이 제 동료 연구자의 아이디어, 논의를 그대로 활용해서 글을 썼는지 의아했습니다. 나름 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구자로 알고 있었기에 충격이 더 크더군요. 몇몇 주변 분들께 관련 사항을 물어보니 그 분의 전적이 화려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자료를 활용해서 순발력 있게 결과물을 내는 식으로 학술 활동을 이어왔다고 하더군요. 연구자들은 이런 '약탈적 연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학계 퇴출 같은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행 표절 기준으로는 다루기 어려워서 그런 것일 테지요. 표절자들이 제대로 검증되고, 평가받고, 그 책임을 지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약탈적 연구자'들이 활동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논문 표절 감시시스템 '양심'이 유일"(경남도민일보,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77431) 표절은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의 표절 사건으로 나름 사회적 기준이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다른 사람 글을 인용할 때 출처를 밝히면 표절이 아니다라는 식이 대표적입니다. 어느 언론사 뉴스에서 표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앵커] 결국은 이걸 인용해서 쓴 것이냐, 아니면 베껴 쓴 것이냐의 차이는 인용한 것에 대한 표기 그러니까 출처를 밝히는 것에 있잖아요. [기자] 사실 여기서 출처를 밝혔으면 형식적으로는 표절이 아니게 되는 셈인데요. - JTBC 뉴스, 2021년 12월 28일자. 학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적인 기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출처 표시를 해도...

우리는 사회적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추모제와 위령제, 그 미묘한 차이

※이 글은 얼룩소 글(23.5.18)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4월에서 6월은 많은 사회적 죽음을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출처: https://m.segye.com/view/20200915514522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사회적/종교적 의례에 추모제나 위령제라는 말이 붙습니다. 추모제와 위령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의례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개념입니다. 추모제는 '기억'과 '기념'에 초점이 맞춰진 이름이라면, 위령제는 '죽은 자를 위로한다'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강조점의 차이는 의례의 목적 상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추모제와 위령제는 같이 쓰이기도 합니다만...  담양군 가마골 위령제 (출처: http://jnnews.co.kr/m/view.php?idx=8357) 아산시 추모 위령제 (출처: https://m.dnews.co.kr/m_home/view.jsp?idxno=202111291344431840393) 명백하게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학살된 개들을 위한 위령제 (출처: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3040817355076689) 실험동물 위령제 (출처: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26218) 동물 대상으로는 '추모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일견 당연합니다. 기억과 기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령제는 사람, 동물 가리지 않고 쓸 수 있습니다. 그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식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추모제와 위령제의 약간의 차이 추모제는 주로 사회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죽은 자를 위한 의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억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들자면, 먼저 순국선열을 위한 추모제입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살아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

'델포이 신전의 작은 옴파로스'는 옴파로스가 아니다?┃델포이 신전의 E 심볼의 비밀(2)

※이 글은 얼룩소 글(23.5.15)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지난 번 글( 델포이에서 아폴로는 테미스를 쫓아냈나? )에 이어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옴파로스에서 나온 E Γã(E Ga[Ge])를 근거로 아폴로 신앙이 들어오기 전 그리스 전역에 퍼져있던 대지모신(가이아 혹은 테미스)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고, 아폴로가 이를 대체했지만, 대지모신의 심볼은 재활용되면서 델포이 신전의 상징으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베이츠의 가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출발점이 된 옴파로스가 과연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인지, 새겨진 문자를 과연 E Ga로 볼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20세기 중반에 새로운 가설이 제시되었습니다. 그 주장이 맞다면 베이츠의 가설은 기초가 무너지면서 E의 비밀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델포이의 여러 옴파로스 베이츠 가설의 토대가 된 쿠르비(Courby)의 주장[돌은 기원전 7세기 이전 것이고, 새겨진 문자는 E Ga이다]을 강력하게 부정한 장 부스케(Jean Bousquet)는 작은 옴파로스의 재질, 덧붙여진 성분, 부속 물건(칼) 등에 주목해서 이 돌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이 문제를 살피기에 앞서서 델포이 신전의 옴파로스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옴파로스'로 불리는 게 한 두 개가 아니거든요. '옴파로스'는 그리스말로 '배꼽'을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세상의 중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옴파로스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신화적 이야기로 이렇게 표현되었다고 하지요. 어느 날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알아보기 위해 세상의 양 끝에서 각각 독수리를 날렸고, 독수리는 똑같은 속도로 서로를 마주 보고 날아 왔고, 델포이 상공에서 서로 교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우스가 지구의 중심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곳에 돌덩어리를 놓았고, 그것이 우리가 옴파로스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