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역사'라는 개념을 '역사적 신화'라는 개념과 대비해서 논했던 적이 있다.
2016. "'신화적 역사'와 '역사적 신화':허구적 내러티브 생성의 일반적 조건과 신화 연구자의 과제"
그런데 구체적 의미와 맥락이 다소 다르지만, 신화화된 역사 혹은 역사화된 신화라는 현상에 주목해서 특정 집단의 역사를 다룬 책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바로 리사 말키(Liisa Malkki)의 Purity and Exile이라는 책이다.
Malkki, L. (1995). Purity and Exile: Violence, Memory, and National Cosmology among Hutu Refugees in Tanzani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말키는 'mythico-history'라는 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나와 말키의 '신화적 역사' 개념에 대해서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나의 '신화적 역사(mythical history)' 개념
나는 신화와 역사가 집단기억이라는 고리를 통해 서로 분간될 수 없는 ‘회색지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신화가 사실은 아니지만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수용자의 태도에 주목하며, 역사와 신화가 모호하게 얽혀 있는 두 가지 유형을 구분했다.
첫째, ‘역사적 신화(Historical Myth)’는 신화로 분류되지만 그 내러티브 안에 신비로운 역사가 담긴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신적인 존재가 행위자로 등장하거나 기적과 신비가 동반되는 내러티브를 사람들이 역사적 실재로 받아들인다. 조선 시대 이성계의 건국 정당성을 옹호하는 신이담이나 삼국유사의 기이편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했다.
둘째, ‘신화적 역사(Mythical History)’는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역사라고 인식되지만, 실상은 데마고기(demagogy)나 허구적 이야기가 덧붙여진 형태를 말한다. 역사적 사실의 테두리 안에서 과장, 조작, 왜곡이 발생하여 신화적 성격을 띠게 된 역사를 의미하며, 현대의 홀로코스트 신화나 정치적 인물의 신격화 사례 등을 대표적 경우로 이야기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과 정보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상황적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추론). 특히 기존 질서가 무력화된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에서 새로운 권위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이러한 신화적 내러티브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며, 이는 단순히 지배층의 조작을 넘어 집단적 수준의 타협과 투쟁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말키의 mythico-history(신화-역사) 개념
리사 말키(Liisa Malkki)가 탄자니아의 미샤모 수용소 난민 연구를 통해 제시한 '신화-역사(mythico-history)'는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결과물이 아니라, 세상을 근본적인 도덕적·우주론적 질서에 따라 분류하고 재구성하는 구술 서사 체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신화적'이라는 표현은 내용의 허구성 여부를 떠나, 그것이 사회적·정치적 범주를 정렬하고 자아와 타자, 선과 악의 경계를 설정하는 '세상 만들기(worldmaking)'의 과정임을 뜻한다.
이 개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훈적 성격(didacticism)이다. 난민들은 질문과 답변, 반복, 목록화와 같은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매우 웅변적이고 표준화된 형태로 전달한다. 이러한 서사는 과거를 단순히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난민 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러운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의 행동 지침을 제공하는 '헌장(Charter)'이자 설계도의 역할을 수행한다.
말키가 분석한 후투족 난민들의 신화-역사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가진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을 부룬디 땅의 원주민(autochthonous)으로 정의하며 평화로웠던 '황금 시대'의 기원을 강조한다. 둘째로, 북쪽에서 온 외래인인 투치족이 '소(cow)'를 선물로 주는 기만적인 계략을 통해 원주민으로부터 국가와 권력을 '도둑질'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 '인간(Abantu)'이었던 후투족이 '종(Hutu)'이라는 비천한 범주로 전락했다는 신체적·도덕적 지도(body maps)를 그려내며 투치족의 지배를 부당한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1972년의 대량 학살은 이 서사에서 결정적인 '묵시록적 사건'으로 자리 잡습니다. 난민들은 이 사건을 통해 투치족의 악한 본성이라는 '비밀'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믿으며, 이를 계기로 파편화되었던 개인적 기억들을 하나의 집단적인 민족적 역사로 통합한다.
말키의 신화-역사는 수용소라는 물리적·사회적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더욱 강력하게 배양된다. 난민들은 외부 세계와의 섞임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순수하게 유지함으로써, 유배 생활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정화와 민족적 각성의 준비기'로 승화시킨다. 반면 도시라는 개방된 공간에서 거주하는 난민들은 이러한 집단적 신화-역사를 공유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정체성을 유연하게 관리하는 '코즈모폴리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수용소의 신화-역사는 더욱 차별화된 사회적 효용을 지닌다.
말키의 신화-역사 개념은 국가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비극적인 경험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능동적인 역사적 의식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밀키의 Mythico-history와 나의 Mythical history의 비교 요약
비교 항목 | 리사 말키 (Mythico-history) | 나의 Mythical history(+Historical myth) |
핵심 정의 | 과거를 도덕적/우주론적 질서로 재편한 서사 |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허구적 내러티브 |
강조점 | 정치적/도덕적 기능 (정체성 형성, 국가 상상) | 인지적/기억적 메커니즘 (집단기억의 적합성) |
사례 | 후투 난민의 민족적 수난과 투치족에 대한 적대 서사 | 조선 건국 정당화 서사, 현대 정치인 신격화, 홀로코스트 |
신화의 의미 | 세계를 도덕적으로 분류하는 질서 체계 | 신비로움(역사적 신화) 또는 허구적 조작(신화적 역사) |
지배/저항 | 지배 담론에 맞서는 저항적 내러티브의 성격이 강함 | 권력 정당화(지배)와 집단기억의 타협 과정을 모두 포괄 |
두 개념의 유사성과 차이점
그녀와 나는 모두 역사와 신화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그 연결 고리로 ‘집단기억’을 지목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의 파편들을 모아 나름의 시퀀스를 가진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역사의 특성상, 신화적 사고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또한 우리의 논의는 모두 사회적 혼란이나 유배와 같은 특수한 상황적 조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단순히 사실 여부를 가리는 문제를 넘어 인간의 의식 메커니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두 개념 사이의 차이점은 분석의 목적과 강조점에서 드러난다. 나는 신화적 사고의 일반성과 인지적 메커니즘을 규명하려 했으며, 역사가 신비화되어 역사적 실재로 수용되는 ‘역사적 신화’와 사실에 데마고기적 허구가 덧붙여지는 ‘신화적 역사’라는 양방향의 움직임을 모두 포괄하고자 했다. 반면 말키는 ‘신화-역사(mythico-history)’ 개념을 통해, 난민 수용소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이러한 서사가 어떻게 정치적·도덕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동력이 되는지, 즉 그 사회적 효용과 실천적 기능(praxis)에 더 깊이 주목했다.
신화에 대한 정의 또한 미세하게 다르다. 나에게 신화는 역사와 구분되지 않는 신비로운 역사나 데마고기적 허구 조작을 의미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말키에게 신화란 세계를 도덕적·우주론적 질서로 분류하고 자아와 타자, 선과 악의 경계를 설정하는 ‘세상 만들기(worldmaking)’의 과정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조선 건국의 사례처럼 권력 정당화를 위한 지배 담론의 형성 및 집단적 타협 과정을 포괄적으로 접근했다면, 말키는 지배 담론에 맞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난민들의 저항적 내러티브로서의 성격을 강조했다.
나의 개념이 신화와 역사가 섞이는 기억의 원리와 조건을 설명하는 ‘지층의 지도’라면, 말키의 개념은 고통스러운 유배의 현실을 견디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도덕적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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