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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질러, '종교하는' 인간을 생각한다

'노이질러', '종교하는 인간'을 묻기 ‘노이질러’,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religi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noigiler’, 이렇게 쓰고 보니 재밌는 구석이 있다. ‘노이즈+소리질러’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거꾸로'나 '반대로'는 사실 모호하다. 다만 관습적 맥락에서 '거꾸로'의 의미가 결정될 따름이다. 왜 굳이 거꾸로 읽기를 상상할까? 이런 시도를 해 보는 것은 종교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서다. 종교 개념의 한계는 또 뭔가? 이것은 종교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풍경 몇 가지만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교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종교’라고 여기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실천하는 것을 종교 ‘따위’로 표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인들이라면 선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인들이 심리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믿는다.  저마다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의 종교 이해를 참으로 여기며 종교를 판단한다. 이런 모습이 상식적 종교 이해로 종교를 이야기할 때 벌어지는 풍경이다. 종교라는 말은 위에서 말한 몇 가지 방식으로 종교와 관련된 현상을 재단하게 만든다.  이런 점이 한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종교를 거꾸로 보겠다는 발상은 이런 관점의 전환을 ‘실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물론 관점을 바꾸는데 왜 굳이 거꾸로 보려고 하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오로지 이유는 하나, 그게 가장 재밌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방식을 전복시키고 아주 낯선 관점으로 현상을 들여다보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정말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보기는 안 좋은 점도 분명히 있다. 낯선 관점이기 때문에 소통이 어렵고, 익숙한 세계에서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

'종교의 기원', KAIST 인간의기원연구소 포럼에 다녀와서

어제 KAIST 인간의기원연구소 포럼에 다녀왔다. 구형찬 박사님의 '종교의 기원'이란 주제의 강연이 이루어졌다. 나는 지정질문자로 참여 했다. <휴먼 디자인>의 5장 "종교: 종교는 왜, 그리고 어떻게 진화했는가"의 내용을 1시간 반에 걸쳐서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인지종교학 입문' 강연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구성과 연출,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강연이었다. 자연주의적 관점의 종교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랬을 때 어떤 문제들이 설명되는지,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셨던 것 같다. '종교의 기원'을 내세웠지만, 인간의 종교적 행동/관념에 대한 진화인지적 관점의 설명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종교적 행동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의 질문은 '고인류의 매장 흔적'이 가장 오래된 인간의 종교적 행동의 증거일 것 같은데, 그런 것을 감안한 종교적 행동의 기원에 대한 나름의 시나리오가 있다면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호모 날레디는 과연 매장을 했는가로 요즘 논란이 뜨거운데(중론은 매장은 아니라는 쪽인 것 같다), 호모 사피엔스 사례로는 7만8천년 전, 네안데르탈인은 12만년 전 사례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물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의 종교적 행동은 장례 행동인데, 그것은 현생 인류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건 명백해 보인다. 연계된 문제는 동물의 어떤 행동들을 의례적/종교적 행동으로 볼 수 있느냐, 볼 수 있다면 '인간의 종교적 행동의 기원'과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 될 것 같다. 관련 사례를 다루는 책들도 있는 것 같다. 해당 동물행동학 연구를 '동물 행동에 대한 의인주의적 해석'이라고 쉽게 단정해서 무시할 게 아니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다. 답변이 길어지고('시신 처리 행동을 모두 종교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중세 크리스마스, 과거 동지 축제의 지속

동지 축제의 지속으로서 중세 크리스마스의 모습 대략 5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중세 시기, 12월 25일 전까지 강림절 * 의 금식을 지키고, 25일부터 만찬과 축제의 시간을 12일간 가졌다고 한다(동지 → 신년 의례). 이 시기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고, 변장을 하고, 게임을 하고, 춤을 추고 다녔다'. 그리고 이 시기 영주는 소작인들에게 12일의 휴가를 주고 만찬을 대접할 의무가 있었다. * 강림절(대강절[待降節] 혹은 대림절[待臨節]이라고도 함, '예수 강림을 기다리는 시기')은 크리스마스 전 약 4주간의 기간. 크리스마스 전 4번째 일요일부터 시작된다. https://www.history.com/news/middle-ages-christmas-traditions 중세 크리스마스 축제를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변장 게임과 역할 바꾸기 놀이였다(기독교 이전 이교도 풍습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변장 놀이(mumming)를 하는 사람은 동물 가면을 쓰거나 다른 성(남자가 여자)으로 변장하고서 지금의 'trick or treat'과 비슷한 장난을 집집마다 다니며 하거나 해당 축제와 관련된 민속 노래를 불렀다(‘핼로윈’의 근원을 추적하면 켈트족의 ‘신년 의례’와 만난다. 이에 대해서는 신년이 되면 정리해 볼까 한다). 요리된 동물 머리가 동물 가면으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수퇘지 머리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세 후기로 가면서 나무로 된 수퇘지 가면으로 대체되었다. 12일의 축제 기간 중 1월 1일에 '바보들의 축제'라고 불렸던 행사가 있었는데, 이때 사제, 부제(deacon) 등 교회 직원들이 객기부리는 걸 용인해 주는 풍습이 있었다. 역할 바꾸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하급 부제가 설교를 한다든지),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만우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신년 의례' 글에서 다룰 예정).  15세기 프랑스에서 어떤 이는 이런 풍습을 비

기독교 초기 동지 축제의 크리스마스화는 실패

이교도 신앙의 기독교적 전유(이교도 신앙을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으로 세탁했다)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로마의 동지 축제에 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유명하다. 그래서 로마의 태양신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이교적 풍습이라는 말이 있다. 일부 기독교계 신종교에서는 현대 개신교 및 가톨릭이 타락했다는 증거로 ‘크리스마스’를 들기도 한다. 이날을 여전히 ‘예수의 탄생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축일’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건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간다면 로마에서 멈출 이유는 무엇인가 물을 수 있다) 앞 글(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생일이 아니다?! )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날이 실제로 예수가 태어난 날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그렇게 믿어질 뿐이다. Saturnalia (detail) by Antoine Callet, 1783. (historytoday.com) 어쨌든 기독교 이전에 로마에서 동지 전 며칠 동안 사투르누스Saturnus 신을 기리는 축제인 사투날리아Saturnalia 기간(12월 17일에서 23일)이 있었다. 사투르누스(영어로 새턴Saturn, ‘토성’의 영어명이기도)는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에 해당하는 신이다. 이 대목에서 왜 '사투르누스'인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양신'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이 될 수 있다. 그리스 신 크로노스에 대응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요한 포인트가 '시간'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동지-태양신 연결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분기점'이라는 점이다. 이 축제 기간은 역법의 변경 및 여러 사회적 요인으로 동지 날짜 전후로 바뀌었고, 12월 25일이 축제의 절정인 날로 여겨졌다. 시리아의 미트라스 숭배 양식을 채용해 12월 25일은 '솔 인빅타'(Sol Invicta, '정복되지 않는 태양')라는 축일이 로마에 만들어지기도 했다(아우렐리아누스 황제(214-275) 시기)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생일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화 된 동지 축제다." https://www.independent.co.uk와 https://theconversation.com 이런 말을 기독교인이 듣는다면 불경한 이야기로, 비기독교인이 듣는다면 '이교도 축제 카피캣'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로 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교도 관습의 기독교화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등 흥미로울 게 없는 이야기다. 새삼스러울 게 없을 테니 말이다. 또 크리스마스를 현대인이 기념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 적어도 지금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분명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의 얼굴을 한 연말 축제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한 휴일, 연인을 위한 휴일 등으로 받아들여지며 인간관계의 '(재)결합'(유대감에서 성문화까지)을 유도하는 축제일로 향유되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면에선 불경하고, 어떤 면에선 뻔한 이 관습은 역사적 변천을 겪으며 문화의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들을 나무의 나이테처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가장 조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다. 지금도 이런 축제일 기념의 문화적 적합성을 유지시키는 인간의 (존재 지속을 위한) 필요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 가 닿기 위해서는 이 축제일과 관련된 다양한 설명의 층위들을 한 꺼풀씩 벗겨 들어갈 필요가 있다. 종교적 관습의 세 층위 종교적 관습을 우리가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려고 할 때, 사회적 권위를 가진 종교의 설명(주로 종교 내부의 정통 역사관에 입각한 설명)과 제일 먼저 만나게 된다. 문화 현상이라는 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 생각을 지배하는 권위를 지닌 설명, 종교의 교리에 입각한 설명은 외면하기 힘든 표준적 설명이 되는 게 당연하다. 이 표준적 설명은 문화 현상이 종교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는 알려주지만, 해당 관습이 왜 만들어져 유지되는지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 또 종교의 설명과는 별도로 세속적 역사관에 입각한 설명도 장애물이 될

사람들은 귀신을 믿는 게 아니다, '믿음'이라는 함정 카드

믿음이라는 '함정 카드' 이제까지 인류는 귀신, 유령과 같은 ‘영적 존재’를 ‘믿어’왔다. 이제는 누구도 귀신을 믿는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전전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는 기독교적인 종교 개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종교라고 이야기했다. 믿음의 대상이 유일신에서 ‘영적 존재’로 확장되었지만(이전 학자들과 비교할 때), 여전히 ‘믿음’은 종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점이었다. 종교를 이야기할 때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던져보는 질문이다. 여러분은 귀신을 믿으시나요? 귀신은 과연 존재할까요? 이 질문에 이끌려서 귀신이 없다는 증명을 하거나 귀신이 있다는 증명을 할 수도 있다. 회의주의 과학자들 * 이 종교 문제를 대할 때 기본적으로 이런 전략을 취한다. (참고: “ 종교 '억까', 스켑틱의 질문(가설)은 비과학적이다 ”)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미신’을 비판할 때도 실험하며 결과(물의 결정)가 바뀌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혈액형 성격론’이나 ‘MBTI 성격론’이 유행할 때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 * 과학적 회의주의, “실증적 연구와 재현성을 바탕으로 증거가 불충분한 주장의 진실성에 대해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 혹은 반증하려는 과학적 태도”인데, 종교 문제에 국한해서 본다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신은 없어, 그런 거 믿지 말라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이 존재한다면 질량이 있을 것이다? 귀신(유령) 문제는 어떨까? ‘안될과학’에서 그런 사례를 보여준다. 영혼의 무게를 재는 실험이 있었다고 한다. 일명 ‘21그램 실험’이 그것이다. 항간에 ‘영혼의 무게는 21g이다’라는 속설로 퍼져 있다. 미국 매세추세츠 주 헤이브릴의 의사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은 ‘영혼이 실존한다’면 ‘무게’를 가질 것이고(과학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

윌리엄 제임스의 책,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의 국내 번역본 문제

윌리엄 제임스의 책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의 국내 번역본은 2종이 있다. 한길사에서 나온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2000)과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온 『종교 체험의 여러 모습들』(2003)이다. 한길사본(좌)과 대한기독교서회본(우) 최근에 두 책을 다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한길사본은 학부 때 읽은 적이 있긴 하지만,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서 완전히 처음 보는 느낌으로 읽었다. 당시에는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번에 이 책들을 보면서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번역의 우열을 가리자면 기독교서회 쪽이 조금 더 낫지만, 대체로 기독교적 관점으로 내용이 조금씩 왜곡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한길사본은 장별로 번역어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같은 챕터 내에서도 번역어가 달라서 어리둥절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도저히 한 명의 역자가 번역한 책으로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한 책은 번역의 기본도 갖춰지지 않은 느낌이고, 다른 한 책은 특정 시각의 왜곡이 가미된 번역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두 책 모두 윌리엄 제임스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명백해 보인다. 종교심리학 분야의 대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국내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한길사에서 나온 엘리아데 책, '종교형태론'의 경우도 번역에 문제가 많아 종교학 학술서 번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서를 대조해 가면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윌리엄 제임스는 원조 인지종교학자'구나 하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종교 정의'라는 복잡하고 답 없는 논의를 회피하며 personal religion에 주목하여 그 심리적 차원만을 살피고자 한다. 그러면서 종교적 경험/체험의 최고봉으로 이야기하는 신비 체험을 살핀다.  해당 경험을 한 사람들의 반응 혹은 그들에 대한 다른 사람의 기록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그 경험의 '주관적 현실성'

리마커블2 사용 후기 - 연구자들에게는 좋을지도

40대에 들어와 슬슬 노안이 오다 보니 '눈부심' 없이 논문이나 pdf로 된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e-ink tablet을 찾아봤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reMarkable2였다. 사전조사로 선택(2,3년 전쯤부터 이 태블릿에 주목했다)한 이유는 1. '종이에 쓰는 것 같은' 필기감 (필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전자 메모장이 있었으면 하긴 했다. 무언가 구상을 하며 낙서한 것을 컴에 저장해 놓을 필요성이 있었기에) 2. 디자인이 심플하다 (계속 써야 하는 기기니 디자인이 좋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정도였다.  ebook(epub만 가능), pdf를 e-ink로 볼 수 있으면서 그런 조건을 만족한다니 이게 좋겠다 싶었다. 검토 과정에서 후기들을 보니, 결론은 '극악의 가성비 및 사용성 제약' 때문에 "비싼 메모장"으로 불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건 큰 장애물은 아니었지만, 구입을 주저할 만한 이유는 되었다. 더 신경 쓰였던 문제는 해상도였다. 컴퓨터로 메모한 것이나 그림 그린 것을 확대하면 해상도가 좋지 않게 나온다는 지적이 있었다(사실 사용해 보니 그런 건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 같다.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로 개선한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컴터로 봐도 매끈하게 나온다). 리마커블2에 메모한 것 pdf로 내보내기 해서 pc로 확대해 본 결과(색깔 쓰기도 된다) 필기구 형태, 글씨 두께, 색깔(검, 회, 백, 파, 빨)을 변경할 수 있다  해상도 문제가 개선되길 기대하며 reMarkable3가 나오면 사보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길 2,3년의 시간이 흘러, re3가 나올 기미도 없고, re2를 사서 쓰다가 re3가 나오면 갈아타자 싶어서 주 초에 '중고나라'를 통해서 re2를 샀다. (신품은 너무 비쌌다. 마커, 커버 등을 갖추니 80만원이라니. 이건 아내의 결재를 받기 불가능했다) 그렇게 싸지도 않게(40) 중고를 구매했다. 커버와 마커

교육 혁신 추세 속에서 인문학(종교학) 교육을 고민하며┃"미래의 교육, 올린" 강연을 듣고

서울대는 첨단융합학부를 신설하기 위해서 잰걸음을 걷고 있다. 아직 그 영향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과거 교육 패러다임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문제 의식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고 있다. (관련 정치적 배경은 논외로 하고) 우연히 '미래의 교육, 올린'이라는 강연 소식(학내 '전체 메일'로 받음)을 보고, 대학 교육 혁신 바람 속에서 종교학 관련 수업을 어떻게 혁신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란 기대로 해당 강연에 참석했다. 교육 혁신에 대한 공감대를 높일 목적으로 기획된 것 같은 일련의 강연들이 진행되었다는데, 내가 인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강연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눈이 갔던 것 같다. 안내 메일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기초교육원에서 '첨단융합학부 및 학부대학 신설'과 관련하여 특강을 진행합니다. 최근의 화제작인 "미래의 교육, 올린"을 집필하신 LG전자 조봉수 상무님을 모시고, 학생 주도, 경험 중심의 새로운 교육 방식에 대한 특강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내가 주목한 정보는 '첨단융합학부', '특강', '미래의 교육', 'LG전자', '상무'였던 것 같다. 강연장에서 강연 타이틀이 책 제목인 걸, 사업단에 참여하는 후배를 통해서 인지했다. 그리고 '올린'이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올린 공과대학'(Olin College of Engineering)의 이름이란 것도. 강연 내용은 '공학 교육'에 초점이 맞춰졌고, 산업과 연계된 교육에 적용해 볼 수 있는 혁신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과연 인문학/종교학 수업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 ∞ ─── 현재 LG에서 AI빅데이터 CDO(Chief Digital Officer, 최고 디지털 책임자) 자리에 오기까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의 오류를 출판사에 문의했었다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에 대한 리뷰글을 썼었다. 거기에서 내가 발견한 책의 오류 몇 가지를 정리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에 관한 포스트 이 이야기가 출판사에 전달될 리가 없으니(내 블로그 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포털에서 제대로 검색되지 않는다),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문의하기'로 관련 내용을 전달을 했었다. 아마 한 두 달 전이었을 것 같다. 이제는 그런 문의를 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해당 문의글은 다음과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을 재밌게 잘 봤습니다. 그런데 보다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문의드립니다.   1. 35쪽 하단의 '증언 전문'과 '지도 원본', 206쪽에 실었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요? 원본 누락인가요? 번역본에서 뺀 것인가요? 관련 내용을 온라인 상에서 공유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혹은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요?   2. 156쪽 "그러나 먹구름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단락 밑에서 4번째 줄, "관측자들은 그레이트 갤버스턴 허리케인이 상륙하기 1900일 전에 이를 예측했으나 ..."라고 하는 문장은 오역으로 보입니다. "관측자들은 1900년 갤버스턴 허리케인이 상륙하기 수일 전에 예측했지만, ..."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3. 128쪽 뉴욕 재개발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부분의 지도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① 인우드: 맨해튼에 마지막으로 남은 부담 가능 지역이 리조닝되자 주민들은 들고 일어났고 재판에서 이겼다."라는 문장에서 '리조닝'이라는 표현이 어색해 보입니다. '구역 재조정'이나 '용도 지역 변경'으로 번역하는 게 낫지 않았을지요?   아울러 개정판 계획이 있는지 문의드립니다. 그런데 어제 출판사로부터 답변을 받았다. 문의에 대한 답변만 옮겨보면.. 1.

"2023 문화/과학 x SeMA 공동 포럼: AI는 생성하는가" 참여 후기

트위터(x로 바뀌었다지만, 아직은 편한 대로 부를 참)를 통해서 포럼 소식을 들었다. 부랴부랴 신청을 했지만, 이미 방청 가능한 120명은 넘긴 상태였다. 아마도 참여는 어렵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변심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나 보다. 27일에 참석 확인 문자를 받았다. '기대를 안 해야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어쨌든 그래서 7월 29일 토요일에 포럼 방청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찍길래, '인증샷'을 위해서 찍어 봤다. 식민지 유산이 이렇게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었던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인생 첫 방문이었기에. "2023 문화/과학 x SeMA 공동 포럼: AI는 생성하는가" 출처: 서울시립미술관(https://sema.seoul.go.kr/kr/whatson/event/detail) 전체 포럼 주제보다도 2부 주제에 눈이 갔다. "AI와 창작의 미래". 예술 분야의 분들은 AI 환경에서 창작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1부는 '문화/과학' 114호의 특집 원고를 쓰신 분들의 발표였고, 2부는 패널 토론이었다. 1부의 프로그램을 미리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고, 발표자들은 빽빽한 글이 담긴 ppt로 발표를 하고, 게다가 준비한 것이 너무 많아 시간을 넘겨 부랴부랴 정리하며 발표를 해야했기 때문에, 발표 내용을 쉽게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나중에 114호의 글들을 읽어 봐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의도치 않은 '저격'이 될 것 같아, 모자이크 처리했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ppt 발표를 할 때, '프리젠테이션의 금기 사항'(글자가 많으면 안 된다)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1부 순서에서 눈에 띄었던 부분은  1부 세 번째 발표자였던 하승우 선생님(서울시립미술관 ' 행사안내 '에는 「머신 비전과 새로운 사회

과학적으로 '종교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학술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KAIST 인간의기원연구소 1회 학술대회의 주제로 '종교의 기원'이 다뤄진다.  나도 프로그램 기획과 발표자로 참여하게 되었다(2발표). 프로그램 정보 진화인류학자, 심리학자, 종교학자가 모여서 '종교의 기원', '과학적 종교 연구'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발표와 강연을 진행한다. 구형찬 박사와 나는 '인지종교학'(Cognitive Science of Religion) 연구자로 참여한다. 구형찬 박사는 인지종교학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종교 행동과 관념을 소개한다.  발표 요지: 종교적 사고와 행동에 횡문화적 보편성과 다양성이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와 인지체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이 질문에 답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나는 과학적으로 종교를 연구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연구 대상의 문제(종교라는 개념)를 다룬다. 과학vs종교의 흑백논리나 과학적 호교론(종교 정당화)을 넘어서 인간의 종교적 행동과 종교문화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서도 다룬다.  발표 요지: 종교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종교'라는 대상이 잘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들의 한계를 살펴보면서, 과학적 종교연구를 위해 종교 정의 측면에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여기까지가 1부이고 이어서 2부는 조셉 불불리아(Joseph Bulbulia)의 특별 강연이다. 그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지종교학, 종교심리학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세계적인 학자다. 불불리아는 종교적 행동과 감정이 인간의 친사회적 행동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다양한 심리실험적 연구를 해 오고 있다. 이번 강연에서도 그러한 자신의 연구를 소개해 줄 것으로 보인다. 3부 1발표로 박한선(진화인류학/신경인류학)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진화생태학적 관점에서 종교성의 개체 간 차이를 설명해 준다.  발표 요지: 종교는 종 특이적 보편 현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