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교육 혁신 추세 속에서 인문학(종교학) 교육을 고민하며┃"미래의 교육, 올린" 강연을 듣고

서울대는 첨단융합학부를 신설하기 위해서 잰걸음을 걷고 있다. 아직 그 영향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과거 교육 패러다임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문제 의식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고 있다. (관련 정치적 배경은 논외로 하고)

우연히 '미래의 교육, 올린'이라는 강연 소식(학내 '전체 메일'로 받음)을 보고, 대학 교육 혁신 바람 속에서 종교학 관련 수업을 어떻게 혁신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란 기대로 해당 강연에 참석했다. 교육 혁신에 대한 공감대를 높일 목적으로 기획된 것 같은 일련의 강연들이 진행되었다는데, 내가 인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강연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눈이 갔던 것 같다.

안내 메일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기초교육원에서 '첨단융합학부 및 학부대학 신설'과 관련하여 특강을 진행합니다.

최근의 화제작인 "미래의 교육, 올린"을 집필하신 LG전자 조봉수 상무님을 모시고, 학생 주도, 경험 중심의 새로운 교육 방식에 대한 특강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내가 주목한 정보는 '첨단융합학부', '특강', '미래의 교육', 'LG전자', '상무'였던 것 같다. 강연장에서 강연 타이틀이 책 제목인 걸, 사업단에 참여하는 후배를 통해서 인지했다. 그리고 '올린'이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올린 공과대학'(Olin College of Engineering)의 이름이란 것도.

강연 내용은 '공학 교육'에 초점이 맞춰졌고, 산업과 연계된 교육에 적용해 볼 수 있는 혁신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과연 인문학/종교학 수업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 ∞ ───

현재 LG에서 AI빅데이터 CDO(Chief Digital Officer, 최고 디지털 책임자) 자리에 오기까지 자신의 커리어 변천 과정에서 '혁신 인재 양성' 과제를 마주하고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올린 공과대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네이버에서 모바일 쇼크를 겪었던 경험(네이버 트래픽 감소와 주가 폭락)을 소개하고, 당시에는 없었던 모바일 개발자를 구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결국 내부에서 인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큰 문제로 등장했을 것이다. 강연자는 아마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올린 탐방에 나섰던 것 같다.

올린의 슬로건, "Learning by doing"을 소개하며 이 학교가 연구기관이 아닌 산업계와 연계된 순수 교육기관을 표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학교는 학생의 공부(배움)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업 현장에서 감당해야 할 실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통해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럼 교육 과정이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기본적으로 교수에 의한 '주입식 수업'은 없고, 산업 현장의 문제를 학생들이 '직접' 해결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고 한다. 이 '현장의 문제'를 디지인하는 데에 교수와 스텝이 가장 공을 들이는데, 올린의 교수자들은 이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문제 디자인은 교수자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원하는 많은 스텝이 있다고 한다.

이런 교육은 1) 현장 문제를 풀 수 있는 교수자, 2) 현장에서 필요한 지식을 녹인 커리큘럼, 3) 프로젝트 중심의 수업 방식을 통해서 현실화되고 있지만, 풍부한 지원 시스템이 갖춰질 때 실현 가능하다는 점을 강연자는 강조하였다.

올린의 신입생들은 1학년 1학기에 'Design Nature'라는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한다고 한다.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찾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구를 설계하고 직접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사전 지식을 교수자와 함께 찾아내고 학습하는 일이 동반되는 것 같다.

강연자는 여러 책들을 인용하며, 올린의 특별한 교육 방식을 지지하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실패/성공'으로 평가하는 것은 쉽지만, 제대된 교육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도 현장에서 느끼는 바였다. 

과연 잘 하는 학생에게 좋은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많은 성취를 한 학생에게 좋은 평가를 해야 하는가. 성취도를 평가한다면 그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올린에서는 성과보다 역량 평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덧붙여서 LG의 자신의 팀도 성과보다는 역량에 대한 보상이 2,3배 정도 높게 책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보상 체계를 디테일하게 부하 직원들이 알 수 있게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올린의 학생 중심 교육방식은 교수자에게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교수자가 모르는 것을 질문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올린의 선생들은 기본적으로 모르는 것은 학생이 탐구해서 알려달라고 말한다고 한다. 올린 교수들은 기본적으로 아주 겸손하다고 한다. 학생 중심의 교육에서 교수자의 이러한 태도는 특히 중요하다고 한다.

또 올린의 교육이 내적 동기를 만드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올린의 또 하나의 교육 철학을 확인하게 된다. "외적 규제에서 내적 동기로." 지금은 평생 공부의 시대라고 말하며, 계속 공부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게 교육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역설했다. 과거에 맞닥뜨릴 수 없었던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렇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드라이브'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경제적 인센티브가 창의성을 파괴한다.

고도의 사고능력을 요하는 일에는 금전적 보상이 업무성과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올린의 교육 전략이 인간의 내적 동기에 대한 논의에 부합하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한 성과와 역량의 대비가 '학점'과 '배움'으로 대비되었다. 그래서 '학점 없는' 교육 실험을 진행했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1학년은 무학점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4년 내내 학점제로 평가받는 학생보다 일정 기간 무학점제로 '두려움 없는 도전'을 경험한 학생들이 내적 동기부여 수준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올린의 내적 동기를 높이는 교육의 중요한 요소로서 세상과 연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경험'에 기반한 배움을 이야기한다. 이를 '연결성'relatedness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그 학교의 한 수업을 실례로 보여주었다. 근처 노인 기관에서 노인들 대상 인터뷰를 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찾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구나 로봇을 디자인하고 실제로 제작해 보는 일까지 한 학기 수업에서 해 본다고 한다.

이어서 학생 중심의 커리큘럼 설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GAPA가 이런 식의 커리큘럼을 설계하는 프레임워크라고 한다. Goal, Activity, Products, Assessments(Evaluations)를 말한다. 활동과 산출물은 구체적으로 접근 가능하게 규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올린의 혁신적 교육 철학을 정리하면서 "학생을 믿으라"는 말을 했다(강연 시작할 때도 강조했던 말). 교육 과정에서 교수자와 학생 사이의 주도권에는 세 가지 패턴을 상정할 수 있는데, 올린은 학생들을 적당히 놓아두고 지도하여 궁극적으로 학생을 '돕는' 교육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올린의 교육은 기존의 교육의 틀 schooling > Teaching > Learning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약 30분 간의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 ∞ ───

교원의 처우 및 능력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3년마다 재계약한다. 교수들이 힘들어 한다. 임용은 일주일 간 진행된다. 학문적 능력, 의사소통 능력, 사교성 등 올린의 교육 철학을 가졌는지,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올린의 교육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소통과 사교 능력이 있는지 등을 평가한다고 한다.

전체 학생 수는 300명 정도(한 학년에 7,80명)에 교수 50여명, 지원 스텝 50여명 정도로 인적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임교수 임용시에 학생들도 참여한다고 한다.

교원의 고용보장 같은 것은 없다고 한다. 철저하게 3년마다 실적, 강의 평가에 기초해서 하위 몇 %는 퇴출된다고 한다. 그리고 '테뉴어'가 없다고 한다.

교수는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조력자facilitator이자 관리자manager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기에 '투명한 소통 능력'이 요구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올린의 교수는 보상이 상당히 커야 할 것 같다. 불안한 신분, 에너지가 많이 드는 교육, 열악한 연구 여건(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등을 고려할 때 그렇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 교원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가는 의문이다. 강연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육자가 되는 것은 너무 허들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올린의 혁신, '뭘 알아야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한다'는 선입관을 뒤집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우연과 혁신적 교육에 대한 비전이 만나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올린이 출범할 때, 건물을 제때 완공하지 못해서 뽑아 놓은 신입생들에게 다른 학교로 진학하길 권고했는데, 반이 남았다고 한다. 남은 학생들은 교원들과 함께 학교 교육에 대해서 토론하고 '함께' 교육과정 설계하는 일을 하면서 1학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면서 올린의 혁신적인 교육 철학이 현실화 되었다고 한다.


나는 마지막 질문자로 지명되었다. 25분 이상 진행된 질의응답에 강연자가 이미 피로를 호소하던 참이었다. 이런 교육 혁신을 인문학 수업에 적용할 방법을 질문하진 않았다. 분명 '나는 모르오. 당신이 고민할 일이요'라고 할 게 뻔했다. '기업인으로 현장에서 혁신 인재를 양성하면서, 인문학적 역량의 필요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질문했다. 그에 비추어서 인문학 교육의 목표를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한 질문이다.

자신이 기대하는 바는 사람, 태도, 협업, 배려라고 하면서 부하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바 중의 하나가 '책 좀 읽어라'라고 밝혔다. 기업에서 다루는 문제는 한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라서 협업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과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새로운 정보를 왕성하게 소화하는 능력, 여러 사람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능력이 아마도 인문학 수업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 ───

공학 중심의 교육 혁신을 이야기하는 강연이었다. 올린 케이스를 인문학/종교학 수업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학교 시스템의 차이, 학생들의 수용성의 차이도 큰 장애물이다. 올린처럼 '우린 이런 다른 교육을 한다'라고 하는 걸 표방하는 독립된 교육 기관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아니면 서울대에서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 '첨단융합학부', 이미 만들어진 '자유전공학부'에는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계, 공학 중심의 교육 개혁에 인문학자들은 큰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설 자리가 계속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학 분야의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교육 수요의 감소는 연구자들의 주요 활동의 한 축인 교육 활동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것을 버리고 과연 연구를 지속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비효율적인 일이 될 것 같다. '배움은 가르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강사 생활을 하면서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출산율 감소, 학령 인구 감소로 불가피하고도 강력하게 교육 혁신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방의 많은 대학들은 사라질 것이고, 대학들의 비인기 학과는 폐과의 운명을 맞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기도 하다. 서울대에서도 종교학과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존재했다. 앞으로도 그러한 가능성이 줄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인문학자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산업/공학의 그늘에서 인문학 생존 모델을 모색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거나 돈에 영혼을 파는 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학생이라는 '고객'이 없으면 학과도 그 학문도 사라지는 게 현실이다. 자신이 배운 것의 가치를 후대에 조금이라도 물려주고 싶다면, 이러한 큰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어 인문학 교육 혁신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업인들이 기대하는 인문학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문학 교육은 본질에 충실하면 된다. 읽고, 토론하고, 글쓰고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힘이 많이 드는 수업이라면 학생들이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런 한계를 벗어나는 방법은 읽고, 토론하고 글쓰는 수업을 '기초 과목'으로 지정하여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듣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내적 동기'를 만들어 주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연결성'에서 해법을 모색해야 할지도 모른다. 문화에 대한 것이나 문학적 상상에 대한 것이나 역사에 대한 것이나 '지금 왜 그 이야기를 읽고, 생각해 보고, 토론해야 하는지'를 학생들에게 느끼게 하지 못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무의미해'라는 판단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수업에서 배워야 할 것의 '쓸모'를 피부로 와 닿게 만드는 일, 그것을 수업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이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수업의 변화를 모색해 봐야 할 것 같다.

이 날(23. 7. 31)의 강연은 내게 너무도 귀중한 시간이었다.

댓글

  1. 인문학의 위기의 시대에 종교학의 설 자리를 모색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 있는 것 같아서 쉽게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강의가 되도록 하면서, 동시에 학문적 깊이와 진지함도 유지할 수 있고, 또 학생들에게 '쓸모'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강의를 추구하는 3가지 점을 연결하는 일은 魔의 삼각형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지금 적는 것은 어설픈 제 개인적인 아이디어이니까 그냥 참고만 하셔요.

    1. 저는 인문학, 특히 이 경우에는 종교학 및 종교학 연구 그리고 종교학 교수(가르침)가 현실에 순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것이 어떤 이론적/학문적 고려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그에 대한 학문적 논리가 바탕이 된 '외견상의 순응(즉 실제로는 학문적 진지함을 잃지 않은 것)'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논리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브뤼노 라투르가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 상정되는 네트워크의 형성과정 내지 형성의 변화/발전이라는 맥락 안에 종교학을 위치시키는 것이겠죠. 또다른 이론적 뒷받침으로 신유물론이나 객채지향존재론이 일단 떠오릅니다.

    2. 학생들이 좋아할만한 주제를 제시하는 것도 요긴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1)'인공지능'과 종교에 대한 topic, 이를테면 인공지능은 의식이 있는지 여부, 인공지능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 인공지능이 새로운 신이 될 것인지(실제로 인공지능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가 이미 있죠) 등등.

    2) 트랜스 휴머니즘과 종교학에 대한 topic.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뇌에 칩을 이식하는데 성공한 뉴럴링크의 발표를 주제 삼아서 흥미로운 논점들을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3) 각종 Cult에 대한 topic. 넷플릭스나 다른 OTT에서 cult를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에 대해 종교적인 믿음, 종교의 왜곡, 인간의 종교성이라는 문제 등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학생들이 재미있게 여기는 주제라면 더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겠죠. 즉, '내적 동기'를 억지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동기화 할 수 있는 맥락 내에 위치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3. '쓸모'의 문제. 위에서 제시한 topic을 심화시켜서 학생들에게 보다 실용적인 쓸모들과 연결짓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이를테면 각종 cult들이 사람들을 모아서 세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분석, (반드시) 비판하고, 그 원리와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사람들이 현혹되는 이유 등을 함께 생각하거나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는 것도 흥미있겠죠. 물론 이것이 조금이라도 cult leader들을 옹호하거나 피해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선 안되겠지만요. 또, 인공지능 및 종교학에 대한 여러 주제들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자신들의 전문 영역에서 필요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학, 컴퓨터 과학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도 많은 실천적인 '쓸모'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서 얼마나 제대로 도움이 될만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선생님께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선생님^^

    답글삭제
  2. 흥미로운 제안 감사합니다. '혁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미신과 종교라는 개념에 담긴 '너는 틀렸고, 내가 맞다'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1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 ∞∞∞ ─── 미신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그게 무엇이냐 물어 본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들이나 관념을 이야기합니다. 뇌과학자 정재승 선생님도 미신 이야기를 하면서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행위가 불길하다는 미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정재승 편 미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할 때, 이렇게 미신에 속한 것들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시험 볼 때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시험 볼 때 포크를 선물한다' '손 없는 날 이사해야 한다' '밤에 손톱을 깎으면 안 된다' '귀신을 쫓기 위해서 팥죽을 먹는다' 그럼 '미신'은 어떤 것이냐 설명해 보라면, 아마 이런 말들을 늘어 놓게 될 겁니다. https://engoo.co.kr/blog/먼나라이웃나라-세계-각국의-다양한-미신들/ 표준국어대사전에 바로 그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미신' 항목 그런데 이런 개념은 일상에서는 그런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쓸 수 없는 설명입니다.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게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경제적 판단과 믿음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관상은 과학이다', 'ABO 혈액형 성격론', '과시적 소비' 등등. 어떤 종교적 맥락에서 '이상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미신'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종교와는 다른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위 국어사전의 개념 정의는 종교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신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어딘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미신'은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시하는 많은 개념은 편견의 산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서 그런 게...

미신에 대한 중립적 개념은 무엇일까?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5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본래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 ∞∞∞ ─── 미신, 사이비, 이단 이 말들은 종교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입니다. 미신은 종교적 의식(儀式)이지만, 종교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비과학적인 믿음을 통칭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이비(似而非), 말뜻은 ‘비슷하지만 틀린 것’이죠. 영어의 ‘pseudo-’에 대응되는 말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pseudo religion’이라고 하지요. ‘가짜’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사이비'란 말은 『맹자(孟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편에 수록된 말입니다.  孔子曰: 惡似而非者(공자왈: 오사이비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을 싫어한다." 출처: 다락원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darakwonchild) 이 언급의 자세한 맥락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세요( 사이비-나무위키 ). 겉만 그럴 듯하고 속은 빈 경우를 말합니다. 사이비란 말은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말하는 맥락에서 많이 쓰이게 되면서 애초 의미에서 '거짓 가르침'으로 변하였습니다(사이비과학, 사이비종교 등등). 이단(異端), 말뜻은 ‘끝이 다르다’이고, 의미상으로 ‘사이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집주』의 주자주(朱子註) 중 '맹자는 양주와 묵적과 같은 이단에게서 유교를 지켰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유교의 맥락에서 '이단'의 대표주자는 '양주와 묵적'입니다. 양주는 '위아설'(나만 위하면 돼), 묵적은 '겸애설'(모두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라)로 이야기됩니다. 유가들이 곡해해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가르침'으로 평가되는 것이지, 그리 허무맹랑한 가르침은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참고: 양주(전국시대)-나무위키 ...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은 많다?│시간과 종교적 본능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