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윌리엄 제임스의 책,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의 국내 번역본 문제

윌리엄 제임스의 책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의 국내 번역본은 2종이 있다. 한길사에서 나온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2000)과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온 『종교 체험의 여러 모습들』(2003)이다.

한길사본(좌)과 대한기독교서회본(우)

최근에 두 책을 다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한길사본은 학부 때 읽은 적이 있긴 하지만,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서 완전히 처음 보는 느낌으로 읽었다. 당시에는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번에 이 책들을 보면서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번역의 우열을 가리자면 기독교서회 쪽이 조금 더 낫지만, 대체로 기독교적 관점으로 내용이 조금씩 왜곡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한길사본은 장별로 번역어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같은 챕터 내에서도 번역어가 달라서 어리둥절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도저히 한 명의 역자가 번역한 책으로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한 책은 번역의 기본도 갖춰지지 않은 느낌이고, 다른 한 책은 특정 시각의 왜곡이 가미된 번역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두 책 모두 윌리엄 제임스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명백해 보인다.

종교심리학 분야의 대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국내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한길사에서 나온 엘리아데 책, '종교형태론'의 경우도 번역에 문제가 많아 종교학 학술서 번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서를 대조해 가면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윌리엄 제임스는 원조 인지종교학자'구나 하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종교 정의'라는 복잡하고 답 없는 논의를 회피하며 personal religion에 주목하여 그 심리적 차원만을 살피고자 한다. 그러면서 종교적 경험/체험의 최고봉으로 이야기하는 신비 체험을 살핀다. 

해당 경험을 한 사람들의 반응 혹은 그들에 대한 다른 사람의 기록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그 경험의 '주관적 현실성'을 승인하는 한편 객관적 실재성은 긍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한다. (통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그의 이 책은 신비체험과 같은 종교적 경험의 심리학적 실재성/진정성을 규명하는 논의가 아니었다. 내가 읽기로는) 개인의 심리상의 '효과'로 주목되는 것은 불안/긴장의 해소였다.

종교적 체험이 가져온다고 하는 결과/열매로 그 체험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의 시각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그렇게 믿을 수 있다고는 보지만, 그것이 객관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특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길게 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인간의 심리 메커니즘 상의 어떤 효과의 측면에서 종교적 경험을 인과적, 유물론적으로 설명(신경과학적 모델 없이도 이런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운 부분이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심적 메커니즘의 작용이라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종교 경험의 의미가 다양하게 규정된다고 하는 것이 또한 이 책의 중요한 주장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길사 본의 제목이 제임스의 의도에 조금 더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독교서회 제목은 너무 기독교적 시각이 깊이 들어가 있다. 적당히 타협하는 '종교 체험의 다양성'도 용인 가능한 것 같다. 그러나 확실히 '여러 모습들'은 책의 내용과는 맞지 않는다.

경험/체험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니 이 용어가 쓰인 바에서 '종교적인 것'과 관련된 주관적 영역을 제임스가 타겟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주관성'을 단순하게 과학적으로 '승인'하는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주관적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종교 담론에 심리적 수준에서나마 과학적이고도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의, 당대적인 한계선을 긋는 작업이었다. 

─── ∞∞∞ ───

아, 내가 왜 학부 때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읽어보면서 잘 알 수 있었다. 그의 글쓰기 방식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긴 하다. 자료를 주로 인용문으로 채우고 있어서 인용문들 사이에서 필자의 논지에 대해 갈피를 잡기 힘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20장에 펼쳐지고 있었다. 가려는 목표를 제대로 모르고 헤매는 느낌으로 책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책을 다시 보면서 '종교 체험의 다양성'은 결론 → 서론 → 본론 순으로 읽는 게 낫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임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알면, 왜 종교 정의를 피하고 개인 종교 수준에서 이야기를 하는지, conversion이나 mysticism을 왜 어떤 의도로 다루는지를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

  1. 과학사, 심리학사를 주로 연구하는 제 외국인 친구가 윌리엄 제임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그에 관한 글이 있어서 반갑게 읽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었고, American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의 설립에도 관여했죠. 이런 단체에서 초심리학과 비정통적인 심리학적 연구를 수행했었는데, 그에 대한 글들에서도 그가 무척이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를 연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유물론에 경도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윌리엄 제임스는 사실 유물론-관념론의 이원론을 거부하는 입장에 가까운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그의 수많은 텍스트들에서 그리 일관된 입장을 보이는 것 같지 않기도 하고요...어쨌든 윌리엄 제임스의 방대한 저작들이 좋은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답글삭제
  2. 윌리엄 제임스에 대해 추가적인 정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위로가 없는 '차가운 종교학', Science of Religion을 생각하며

※이 글은 얼룩소 글(23.7.13)을 옮겨온 것입니다. ━━━━━━ ♠ ━━━━━━ 종교라는 주제를 다루려면 '위로'가 필요하다? 이 말을 저는 곳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정재승 박사가 총괄자문 및 프리젠터로 참여한 다큐 시리즈 '뇌로 보는 인간'의 마지막 '종교' 편에 제가 자문으로 참여하여 아주 짧은 시간 출연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시청률이 높았던 편이 아니라서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우연히 EBS 다큐를 보던 친구가 '야, 너 나왔더라...잠깐 ㅎㅎ', 이런 반응을 보인 예가 있었을 뿐입니다. 함께 자문에 참여한 구형찬 박사(인지종교학)가 종교학자로서는 메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뇌로 보는 인간' - 종교 편의 한 장면┃저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그때 나왔던 미디어 비평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스 기사 캡쳐 해당 다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다음에 이런 논평을 내 놓았습니다. 미디어스 관련 기사 '위로가 없다'는 비판 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종교라는 주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종교의 본질', '참된 의미' 같은 것을 발견하고, 뭔가 진리의 말씀이나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종교학도 존재합니다. '현대인의 종교는 병들었다'는 진단을 내리며 '고대인의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거나 모든 종교에 담겨있는 가장 고귀한 가르침(가령 황금률 같은)은 모두 상통하고 그것이 인간이 향유해야 할 소박하지만 분명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예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출처: Wikimedia Commons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 뮐러는 '종교학으로의 초대(Introduction to the Science ...

"뇌 회로는 친숙한 것, 중요한 것과 단순한 배경을 식별합니다."(논문 정리)

흥미로운 신경과학 연구 소개를 봤습니다. 친숙한 것과 중요한 것을 먼저 식별하는 뇌 경로에 관한 연구입니다. '신경종교학'에 참고가 되는 논문일 것으로 판단되어,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  *  * Brain Circuit Identifies What’s Familiar, Important, or Just Background┃Neuroscience News.com 요약 : 과학자들은 기억과 감정을 통합하여 감각 정보를 빠르게 평가하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뇌 회로를 발견했습니다. 내측후각피질(entorhinal cortex)과 해마(hippocampus) 사이의 이 직접 피드백 루프를 통해 뇌는 중요한 광경과 소리를 거의 즉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알려진 더 느린 경로와 달리, 이 회로는 관련 자극과 배경 소음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PTSD와 자폐증과 같은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발견은 뇌가 정보를 걸러내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감각 및 기억 관련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 ───  익숙한 것을 한눈에 알아보는 뇌 회로, 해마의 비밀 우리는 왜 친숙한 얼굴이나 물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처음 보는 것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런 능력 뒤에는 우리의 기억 이 큰 역할을 합니다. 뇌의 해마(hippocampus)라는 부분이 과거의 기억을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 들어오는 감각 정보와 비교하여 이것이 익숙한지 새로운지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해마는 “이건 예전에 봤던 거야” 혹은 “처음 보는 거네”라는 신호를 뇌의 다른 부분에 보내 우리의 인식을 조절합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중요한 새로운 정보 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미 아는 것은 배경 소음처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해마는 특히 대뇌피질의 한 부분인 내후각 피질 (entorhinal cortex)과 긴밀히 소통합니다. 내후각 피질은 오감에...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은 많다?│시간과 종교적 본능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