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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누가 한 말일까? 스피노자인가 루터인가? │ 오귀인 사례 (5)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명언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어렸을 때 이 말을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의 말인지 궁금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우연히 이 말의 최초 발화자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말도 오귀인(misattribution) 된 말인가,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찾아봤다. 그 결과를 정리해 본다. ─── ∞ ───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스피노자'가 한 말로 여겨진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서 찾아보면, 관련 언급을 1962년 4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來日 世界의 終末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스피노자」인가 누군가가 말했다지만.. 기사를 통해서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지만 과연 기자가 지어낸 것인지, 어느 출판물에 언급된 것을 인용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에 국내의 최초 언급 사례로 1966년 기사가 지목되었는데(참고: [팩트체크] 내일 지구가 …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 조선일보 자료가 최근에(2020년) 서비스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최초 출처는 새로운 데이터가 나오면 향후에 충분히 업데이트 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의 발언자가 '스피노자가 아니다'라는 글들은 의외로 많이 보인다(구글검색 결과).  여러 글들을 검토해 보면, '스피노자가 한 말이다'라는 건 한국에서만 유행한 듯 싶다. 구글 검색으로 'Even if I knew ... apple tree'를 찾아보면 대부분 마틴 루터를 언급하고 있고, 일부 게시물에서 루터도 아니고 1944년 독일에서 해당 발언을 루터에게 돌리는 한 목사의 발언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Whi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는 누가 한 말인가?│오귀인 사례 (4)

문과vs이과 싸울 필요가 없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괴테말이 아니다. 'Direction is more important than speed'는 리처드 L 에반스의 Faith in the future (1963)에 나온다. 비슷한 괴테의 말이라 여겨지는 인용구(있는 자리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우리에게 낯선 올리버 웬들 홈즈 1세(Oliver Wendell Holmes Sr.)의 말이다. 문이과 대전으로 다시 소환되었던 이 명언은 일반적으로 '괴테'의 말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슈는 이 명언을 누가 했느냐가 아니라 '속도'라는 표현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속도가 아니라 속력임 (이 무식한...??) 속도는 벡터니까 방향을 포함하는 말이다. 방향과 대비되는 의미니 '빠르기'만 나타내는 '속력'(스칼라량)으로 표기하는 게 맞다. 지극히 이과스러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이에 대한 논리적 반박(문과생일지는 모르겠으나)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이것이다(출처: 문과vs이과, 논쟁의 현장 ).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즉,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벡터값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방향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며, 이는 구성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예시 :  *오빠, 고맙긴 한데 나는 가방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루이비통과 프라다를 좋아하는 거야. *아들아,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종이쪼가리가 든 봉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돈 봉투를 좋아하는 거란다. '속도' 사용이 별문제가 아닌 이유는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는 반박 외에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있다. 일상과 학문, 구분 못하는 건 누구? 원문을 근거로 번역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보자. 영어 원문이 'Life is a Matter of Direction, Not Speed.'로 되어 있다. 벡터인 veloci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헤밍웨이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정말 그런가?│오귀인 사례 (3)

이 글은 2017년 6월 19일에 작성된 글을 수정하여 올린 것이다. ━━━ ∞∞∞∞∞∞ ━━━ 이미지 출처: theunivisted.in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 헤밍웨이. 과연 그런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했던가? 영화 '코치 카터'의 경험 , 네팔 지진 고아 사진 (실제로는 베트남 아이들)에 대한 경험이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유행하는 기억은 '전형화'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수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인용구도 그런 특성에 따라 출처가 구성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대번에 이런 게시물을 볼 수 있었다. 들어가 보면 이렇다. 옆에 붙어있는 광고에는 '헤밍웨이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책이 소개되고 있다.  문제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글을 보면, 인용 조사자에게 이 말을 누가 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 나온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순화한 번역임), 이 말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했는지, 아놀드 새뮤얼슨이 했는지, 버나드 맬러머드가 했는지, 아니면 출처가 불분명한지 묻는다.  이런 물음은 이 사이트의 전형적인 '형식'이 아닌가 싶다. 저렇게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하는 질문자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 사람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헤밍웨이 산문의 문체, 여백과 직설이 여러 번 초고를 고쳐 써서 얻었기에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이 그에게 돌려지고 있다고 한다. 인용조사자는 답변을 한다(이하 거의 번역에 가까움). 헤밍웨이는 1964년 사망했다. 아놀드 새뮤얼슨은 헤밍웨이 사후에 헤밍웨이에 대한 회고록(1984), '헤밍웨이와 함께: 키웨스트와 쿠바에서의 한 해(With Hemingway: A Year in Key West and Cuba)'라는 글을 출간했다.  해당 글에서 헤밍웨이가 '

네팔 지진 고아로 알려진 사진 속 주인공이 베트남 아이들이었던 반전│오귀인 사례 (2)

이 글은 2015년 5월 8일에 작성된 글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 ∞∞∞∞∞∞ ―― 얼마전 BBC기사에서 봤던 사진, 처음에 봤을 때 네팔 지진 피해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해당 기사("Haunting 'Nepal quake victims' photo from Vietnam")를 보면, 이 아이들 사진은 Na-Son이라는 베트남의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한 마을에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Na-Son은 그의 트위터에 이렇게 밝혔다. 이것은 Ha Giang 지방에서 2007년에 촬영된 베트남의 Hmong족 아이 둘에 관한 내 사진이지, 네팔에 관한 게 아닙니다. 오해, 유언비어, 사람들의 몰상식? 사람들의 '오해'로 해괴한 헤프닝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위 BBC기사를 보면 이 사진이 2011년에 발생한 '시리아 내전' 때도 '시리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로 유행했던 전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의 아이들은 고아들이 아니었다. 사진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먼 곳으로 부모는 일을 나가 있었고, 아이들은 집 앞에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사진작가)이 다가오니 여자 아이가 무서워하며 오빠에게 안긴 것이고, 큰 아이도 약간의 불안을 보이면서 동생을 안고 있는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말했다시피 이 사진을 시리아 내전의 전쟁고아, 네팔 지진 고아의 모습으로 유통시켰다. 악의적으로 이 사진을 이용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여러 사람들이 부화뇌동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인간 본성적 차원의 기제가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왜?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었기에.   이거 어디서 본적 있어 예전에 영화 <코치 카터>의 명대사, "Our deepest fear"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Coa

python 자료의 유형

파이썬을 공부할 때,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대충 넘어간 부분이 자료형(type)에 관한 것이다. 어떤 함수는 type이 숫자만, 어떤 건 문자열만 받는다고 하는데, 머리 속에서 확실히 정리되지는 않는다. 그냥 그때그때 처리하기 바쁜데.. 사실 error 코드 보고 대처하는 수준밖에 안 된다. 공부 겸으로 한 번 정리해 본다. 근데 솔찍히 이런 그림 처음 본다. 자료형에 integer(정수), float, string(문자열), list(리스트) 정도가 익숙할 뿐이다. 파이썬 데이터 타입의 상위 분류가 '가변형', '불변형' 인 것도. 강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듣긴 했던 것 같은데... 수업을 건성으로 들은 사람의 한계다. 그 다음으로 숫자 타입, 시퀀스 타입, 리스트 타입, 사전 타입, 세트 타입 으로 나뉘고, 숫자 타입의 경우에 정수형, 소수형 (실수?), 불 형 (0, 1: 참, 거짓) * , 위 그림에는 없지만 복소수 형 이 있다. * 위 그림에서는 숫자 타입으로 분류하지만, 통상 불 형을 더 상위 수준 분류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시퀀스 타입에 문자열 형, 튜플 형 으로 분류되는 것도 처음 알았다(분류를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데이터의 유형을 확인할 때 사용하는 함수 type( )은 익숙하다. 자주 사용하는 함수다. jupyter를 이용해서 숫자 타입들을 찍어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동안 ' 복소수 '는 어떻게 다루는지 몰랐는데 'a+bj' 스타일로 쓴다. 'i'는 for문에서 주로 변수로 사용해서 못 쓰게 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a+bi' 형태로 쓰면 type( ) 함수에서 error가 발생한다. π 값을 어떻게 입력하는지 몰랐는데, 무한소수를 컴으로 다루는 건 한계가 있을 테니 일정 소수점에서 자른 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π 값을 불러 오려면 math 라이브러리를 import해야 했다. 역시 소수니 'float

블루투스 헤드폰 사용 리뷰와 데탑 무선 오디오 시스템 구축(JBL T500BT+동글 BTR505) + 2년 사용 후기

2020년 1월 5일에 "블루투스 헤드폰 사용 리뷰..."를 썼었다. 과거 블로그에서. 이곳으로 글을 옮겨오면서 2년 사용 후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   우연한 기회에 득템한 블루투스 헤드폰이 JBL TUNE500BT였다. 보통 시중에서 5만냥 내외로 구입 가능했지만 좀 비싸게 사긴했다. 오프매장에서 7.2만냥으로. 검색해 보니 10만냥에 파는 곳도 있었다. 눈팅을 당하지 않으려면 잘 알아보고 사야할 듯하다. 폰에 연결해서 주로 썼는데, 이어폰보다는 확실히 음질이 괜찮았다. 끊기는 것도 없고. 수신 범위는 5m 내외였던 것 같다. 벽이 2개 정도 놓이면 이 거리가 훨씬 좁아지는 것 같다. 블루투스 이어폰보다는 음질이 좋을 것 같지만 이 헤드폰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은 장시간 사용하면 귀가 아프다는 점, 충전을 주기적으로 해 주어야 한다는 점 정도(케이블 연결하는 게 귀찮음). 블루투스 이어폰이 사용 편의성은 더 좋을 것 같다. 다만 가성비를 고려하면 괜찮은 것 같다.  아, 겨울철 장점 하나를 꼽자면, 귀를 덮기 때문에 귀마개 역할을 할 수 있다. 여름에는 반대로 더울 것이기에 단점이겠지만;;  사용법도 별로 어렵지 않다. 페어링도 그냥 별도 절차 없이 '연결하기'로 쉽게 연결되었다. 코드 입력과 같은 절차가 없었다. 최대 이용 시간이 16시간이라고 나오는데, 시간을 재보거나 하지 않아서 저렇게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하루에 16시간 연속으로 쓰는 일이 없어서 저런 게 불편할 것 같지는 않다. 야외에서 사용하는 경우에 문제가 될지 어떨지... 그런데 헤드폰의 죄는 힘이 커서 그렇게 오래 쓸 수 없을 것 같다. 몇 시간 사용하면 귀 부위 등이 뻐근해서 벗어놔야 한다. 헤드폰의 일반적 단점은 모두 공유한다고 보아야 한다. 일정 볼륨 이상에서 소리가 밖으로 새기 때문에 정숙을 요하는 공간에서 사용이 어렵다. 다만 예상외로 바깥 소음 차단이 잘 되었다. 과거 헤드폰 사용 경험으로 보면 바깥 소리가 잘 들어오는데 보통 볼

'나는 옳은 일을 능히 하고 그른 일은 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

예전에 고전번역원 메일링 서비스로 우연히 보게 된 내용이다. 허목의 문집 《기언(記言)》에 실린 '어시재기(於是齋記)'라는 제목의 글이다. '於是齋記' 원문(클릭하면 고전DB로) 허목이 척주(陟州, 지금의 삼척 지역)의 부사로 재직할 때 전임 부사 임후에게 편지가 와 자신이 집을 하나 지어 '어시재(於是齋)'라 이름하였는데 허목이 기문과 편액을 적어 보내주면 좋겠다고 편지를 써 보냈다. 이에 허목이 임후에게 '어시재'라는 이름 내력을 알려달라 편지를 보냈다. 임후의 답장에는 아버지 묘 근처에 지은 집으로 여생을 보낼 곳이라 하며 이름의 내력이 되는 말을 이렇게 적었다. 아! 세상 사람들이 그른 것을 옳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문란한 일입니다. 누구나 다 ‘나는 옳은 일을 능히 하고 그른 일을 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꼼꼼히 살펴보면 옳은 것은 적고 그른 것은 많으니, 저는 이것을 두렵게 생각합니다. 噫, 世之是非非是, 亂矣。人之言莫不曰吾能於是, 而不願於非。然考之行事, 則於是者寡, 於非者蓋衆也。僕乃大懼也。 허목(許穆), 〈어시재기(於是齋記)〉, 《기언(記言)》 (고전DB 디렉토리: 기언 > 기언 별집 제9권 > 기(記) > 어시재기(於是齋記)) '나는 옳은 일에 능하다(吾能於是)', '옳은 것이 적다(於是者寡)'에서 '옳은 일에'(於是)라는 말을 따서 집의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허목이 이 말을 보고 감탄하며 '기록할 만하다'하고 '기(記)'를 지었다. 경계할지어다 / 戒之哉 옳고 그름이여 / 有是非 옳은 것과 그른 것은 / 有是非 명철한 사람이면 가려낼 수 있다네 / 明者擇之 옳은 데 처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 處是非難 확고하게 지키기가 어려운 법이라네 / 確於是爲難 강한 자라야 능히 할 수 있나니 / 剛者得之 경계하고 경계할진저 / 戒之哉 사실 이런 관찰은 흔하기는 하다. 그

'Our deepest fear' speech와 넬슨 만델라│오귀인 사례 (1)

'Our deepest fear'는 영화 〈코치 카터〉(2005)에서 티모 크루즈가 한 대사로 처음 접했다. 뭐 이래 멋있는 말이 다 있어? 영화 〈코치 카터〉의 한 장면 대사는 무척 길다. Timo Cruz: 'Our deepest fear is not that we are inadequate. Our deepest fear is that we are powerful beyond measure. It is our light, not our dark that most frightens us. Your playing small does not serve the world. There is nothing enlightened about shrinking so that other people don't feel insecure around you. We are all meant to shine as children do. It's not just in some of us; it's in everyone. And as we let our own lights shine, we unconsiously give other people to do the same. As we are liberated from our own fear, our presence automatically liberates others.' so I just wanna say thank you. You save my life.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가 무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 자신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말로 두렵게 하는 것은 우리의 어둠이 아니라 우리의 빛입니다. 당신의 소심한 행동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움츠리는 데에 깨달을 만한 것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그러듯이 우리 모두는 고유한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

《홍길동전》을 둘러싼 논란│허균이 지은 게 아니다? 최초의 한글소설이 아니다?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2018년 한글날 즈음 방영된 정재환 교수의 강연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 어쩌다 어른 2018년 '한글날 특집 방송'의 한 장면 576돌 한글날을 맞아 '홍길동전'이 다시 호명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논란이 국문학계에서 꽤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별로 확산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다. 아니면 관련 연구가 인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의적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국문학계의 관련 논의를 접하고 과거 블로그에서 글을 썼던 게 있다. 그것을 조금 수정하여 실어 놓는다. ━━━━━━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홍길동전》 허균 작자설, 아니 설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이 이야기는 의외로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최초의 기록 1674년 간행된 이식의 『택당집』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거의 유일한 근거라고 한다.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15, 「산록(散錄)」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다.] 번역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이 언급을 하는 맥락을 보면 '위조된 책'이나 '이설의 횡행'을 비판하면서 그 일례로 '수호지'를 언급하고, 그와 유사하게 지어진 '홍길동전'을 이야기한 것이다. 허균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홍길동전' 같은 '이설'을 떠드니 반란 혐의로 사형 당한 것이 어찌 그 응보가 아닐까 하고 말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이 언급된 그 단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