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예수의 무덤: 역사를 뒤집을 고고학 최대의 발견』(2007)이란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무덤』의 표지(출처: 교보문고)
원제는 The Jesus Family Tomb: The Discovery, the Investigation, and the Evidence That Could Change History(예수 가족의 무덤: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발견, 조사, 그리고 증거, 2007)입니다. 이 책을 보고 '제임스 카메론'이 등장할 것을 알기는 어렵지요. 관련 논란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책을 펼치면 '추천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제임스 카메론(캐머런)이었습니다.
『예수의 무덤』 17쪽, '추천의 글' 글쓴이
그런데 이 책의 문제 의식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역사학자, 성서학자의 '예수의 실존'에 관한 일반론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물리적 증거(예수 가족의 무덤)가 심차 자코보비치(Simcha Jacobovici)와 찰스 펠리그리노(Charles R. Pellegrino)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전문가들이 예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는 한다. 이교도들의 신, 죽음과 부활의 신화, 1세기경 유대인들의 메시아 전통 등이 결합되어 조작된 존재로, 예수 역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가 크리스마스도 동지를 축하하는 이교도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한다. 동정녀 잉태와 부활 등 예수의 이야기에서 기본적인 틀을 이루는 많은 부분이 예수의 존재보다 적게는 수백 년을 앞서고 있기 때문에,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이유로 조작된 신화적 인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았다는 물리적 증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꿈틀대는 이런 움직임을 실질적으로 반박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심차 자코보비치와 찰스 펠리그리노가 이 책에서 분명한 증거 하나를 제시했다. ... 1980년 예루살렘 탈피오트Talpiot에서 발견된 1세기 경의 유대인 무덤이 예수와 그 가족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냈다. 『예수의 무덤』, 6-7쪽.
카메론의 속내는 '학자들의 가설이 물리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설득력 있게 보이는 것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카메론 감독의 이런 판단은 그만의 믿음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가 피와 살을 가진 실제 인물로 존재했고 남다른 카리스마와 개인적 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 믿어 왔다. 『예수의 무덤』, 8쪽.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부정하는 이야기가 학계에 팽배해 있으니 불만이 많았을 겁니다. 이런 믿음을 확인하니 이 책의 운명이 감지가 되더군요. 카메론의 추천글(원서에는 foreword[머리말])을 읽고 나서 검색을 해 보니, 이 책과 관련 다큐(The Lost Tomb of Jesus)에 관한 논란이 딱 정리가 되어있었습니다. 다큐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더군요. 한글 자막은 없습니다만.
The Lost Tomb of Jesus(잃어버린 예수의 무덤)은 2007년 3월 4일 캐나다의 디스커버리 채널과 비전 TV가 공동 제작하여 첫 방송한 사이비 고고학 다큐드라마(a pseudoarchaeological docudrama)로, 탈피오트 무덤의 발견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 봤습니다.
책은 재밌게 쓰였습니다. 마치 『다빈치 코드』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한 비밀을 온갖 역경, 방해 세력의 저항을 뚫고 파헤치는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 분위기는 이미 머리말에서 카메론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탐정소설처럼 읽힌다. 더구나 이 이야기가 전적으로 사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예수의 무덤』, 7쪽.
카메론이 '흑역사'를 제대로 썼구나 싶은 대목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갈릴레오를 흉내내며 '전문가들이 아무리 틀렸다고 이야기해도 그 무덤은 예수의 무덤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어쨌든 책은 종교적 신비를 탐험하는 추리극처럼 읽을 수 있게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는 카메론이 자신 만만하게 말한 "소름이 돋"는 "사실"은 아닙니다.
그는 머리말에서 '역사'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보여줄 정도로 그렇게 무지몽매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이타닉호를 조사하면서 얻게 된 역사관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12년 동안의 [타이타닉호에 대한] 조사를 통해 내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역사는 합의된 환상이란 점이다. 달리 말하면, 역사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기로 합의한 신화다. 진실은 움직이는 목표점이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언제라도 검토해서 진실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역사적 기록에도 경계의 눈을 늦춰서는 안 된다. 기록한 사람의 이해관계와 주변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 책은 이런 통찰력 있는 역사관을 피력한 카메론이, 전문성이 전혀 없는 분야에서 어설픈 단서를 기초로 한 믿음의 현실(신화)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2007년 2월 26일 뉴욕에서 열린 다큐 'The Lost Tomb of Jesus' 기자회견 시 유골함 뒤로 보이는 심차와 카메론, https://www.starnewsonline.com/
책 내용과 핵심 논란
책은 '예수의 무덤'에 대한 성경적 이야기를 짚고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단서로 '예수의 시신이 옮겨져 묻혔을 것'이라는 가설에 힘을 싣고, 1980년 탈피오트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발견된 한 가족 무덤의 발굴 사건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유골함(ossuary)에 새겨진 이름들에 주목합니다.
탈피오트 무덤의 유골함과 '요셉의 아들 예수'로 해석된 비문. 츨처: Philadelphia Inquirer
'요셉', '마리아', '요셉의 아들 예수', '마리암네(Mariamene)[≒막달라 마리아?]', '마태(Mathew)', '요사(Yosa)[≒예수의 동생 요셉?]', '예수의 아들 유다(Judah, son of Jesua)'를 발견하며 '설마'를 떠올리는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의 분위기를 전합니다.
'예수 가족의 무덤'에 대한 가설은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한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여럿 나온 데에서 기인했습니다. 유사성을 감지하고 놀라서 '혹시 예수의 무덤인가?'라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이 의구심을 확증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집니다.
'마리암네' = 막달라 마리아,를 보이기 위해서 또 노력을 합니다. 이를 지지하는 학자의 설을 취해서 설명합니다만, 딱히 결정적 근거의 느낌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 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법의학적인 물질적 근거가 아마도 가장 신빙성 있는 증거였을 겁니다. 유골함의 잔류물에서 추출한 DNA를 이용한 분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좀 황당합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로 추정한 '마리암네'에 대해서만 진행하였고, 두 사람이 모계 쪽 혈연이 아니다(미토콘드리아 DNA였기에)라는 결과를 토대로 저자들은 '둘이 부부'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을 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로도 이것이 비약임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모계 쪽 혈연이 아니다'라는 것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니 두 사람의 부계 혈연 관계를 부정하는 증거가 아니지요. 그리고 애초에 DNA 조사를 한다면 모든 유골함에 대해서 조사하여 최소한 모계 쪽 혈연이 확인되는 가족들이 묻혀 있는지는 확인을 했어야겠지요. 그리고 각 유골이 동시대 유골인지, 1세기경 유골인지 등을 확정할 수 있는 근거들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인 여타의 논란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논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못한 느낌입니다. (신학적 논란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이 정리해 놓은 것이 많이 있더군요. 저는 패스하겠습니다. 관련 구글링 결과)
'예수의 실존 문제'에 갇히지 않는다면?
종교적 믿음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 종교적 가르침의 권위를 실재성에서 찾으려는 전문종교인, 학술종교인 등의 주장을 따를 때, 이런 문제가 논란이 되고,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알러지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겠지요.
종교적 신앙의 영역이 아닌 물리적 사실의 영역에서 본다면, '예수의 실존'은 정확한 물증으로 지지되지 않는다는 게 팩트입니다. 이런 팩트와 신앙적 진리로서의 '믿는 사실'은 구분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사실 신앙의 차원에서 역사적 예수의 존재가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의 '신화적 존재'라고 할지라도 삶을 이끄는 사표가 되는 존재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실제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 역사적 사건만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적 주제의 반복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동시대 '영웅 이야기'도 취사선택과 과거의 전범에 맞추어진 미화된 이야기로 전형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명확하게 '팩트 체크'하게 될 때 '만들어진 영웅' 담론을 생산하게 됩니다.
'거짓이니까 믿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믿음의 세계에 통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것이니까 진실이다'라는 주장은 사실의 세계에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양자가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명백한 인간적 사실입니다. 그러니 다른 차원의 문제로 다른 차원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자리를 비난하는 데 열을 내는 것은 참으로 소모적인 일입니다. 왜냐면 그런 대비되는 양자의 시각은 늘 존재할 것이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정복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이해의 자리에서 흥미로운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사람들일지라도 역사와 신화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서 다양한 행동(누군가에 대한 공격, 새로운 권위의 수립, 도덕 규범의 확립, 삶의 위로 등등)을 한다는 점입니다. 분명 그런 인간사의 복잡 다단함을 이해한다면, 신앙의 수준도, 과학적 이해도,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도 그 폭을 한층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빈치 코드』처럼 하나의 소설로서 『예수의 무덤』을 보면 충분히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사족: 유골함과 이중장
'예수의 무덤'에서 시종 주목을 받은 ossuary는 간혹 ‘유골 단지‘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유골함'으로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유대의 유골함, Haaretz.com
유골함은 이중장(second burial)의 증거입니다. 살이 모두 썩어서 뼈만 남았을 때, 이를 수습하여 유골함(ossuary)에 담아 무덤에 안치하는 방식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중장 풍속은 인류에게 일반성이 있는 장법입니다. 화장도 기본적으로 그런 특성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에는 화장보다 매장이 선호되었지만, '이장'(移葬) 문화가 발달한 데에서 이중장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유대의 장례 풍속에서 이중장이 나타났던 것을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1세기경의 이중장 풍속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관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한국으로 건너 뛰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이중장'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장문화가 이를 보여줍니다. 물론 3일장과 발인, 화장터에서의 화장과 매장의 프로세스가 짧은 시간에 처리되기 때문에 하나의 장례식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겨지긴 합니다.
그러나 화장 기술을 활용해서 '육탈의 시간'을 빠르게 단축해서 유골 분말 형태로 죽은 자를 납골당이나 묘로 안치하는 방식입니다. 전체 장례 절차의 한 단계로 통합이 되어 그렇지 '죽은 자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보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중장의 특징은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이 썩는 사체는 감염병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산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위험합니다만, 육탈 된 뼈는 인간이 가까이 해도 그러한 위험이 없는 '안전한 망자'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깝게 접촉하기 위해서 '뼈를 수습하는 장례'가 별도의 단계로 자연스럽게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2차적 장례는 종교적 교리에 의해서 잘 유지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ex. 불교의 화장). 이에 대해서도 언젠가 다뤄 볼 계획입니다.
※ 이 글은 '얼룩소'에 2023년 1월 2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부제를 약간 수정) ─── ∞∞∞ ─── 1년의 시작점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동지, 설, 정월대보름, 입춘 등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신년 기념일들처럼( 참고 )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신년 기념일이 있는 경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래 지역적인 단일성은 있었을 겁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1월 1일이다, 이 동네는 음력 설이다, 이 동네는 입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어떤 계기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집단들이 묶여서 더 큰 집단으로 통합되면서 시간, 의례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종교단체 수준에서도 진행이 되지만 국가 수준에서도 진행이 됩니다. 이 과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종교단체의 흥망성쇠 등 집단 구속력의 변화에 따라서 부침을 겪으며 반복·중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신년 기념일을 단일화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19세기말 20세기에 시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 한 해의 시작일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의례적으로 기념하는 첫 날은 쉽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문화적 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남). 여러 신년 기념일은 그런 통합의 힘에도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전승이 살아남아 그 흔적을 남긴 덕분입니다. 다만 해당 기념일을 현재에 활용하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라질 운명을 일 겁니다. 그럴 경우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잊혀지는 것이고요. 동지 우리에게는 팥죽 먹는 날 정도의 의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과거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런 동지 축제가 신년 축제인 사례도...
※ 이 글은 ' 얼룩소 '에 2023년 1월 28일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본래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이 글은 Skeptic Korea의 " 정신의학의 오래된 과제, 과학적 치료와 처방 "에 관한 얼룩소글의 출처를 체크하고, 정신질환 치료의 현실에 대해 박한선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정래해 본 글입니다. ─── ∞∞∞ ─── 최근에 나온 글인 줄 알고 찾아봤더니 전에 나온 글이군요. 마침 어제(1/27) 정신과 의사 출신 인류학자 박한선 선생님을 통해서 관련 이야기를 듣고, 글쓴이부터 찾아 봤습니다. 다른 저자인 걸 보고, 정신의학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박선생님께서 정신병 진단과 치료에 '정신분석학'이 사용되고 있다고 하셔서 좀 어리둥절 했었습니다. 심리학계(실험심리가 중심이 된)에서는 배우지 않게 된 분야로 알고 있어서 의학 분야에서도 당연히 퇴출되었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왜 인지 모르지만, 효과가 있다'는 면에서 정신과 치료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 '정신분석학'도 프로이트, 융 시절의 버전이 아니라 많이 업데이트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부분은 과문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제 박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도 떠올라 흥미롭게 이 스켑틱의 글을 읽다가 문득 출처가 궁금해서 찾아 보니, '한국 스켑틱'에는 14권(2018년)에 "정신의학은 과학이 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글로 실려있었습니다. (스켑틱에서 얼룩소에 올리는 글이 최근호에 실린 글이 아니라는 걸 이제사 깨달은 거죠) https://www.badabooks.co.kr/SKEPTIC_magazine/?idx=54 글은 14권의 68~83쪽에 실렸습니다. 이 글을 일부 발췌해서 재편집한 것이 위의 얼룩소에 실린 글이더군요....
종교 개념의 역사적 변천 인류 역사에서 ‘종교’라는 개념은 보편적이거나 자명한 것이 아니며 ,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명확히 분리된 범주로 존재하지 않았다 ( Before Religion: A History of a Modern Concept ).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religio 같은 용어도 오늘날의 “종교”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으며, 주로 경건한 의례나 의무를 뜻했다.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는 정치 · 사회 질서와 영적 실천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고 , 신성과 속계의 구별도 희미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중국이나 유럽의 중세에는 우리가 현대적으로 말하는 ‘ 종교 ’ 라는 분절된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 Living in the Chinese Cosmos ). 신앙과 제의는 일상과 통치 구조에 깊이 통합되어 있었으며, 따로 구분된 “ 종교 ” 영역은 근대 유럽의 산물 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지적이다( Before Religion ). 근대 학문에서의 ‘ 종교 ’ 개념 형성 은 17~18 세기 유럽 계몽주의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등장 했다. 계몽주의 이전까지 유럽에서도 “참된 종교”와 “미신”을 구분하는 신학적 논의가 있었으나,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을 거치며 ‘ 종교 ’ 는 ‘ 세속 ’ 과 대비되는 하나의 범주 로 재구성되었다( Before Religion ). 유럽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보편 모델로 삼아 전세계의 신앙 전통들을 하나의 분절된 범주(“religion”)로 묶기 시작했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Wilfred C. Smith)는 그의 저서 『종교의 의미와 목적/종말』에서, 현대적 의미의 “ 종교 ” 개념이 서구에서 발명된 것이며 보편 개념이 아니라는 점 을 일찌감치 지적했다( The Meaning and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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