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과거 블로그(삭제됨)에서 2015년 4월 13일에 작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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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역사'라는 말은 역사라는 것이 승자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어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단순하게 '패자'를 쓰레기 취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식민사관'이라는 것도 큰 틀에서 볼 때 이런 '승자의 역사'인데, 일본애덜이 우리보고 '멍청하고 덜 떨어져서 우리 발이나 핥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 건 너네가 열등해서야'라는 결과론적 해석인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박정희 근대화론 또한 이러한 함정에 빠져있다. 지금의 풍요를 낳은 것은 근대화-산업화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일본과 박정희에 대해서 그렇게 '편향된 시각'으로 비판하면 안 돼. 그럼 여전히 기아선상에서 헐벗고 굶주려야겠어? 라는 식의 이야기.
이런 식의 루저에 대한 평가절하가 익숙하지만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반대 방향의 '승자 꾸미기'(승자에 대한 '뽀샵 역사')도 같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찌질이 루저'를 만드는 메커니즘의 정 반대의 작용이지만 기본적인 속성은 동일하다. '조작'.
루저, 그들은 사악하고, 원시인 수준으로 멍청하고 등등, 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나쁘기'까지 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승자, 그들은 인류발전에 공헌하며,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서 공동체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 더욱이 심각한 위기의 순간에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을 그들이 가진 비범한 능력으로 성취해 낸 반인반신의 존재로 그려진다.
선인과 악인의 대립은 신적 역사와 악마적 역사의 대립으로 확장된다.
인류사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모습이다. 도시, 왕, 국가의 등장 혹은 신의 인류에 대한 대규모적 역사함에 관한 '신화'들은 대체로 그러한 '승자의 역사'가 신적인 역사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서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그러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허구적 이야기'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는가? 물론 만든 사람들과는 별개로 그것을 듣고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효과가 발휘되는 것을 제작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신화 제작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믿음'은 진실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 믿음을 가질 수도 있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정한 권리를 행사하는 질서, 그 정점에 자리하는 권위를 창출하는 데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 정당성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것은 그들 집단의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다. 그것이 그 이상의 공동체(왕조, 국가 등)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그 질서와 권위를 의심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는 도전(반란)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신화가 만나는 지점, 거기에서 인간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힘'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권위 생성의 신화적 구조일까?
정치적, 역사적인 것은 또한 동시에 신화적인 것일 뿐이다.
비현실이 현실로 둔갑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힘'이 본래적 정당한 '힘'으로 변형되는 것, 그래서 인간을 초월하는 행위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지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동시성이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적, 역사적, 신화적 '사실'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임과 동시에 여기에 모종의 인지적 메커니즘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물자체는 인식과정을 통해서 의식적 실체로 우리의 두뇌에서 재현된다.
그 자체로 하나의 매개적 투사인 것이다.
'역사'라는 집단의 표준화된 기억이 아니라 개인들의 '기억'에서도 이런 인식과정의 '한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라지는 기억, 왜곡되는 기억, 새로이 만들어지는 기억 등.
기억은 망각과 왜곡으로만 작동하지 않고, 창작 수준으로도 작용한다. 지금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없었던 '사실'이 회고적으로 채워진다. 지금의 나, 혹은 지금의 너를 나의 의식 체계 속에서 일관된 이미지로 재현해 내기 위해서 거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억은 사라지고, 부족한 것은 채워진다. 어떨 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대표적 사례가 윌코미르스키(Binjamin Wilkomirski)의 《미완의 유고(Fragments)》가 될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경험을 했다는 자신의 경험을 적은 글인데, 후에 그가 그러한 경험을 한 바가 없었음이 증명되었다(《홀로코스트 산업》, 《기억의 일곱가지 죄악》 참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응당 그런 '조작'을 해 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의식적 활동의 근본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자, 인간의 보편적인 인지 메커니즘이나 인식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때, '만들어진 신화'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본성적 결과이니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한 것인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할 수 있다. 왜? 모든 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상징투쟁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우월한 것'인지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하고 '함께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적 신화'와 같은 장밋빛 전망은 부질없을 것이다. 그런 이해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런 신화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없듯이.
반면 모든 절대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허무에 허덕일 것이라고 호도할 필요도 방정을 떨 필요도 없다. 합의된 잠정적 집단의 '신화'는 생각보다는 강고한 기초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적 가이드라인'.
절대 신화 -------------------------(X)---------------------------- 민주적 신화
저 중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이든 '신화'이든.
그런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이든 집단의 '신화'이든 그것은 끊임없이 집단의 신화에 대한 절대성이 도전받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러한 도전으로부터 집단의 신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저 진동하는 (X), 그 역학(dynamics)은 결국 그러한 해체와 재구축의 충돌로 발생하는 것이고, 해체와 재구축은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 간의 '투쟁'을 전제하는 것이며, 새로운 질서와 권위의 창출과 거기에 맞선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드려는 의지 간의 충돌이다.
인간 존재 자체로부터 빚어지는 역동적 세계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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