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브뤼크네르, 『순진함의 유혹』, 김웅권 역, 동문선, 1999, pp. 158-162(인용)
패배 속의 위안
... 시대의 상투적 생각에 따라, 이러한 태도에 개인주의의 최고 단계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이다. 개인은 자신의 가능한 모든 역할들 가운데 단 하나의 역할만을 간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불평하고 애처롭게 앙탈하는 유아의 역할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탈없이 허약한 어린아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대받은 자의 코미디를 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이 대가는 생명력이 저하되는 것이고, 힘이 쇠약해지는 것이며, 의지가 빈곤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양에는 분명히 옹졸하고 허약한 새로운 인간 모델이 산출되고 있다. 이 모델을 정의하자면, 그는 자신의 허약함에 대해 동의하여 자신을 부정하고 삶으로부터 은둔하려는 취향을 지니고 있다.
사랑이나 정치, 또는 직업의 실패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이 실패를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실패를 제 3 자의 탓으로 돌리고, 우리에게 손실을 가하려고 열중한 책임자를 지정하는 것이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 분명 누군가가 이 고통의 원인임에 틀림없다'라고 병약한 양들은 추론한다."(니체 <<도덕계통학>>, 세번째 논설) 첫번째의 경우 실패를 극복해서 이 실패를 개인적인 성취의 길로 가는 단계로 변모시키고, 하나의 길을 심화시키는 데 필요한 우회적 길로 변모시키는 수단을 마련한다. 두번째는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어떠한 반성도 물리침으로써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나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전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존재의 목적은 더 이상 성장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초라하게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인간을 크게 만드는 모든 것을 고양시키는 대신에, 특히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지배를 고양시키는 대신에 한탄의 순응주의적 추종으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 한탄이 따라가는 것은 모든 덧문을 닫아 버리고 옹졸함 속에서 생존과 행복에 대해 유일하게 염려하는 것이다. 희생화 경향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과 대결하기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을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자의 의지수단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괴로움을 제거하려고 원하는 것은 괴로움을 심화시키는 것이고, 각자를 어떤 아픔에 대해 끊임없이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이 아픔은 몰아세우면 그에 따라 계속해서 확대되는 아픔이다.
지배계층과 19세기 교회의 가증스런 메시지였던 불행의 감수와 조그마한 고통에도 터무니없이 나타나는 과민반응 사이에는 아마 우리가 믿는 것보다는 차이가 적은 것 같다. 두 경우에서 동일한 숙명주의가 한쪽은 우리를 단념으로 몰고 가고, 다른 한쪽은 어떤 침해로부터도 우리를 보호해 주도록 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중재인들(변호사-의사-전문가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우리를 박탈로 몰고 간다.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존재조건에는 최소한의 어려움이 따라다니며, 압축할 수 없는 위험과 냉혹함이 일정량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삶은 개화될 수 없다. 이러한 위험을 거부하는 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연금생활자의 안정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역경과 조그마한 조난, 아주 고약한 적들까지도 그 나름대로 우리를 구제하고, 우리를 투쟁에 익숙케 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계략-역동성-용기의 광맥을 우리 내부에 일깨우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개성적 인물의 힘은, 이 인물이 무너지지 않고 참을 수 있는 박해와 모욕의 수량에 따라 측정된다. 장애물들은 그를 열광시키고, 적의는 그를 고무시킨다. 그는 두려움과 소심함으로 쓰러지는 다른 사람들을 초월한다.
솔제니친은 이렇게 반복하기를 좋아했다. 억압은 자유주의의 밋밋한 부드러움보다 더 원대한 인물들을 배출해 낸다. 그러나 억압을 원하는 정도까지는 갈 필요 없이, 자신의 슬픔을 가엾게 여기고, 사람들을 희생자의 역할 속에 가두는 것은 위험하다. 그럴 경우 그들은 이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겨우 견디고 있을 때, "나는 끔찍하게 견디고 있다"고 말 하는 것은 미리 무장을 푸는 것이고, 스스로를 진정한 고통과 대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어려움을 의료적 수단으로 해결하려 하고, 모든 불편을 약을 통해서 제거하려는 성향이 나오고, 일반적 치료제로서 안정제의 이용이 증가한다) 각자의 허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저항 정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에너지-경쾌함-즐거움을 고양시키는 사상이 필요하다.
쾌활-명랑함-고요함이 필요하다. 희생화 경향의 수사학은 그것이 표현되면서 스스로 고갈된다. 이 수사학에 정치적인 발언을 대립시켜야 한다. 정치적 발언은 불평을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방향을 잡게 하며, 이 불평에 성공적인 배출구를 제시하고,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절제된 용어로 표현하게 해준다. 문제들을 얼빠지게 되풀이하는 것, 이와 같은 일종의 정신적 수음은 우리의 유일한 의지에 달려 있는 변모 가능한 것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불변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불운은 운명의 피할 수 없는 심판처럼 체험된다. 개인은 그를 초월하는 어떤 것 - 특히 시민의 절대적 주권 - 에 참여할 때에 만 위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 갇혀 있지 못하며, 자신을 둘러싸는 배려 앞에 항복한다. 그리고 여분의 보장을 받았다고 믿으며, 그는 증대된 허약함을 거두어들인다. 우리는 이러한 측면을 토크빌 이래로 알고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것은 오해이다. 후자는 인간성의 영원한 특성이고, 전자는 문화의 역사 속에서 최근에 형성된 것이다. 현대의 개인이 적어도 이기주의자만 되어도, 그리하여 자신 안에 최소한의 그 생명력과 보존 본능만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에고를 보존하고 어떤 작은 충돌에도 그것을 보호하려 함으로써 에고를 결국 죽이고 마는 이기주의의 역설을 체험한다.
그 증거는 이렇다. 안정이 확대되면 될수록, 도처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시련에 대해 경계할 필요성이 더욱 확대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덜 위태로워질수록 더욱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확대되고, 의학의 발달은 온갖 종류의 병리현상에 대한 비합리적인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조르주 뒤아멜이 1930년에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건강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실제거인 위험을 보다 잘 다스리고 있는데도 상상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단계를 넘어서면, 우리가 지닌 해방의 도구들은 우리를 약화시키는 보조 수단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정적 시대의 자유주의적인 위대한 반항의 황혼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자율의 주장은 도움의 열광적 추구 속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자신을 주장하려는 용기는 나태와 보호를 바탕으로 한, 추위를 잘 타는 조그마한 행복의 문화로 나가고 있다.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자기가 절대적 주권자이기를 원했던 사람조차도 자신이 지닌 공포심의 노예가 되고 있으며, 도움을 청하고 온갖 종류의 지팡이에 의존해서 생존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자유롭다는 것은 우선 애정과 송호성의 관계를 즐기는 것이다. 이 관계는 우리를 우리의 동료들에게 연결시키고, 우리를 인간적으로 연결된 개인들, 책임 있는 개인들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성에 제동을 걸면서 이 독립성을 새롭게 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온갖 방해물들로 가득 차 있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또한 타자에게 속박되는 것이고, 결코 타자에 대해 의무가 없다고 믿지 않는 것이며, 인간관계가 구성하는 증여-교환-의무의 망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어떤 빚도 벗어 버린 채 자기 잔신에 대해서도 더 이상 책임을 질 수 없을 때, 개인과 개인의 책임으로부터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수호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존재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나는 아직도 나인가?"(헬렌)
이 책에서 '자기 희생화 경향'이란 표현을 봤을 때, 현대인의 축소된 자의식을 콕 집어내는 '산듯함'을 느꼈었다. 어떤 면에선 다소 과장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위대한 자아'를 꿈꾸던 전통적 서사 속에서 '소인'이나 '불신자', '야만인' 등으로 취급되는 '배제된, 목소리 없는 목소리로서의 사람들'의 존재를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특징은 그렇게 배제되거나 외면되었어야 할 목소리들이 버젓이 '정상'의 소리가 되어 울리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물론 그러한 전환적 관점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빈약한 자의식은 충분히 우리를 한숨 짓게 한다.
불의에 순종하는 자아마저도 정당화하는 주체들의 맨언굴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은 커녕 부끄럽지 않은 인간조차도 '초인'의 영역에 가져다 놓고 골동품 취급하는 식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명예로움마저도 사치를 부리는 것이라든지 바보짓으로 취급하며, 스스로의 천박함을 정당화 하는 식.
미성숙, 비성숙이 떳떳한 시대... 오히려 부끄러움은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과 명예를 꿈꾸는 사람들의 몫인 이상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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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이 책의 번역이 매끄럽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동문선의 총서' 시리즈가 대체로 그런 번역 품질 문제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구절의 인용은 2004년 12월 10일에 작성된 것이었고, 오늘(2022-12-17) 약간의 감상을 덧붙였다.
학부 때 스크랩한 이 구절을 다시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학술적 고민과 관련해서, 종교적 가르침의 퇴조와 '주체의 외소화' 사이의 상관 관계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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